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님은 아이돌 매니저 139화
“블레이즈 말입니까?”
의외라는 듯 곽재권의 목소리가 탁해졌다. 시기적으로 블레이즈가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고 설사 나온다고 해도 비밀로 할 일은 아니었기에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블레이즈입니다.”
“혹시 근거라도?”
곽재권은 쉽게 믿지 못했다. 나름 정보통인 자기가 전혀 예상 못한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술법 만개주망(萬個蛛網)으로 빅풋의 움직임을 파악했기에 나의 정보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부장님. 가리봉동 빅풋이 누굽니까?”
“그야 프로듀서 중에서도 콧대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럽죠. 누가 프로듀싱해 달란다고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죠. 자기가 픽한 아이돌 하고만 작업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곽재권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기까지만 듣고도 대강 그림을 맞추는 듯했다.
“빅풋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세 사람입니다. MYC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이찬, 친형처럼 따르는 박명보 작곡가, 그리고 별 엔터테인먼트의···”
“지니!”
“맞습니다. 블레이즈 전담 프로듀서 지니.”
지니와 빅풋은 무명시절 동거동락하며 음악을 만들었던 친구 사이.
허접한 지하 창고에 녹음 스튜디오를 꾸미고 1년 동안 함께 살며 200곡을 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유명세를 타면서 각자의 길을 가긴 했지만, 관계만큼은 계속 이어져 우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둘이 함께 작업하는 정황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빅풋이 자기 녹음실에서 작업하고 있지 않다는 거고요.”
“네. 그 부분은 저도 확인을 했습니다. 건물 관리소장을 통해 알아봤는데, 요즘 녹음실이 비었다고 하더라고요.”
“그겁니다. 빅풋은 녹음할 때 IAO-2.0 컴프레서만 사용하잖아요. 그래서 장비가 구비된 자기 녹음실 아니면 작업을 못 하는데... 지금 다른 곳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 말은 그 작업실에도 IAO-2.0 컴프레서가 구비되어 있다는 거죠.”
소리를 제어하거나 튀는 것을 막아주는 컴프레서는 프로듀서나 녹음 엔지니어에게는 필수 장비.
요즘은 대부분 소프트웨어 컴프레서를 쓰는 추세인데, 빅풋은 하드웨어 컴프레서 그것도 단종 모델 IAO-2.0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써 왔던 장비라 손에 익기도 했고, 마스터나 그룹 버스에 사용되어 통일감을 주는데 다른 컴프레서는 따라올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IAO-2.0 컴프레서를 쓰는 프로듀서는 빅풋을 제외하고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지니 군요.”
“네. 제가 별 매니지먼트에서 일할 때 지니의 작업실에서 IAO-2.0를 본 적이 있거든요.”
곽재권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근거를 하나 더 들어주려 폰을 켜서 빅풋의 SNS에 들어갔다.
“이 사진 아방가르드라는 카페에서 찍은 겁니다. 별 매니지먼트 맞은편에 있는 카페로 지니의 단골집이죠.”
“확실하네요. 빅풋이 요즘 작업한다는 아이돌이 블레이즈라는 게.”
곽재권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큰 정보를 놓치고 있었다는 게 어이가 없네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보기 좋게 당할 뻔했습니다.”
“저쪽에서 그만큼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다는 거죠.”
“헤이데이의 발목을 잡겠다는 거네요. 백동석 대표 정말 보통이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설진법(只說眞法)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복수만을 꿈꾸다니. 백동석다웠다.
“아무래도 우리가 컴백을 미루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곽재권은 곰곰이 생각하다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블레이즈가 전성기를 살짝 지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최고의 아이돌임은 틀림없었다.
블레이즈가 나온다는 소식만으로도 인터넷을 다 차지하고 대한민국은 뜨거워질 것이다.
헤이데이가 굳이 그 불구덩이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꽃길만 걸어도 모자란데...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면승부를 펼칠 겁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블레이즈가 대단하다고 해도 분명히 상승세는 꺾였다. 별 매니지먼트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빅터스를 키우지 않았나.
대중은 블레이즈가 아닌 새로운 아이돌을 원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아이돌은 헤이데이다.
“대표님. 헤이데이 첫 정규 앨범인데... 안전한 게 좋지 않을까요? 무모하게 나섰다가 실패라도 하면...”
“곽 부장님. 저번에 크레이즈의 곡을 듣고 블레이즈의 3집 ‘트루 아티스트 (True Artist)’보다 낫다고 하셨죠?”
