< -- 192 회: 60 음흉한 음모 -- >
2
주말 아침, 10시쯤 일어나 이모와 늦은 아침을 먹으며 언제나처럼 이모와 말다툼을 했다. 시비는(?) 이모가 먼저 걸었다. 이모 입장에서는 당연한 충고였는데 그마저도 난 듣기가 싫었다.
"일찍 좀 다녀. 과년한 처녀가 하루걸러 새벽 2시가 뭐니?"
어젯밤에도 이제는 아예 단골이 되어버린 그치와 2차를 나갔다. 그치는 폭주 기관차처럼 맹렬하게 내 아랫도리를 들락거리며 겪어본 여자들 중에 아랫도리 놀림이 단연 유별나다는 말을 줄기차게 시부렁거렸다.
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이모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기다리지 말랬잖아."
이모가 입 꼬리를 올리며 냉큼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얘, 그걸 말이라니 하니?"
나 역시 언제 적부터 전과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말로 받아쳤다.
"오지도 않는 그 작자를 기다리는 이모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러자 이모가 도끼눈으로 날 째려본다.
"또 헛소리 할 거니?"
나는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뭐가 헛소리야? 구제불능이다 못해 개만도 못한 인간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모가 난 한심해 죽겠어. 이모, 별거도 별거 나름이야. 이건 아예 이혼보다 못하다는 거 이모는 알아 몰라? 이모, 난 이모가 지금이라도 번듯한 남자 만나 연애다운 연애를 하는 거 보고 싶단 말이야!"
이모는 연애라는 말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뭐? 연애다운 연애? 너, 웃긴다. 나더러 바람이라도 피우라는 얘기잖아. 그게 이모인 나한테 할 말이니?"
나는 또 가슴 한켠에 불덩어리 같은 화가 확 치미는 바람에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나도 모르게 그만 내뱉고 말았다.
"말이 아니면 소리라고 생각하고 새겨들으면 어디가 덧나? 밤마다 수음으로 대리만족을 취하는 이모가 불쌍해서 죽겠단 말이야!"
그러자 이모가 말 끝나기 무섭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나쁜 계집애!"
하고는 휑하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모 뒤통수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남자 아랫도리가 간절해서 미치겠으니 남자 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해!"
그때 나는 들었다. 가냘프게 들리는 이모의 흐느낌을!
나는 그 흐느낌에 머리가 돌아버릴 그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울긴 왜 울어! 기다려! 그 작자보다 더 기똥차게 해주는 남자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만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천기누설이나 다름없는 나의 음모를 까발린 꼴이었다.
***
3일이 지났다.
마침내 기다리고 있었던 대학 선배의 전화가 왔다. 선배 말로는 남자의 나이는 마흔 다섯, 현재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5년 전에 부인과 사별을 했으며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미국 유학중이라고 했다.
나는 언제쯤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선배는 오늘 퇴근 이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는 심정이라 앞뒤 생각 없이 오늘 저녁 8시경 S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선배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이모에게 그 남자를 만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모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먼저 만나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아서였다. 내가 봐서 이모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니면 없었던 일로 해버릴 작정이었다.
10분 일찍 호텔 커피숍에 도착했는데 선배는 벌써 와 있었다. 선배 옆에는 중후한 멋을 풍기는 중년 남자가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앉자 선배가 그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나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시간을 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나는 첫눈에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모나지 않은 얼굴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특히 기러기 아빠처럼 외로움에 찌든 듯한 표정이 나를 적이 안심시켰다.
한동안 이런저런 형식적인 얘기가 오갔다. 주로 내가 물었고 그는 대답만 간결하게 했다.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다. 그게 믿음으로 와 닿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는 만일을 위해 가지고 온, 작년에 설악산 등반 때 이모와 찍은 사진을 꺼내 남자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이모 사진이에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군요."
남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고는 사진을 집어 눈 가까이 가져가서는 잠시 유심히 훑어보고는 마음에 쏙 드는지 나이답지 않게 얼굴을 약간 붉히며 말했다.
"미인인데다 아직 젊으시니 저한테는 과분한 분인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데 수고 좀 해주시겠습니까?"