“그건 그렇지만... 노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서...”
“노래만 좋다고요? 지금 현우는 좋은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 보여주고 있고, 재경이는 예능으로 대중 친화력 상승 중이며, 리오도 이번 대회에서 우승이라도 하면 화제성이 장난 아닐 겁니다.”
차마 찬희 얘기는 꺼낼 수도 없었다.
후즈 댓 싱어에서 남현일을 누른 피노키오가 헤이데이의 찬희로 밝혀지는 날은 모든 판도가 바뀔 테다.
“곽 부장님. 우린 계획대로 밀고 나갑니다. 이번 일을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삼아 헤이데이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 줄 겁니다.”
피한다고 피해지는 일도 아니었다. 우리가 컴백을 6월로 미루면 블레이즈도 6월에, 7월로 미루면 블레이즈도 7월로 미룰 것이 뻔했다.
백동석의 얕은 복수심으로 촉발된 일이니까.
“대표님이 그렇게 확신을 가지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곽재권의 흔들리던 눈빛이 어느 순간 멈췄다.
“유리한 것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이제 주도권을 우리가 쥐었다는 것이죠.”
“맞습니다. 우리가 블레이즈의 컴백을 눈치채고 있다는 걸 저쪽에선 상상도 못 할 테니까요.”
이번 컴백으로 헤이데이는 블레이즈를 도화지 삼아 멋진 그림을 완성할 것이다.
***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리오가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득했던 구름들이 듬성듬성 옅어지면서 구불구불 산과 도로와 도시가 차례로 나타났다.
“승객 여러분 곧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오캬쿠노 미나사마 모오 스구 조오리쿠이타시마스 자세키베루토오 시메테이루카 모오이치도 카쿠닌시테쿠다사이 아리가토오고자이마스.”
한국어 안내 방송에 이어 일본어 방송이 도착을 알렸다.
‘컴배트 오브 더 이어.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팀을 만나든 다 쏟아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가야지.’
리오는 각오를 다졌다.
목표는 오직 우승.
그것을 위해 헤이데이의 리오가 아닌 비보이 리오로 그동안 피땀을 흘렸다.
“으하, 일본이네.”
“다 잤어?”
옆 자리에서 졸고 있던 골렘이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탄력 있고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네. 깜빡 졸았네요... 근데 선배 이것 보셨어요?”
“어떤 거?”
골렘은 졸기 전 읽고 있던 잡지, 월드 비보이를 펴서 리오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 대회 우승은 일본이라고 기사가 났더라고요.”
골렘의 목소리가 어딘지 시무룩했다.
“일본팀 에어 윙스에는 월클들이 있잖아. 파워 무브의 신성 카제킥스뿐만 아니라 파이어 볼 일대일 우승자 타누키까지. 득실 하지.”
지금까지 성적으로 보면 일본이 우승하리라는 예상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리오가 나타나기 전의 상황 일뿐.
“아, 옛날에는 우리가 다 먹었는데... 하여튼 전 결승에서 일본팀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과거의 영광을 돌려받게... 선배님은요?”
“나는 어떤 팀이 올라와도 상관없어. 어쨌든 우승 트로피는 우리가 가져올 테니까.”
“그럼요. 트로피는 우리가 가져와야죠. 하하.”
골렘의 표정이 확 풀렸다.
비행기는 활주로에 안전하게 착륙했고, 파워스쿨 크루들은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움직였다.
다들 여권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골렘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어디 불편해? 표정이 힘들어 보인다.”
리오는 단짝 골렘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짝을 지어준 건 아니지만 한 달 내내 연습실과 숙소 그리고 오늘 공항과 비행기에서 리오의 옆자리는 언제나 골렘이 함께였으니까.
“아, 그게... 저는 입국 수속 밟을 때마다 떨려요.”
“왜?”
“중학교 때 가족 여행으로 중국을 간 적이 있는데, 저만 공안에 끌려갔었거든요. 별 일없이 삼십 분 만에 풀려나긴 했는데... 그때부터 노이로제가 생겼어요.”
“왜 끌려갔는데?”
“몰라요... 가이드 말로는 제 인상 때문에 그랬대요. 뭐 순화해서 설명해 주시긴 했는데... 한 마디로 범죄자 인상이라...”
“···중학생이었다면서?”
“···그러니까요.”
골렘의 말투는 억울했지만, 리오는 싱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노안에서 동안으로 변하는 얼굴이 있는데 골렘이 그런 것 같았다. 그런 스타일은 중학교 때 30대 아저씨 소리를 듣고 고등학교 때 20대 아저씨 소리를 듣다가 대학 신입생이 되면 그나마 복학생 정도로 봐준다.
골렘의 걱정과는 달리 입국은 무난하게 잘 진행되었다.
“다 나왔지? 이제 짐 찾으러 가자.”
수장 모도가 인원을 체크하면서 수화물 벨트로 앞장섰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크고 작은 캐리어들이 하나씩 나오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기 짐을 찾아 입국장으로 나가고 있었다.
“여기는 안 시끄럽겠지?”
모도가 리오를 돌아보며 조용히 물었다. 몇 시간 전 인천공항에서 있었던 한바탕 난리가 생각났기에.
헤이데이 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일본으로 떠나는 리오와 파워스쿨을 열렬히 응원해줬었다. 당연히 기분은 무척 좋았지만 예상을 못했던지라,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하고 얼떨결에 비행기를 탄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헤이데이가 아쉽게도 해외 인지도는 아직 미미합니다.”
“확실해?”
“네. 별일 없을 거예요.”
“알았다. 그럼 마음 놓는다.”
모도는 리오의 말만 믿고 편하게 입국장을 나갔다.
그런데,
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
리오 싸랑해!!
파워스쿨 파이팅!!
찰칵- 찰칵- 찰칵-
펑! 펑! 펑!
떠나올 때와 똑같은 난리.
헤이데이의 일본 팬클럽 하루 회원들이 응원 문구가 쓰인 플랜 카드를 흔들며 리오와 파워스쿨을 환영하고 있었다.
“리오. 이게 다 뭐야? 해외에서 미미하다며?”
“아, 저도 몰라요.”
리오도 순간 놀랐지만,
헤이데이를 사랑하는 일본 팬들의 정성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사합니다.”
와와
찰칵- 찰칵-
사랑해~ 리오!!
크루들은 뜨거운 응원을 뒤로하고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모두들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와아, 이렇게나 일본 팬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야, 그게 우리 팬이냐. 다 리오 팬이지.”
“아무러면 어떠냐. 기분만 좋은데.”
“맞아. 사람들이 응원해주니 힘이 펄펄 나는 걸.”
“다 리오 덕분이다.”
지금 이런 기분이라면 당장이라도 우승 트로피를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다.
***
일본에 도착하고 이틀이 순식간에 지났다.
그동안 파워스쿨 크루들은 숙소와 연습실만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잠깐 틈을 내서 여행을 즐길 만도 했지만 우승을 위해 그건 건 다 미루기로 했다.
최종 연습이 끝나고 수장 모도가 크루들 앞에 섰다.
“모두들 빡센 과정을 견디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사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하지만 내일이면···”
모도는 말을 끊고 크루 하나하나와 아이 컨택을 했다.
“이제껏 고생한 것들을 보상받을 거야. 다들 자기 손과 팔꿈치, 무릎, 발목을 한번 봐.”
모도의 말에 크루들은 자신의 몸을 쭉 훑었다. 멍들고 까지고 성한 곳이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했는지에 대한 증거다. 그리고 그 증거 때문에 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우승 트로피는 파워스쿨의 것이라는 걸. 우리는 내일 저녁 우승 트로피를 앞에 두고 파티를 즐기는 거다. 알겠나?”
“네!”
“이제 내일을 위해 푹 자도록 하자.”
“네!”
크루들은 자기 장비를 챙겨 숙소로 향했다.
“리오.”
모도가 리오를 따로 불렀다.
“네, 형.”
“컨디션은 어때?”
“최상입니다.”
“파이널 라운드까지는 무난하게 올라갈 거야. 너와 골렘의 실력만으로도... 아마 저쪽은 일본이 올라오겠지.”
“저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결승에서 이기기 위해선 팀의 호흡을 보여주는 루틴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임팩트 있는 한방도 필요해. 결국 다 잘해야 한다는 거지만.”
리오는 모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파워스쿨의 필살기로 리오가 준비하고 있는 기술을 실수 없이 잘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일 25회전 초고속 엘보 스핀을 꽂을 겁니다.”
“···그래, 그 정도면 안심이다.”
“그런데... 그 엘보 스핀조차 평범하게 만들어 버릴 신기술도 선보일 거예요.”
“기대해.”
모도는 리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