"좋게 봐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그럼 약속 장소는 여기로 하고 날짜와 시간은 선배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걸로 첫 미팅은 끝이 났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선배에게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헤어진 나는 곧장 룸살롱으로 직행했다. 휴대폰에는 유독 나만 찾는다는 문자 메시지가 4개나 들어와 있었다. 문득 저번 주와 저 저번 주에 2차를 나간 그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네."
섹스도 마약처럼 중독이 된다는 말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하긴, 나도 무지 좋았으니까."
사실 낯설지 않은 오르가슴으로 날 주눅 들게 만든 유일한 장본인이 그치였다.
택시를 탄 나는 어느 순간 아랫도리로 스멀스멀 파문처럼 번지는 야릇한 반응에 허리가 절로 뒤틀렸다.
'아! 이런 적이 있었나, 몰라!'
그건 분명 벅찬 설렘 같은 흥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오므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럴수록 찡한 감동의 물결이 온몸 구석구석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미쳤어!'
감미롭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한 오르가슴을 아는 내 몸뚱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신을 때리고 있었다.
***
"이모, 간만에 쇼핑 어때?"
이모에게 쇼핑을 하자고 한 건 다다음날 초저녁 무렵이었다, 말은 쇼핑을 하자고 했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고 오늘이 이모와 그 남자의 첫 상견례 날이었다.
굳이 오늘을 디데이로 잡은 건 한 달에 한 번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바로 '그날'이라 룸살롱에 나갈 이유도 없고 해서 오늘로 잡은 것이다.
한 시간에 걸쳐 쇼핑을 끝낸 나는 이모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며 약속 장소인 호텔 커피숍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모는 그때까지 내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가 커피숍으로 들어섰을 때. 그 남자는 벌써 그때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바로 옆 테이블에 앉으며 이모 몰래 그 남자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내가 이모에게 그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한 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서였다.
"이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건성으로 듣고 흘리면 나 화낼 거야.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모 마음이 가는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해야 돼!"
그때 이모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얘는, 무슨 말인데 겁부터 주고 난리니? 그래, 무슨 말이니? 일단 들을 테니 말해."
나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도직입으로 입을 열었다. 속삭이듯 낮게.
"이모 바로 옆 자리 앞에 앉아있는 남자 어때?"
말꼬리가 채 갈무리되기도 전에 이모의 두 눈은 이미 그 남자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곤 이내 흔들리는 눈의 초점으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도톰한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인혜 너, 정말 그럴 작정이었니?"
나는 묻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해댔다.
"마음에 들어? 아니 그냥 마음에 든다고 해! 이모한테는 딱인 남자니까."
이모는 여전히 당혹과 당혹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 나쁜 계집애! 아, 어쩜 나한테 이럴 수 있니?"
그때 난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이모를 소개하고 있었다.
"나 선생님, 우리 이모에요."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모에게 넙죽 고개부터 조아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종규라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남자가 상대방이 황송할 정도로 저자세로 나오자 이모는 뭐에 홀린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아, 네, 전 심정애라 합니다."
나는 각본대로 이쯤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에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되세요! 이모, 파이팅!"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쇼핑백을 들고 부리나케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이모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왠지 모르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듯했다.
그날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이모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3
다음 날 아침, 나는 이모에게 그 남자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이모 역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무지 많아 입이 근질근질 했지만 이모 스스로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그 남자에 대해서는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일절 말이 없었다, 거기다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니 오히려 내가 애간장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밤 외출은커녕 은밀하게 주고받는 전화 통화조차 전무했다.
그 지경이니 모든 게 공염불로 끝난 나머지 말짱 도루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입맛이 씁쓰레했다. 속궁합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은 예감까지 들었다. 그 통에 그 작자의 아랫도리가 새삼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나는 이모의 섹스 파트너에 대한 고집을 포기했다. 기를 쓰도 안 되는 건 안 되게 되어 있으니까,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번은 주기적으로 내 아랫도리에 죽자 사자 매달리는 그치와 2차를 나가기로 약속한 날이라 현관문을 나서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이모에게 지방에 있는 대학 선배 집들이 땜에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거짓말을 했다.
근데 예전 같았으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흘깃거리며 한소리 하고도 남았을 이모가 웬 일인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건성으로 알았어,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모의 돌발 반응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야릇한 뉘앙스가 나를 그런 쪽으로 내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