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님은 아이돌 매니저 116화
“사무실 찾느라 고생하지는 않으셨어요?”
“아니요. 지하철역도 가깝고 주변에 알만한 건물이 많아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네. 저희는 차 마시고 있었어요. 한잔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메밀차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앉았다.
‘정규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으려면 무엇보다 크레이즈와 합이 맞아야 해. 작업은 크레이즈와 거의 할 테니. 일단 두 사람의 케미를 보자.’
아무런 경력도 없는 하유진이 문곡 귀인이라면, 헤이데이 음악에 맞춤식 인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곡을 담당하는 크레이즈와 잘 통할 테고.
나는 두 사람의 음악적 조화를 보고 하유진을 판단하려 했다.
“유진 씨. 여기는 헤이데이 음악 담당 크레이즈입니다.”
“크레이즈. 이쪽은 하유진 프로듀서.”
나는 일단 두 사람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크레이즈입니다.”
“네, 하유진입니다.”
크레이즈와 하유진은 어색한 인사를 한차례 주고받았다.
크레이즈가 낯을 가리는 편은 아닌데 하유진에게 전염이 됐는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호로록~
후루룩~
잠시 메밀차 마시는 소리만 요란하게 대기를 채웠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내가 조금 나서야 할 것 같았다.
“참,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네. 2002년 말띠.”
동갑이란 소리에 크레이즈부터 표정이 풀렸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부터 밝히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21살이세요?”
“네··· 21살.”
“아, 우리 동갑이네. 헤이데이에 리오 알죠? 춤 담당.”
“네.”
“걔도 동갑이에요. 21살.”
“네.”
“그럼 우리 편하게 말 놓을까?”
크레이즈의 친화력이 급상승했고 하유진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크레이즈는 하유진과의 대화를 주도하면서 필요한 질문을 했다.
“미디랑 악기는 만질 줄 알지?”
“조금.”
“미디는 언제부터 시작했어?”
미디는 비트와 가상악기를 통해 컴퓨터로 곡을 음원화하는 기술을 말한다. K-pop, 일렉트릭, 힙합, 덥스텝, EDM 등 곡을 만들기 위해서 필수로 배워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음,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쯤.”
“그럼 한 6-7년 정도 됐다는 얘긴데, 실력이 대단하겠다.”
하유진은 고개를 살포시 저었다.
“그게...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년 남짓이야. 부모님 반대가 심했거든.”
“아.”
하유진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꿈꿔왔던 일자리가 주어질지 모르는 면접에서 얼마만큼 자기를 드러내야 하나···
조금만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집 안 사람들이 다 공부 쪽인데 나만 음악을 하고 싶어 하니까 부모님이 이해를 못 하시더라고. 그래서 반대가 심했었어. 한때는 부모님의 뜻대로 음악을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건 물 밖을 나온 물고기 신세인 거지.”
“응. 안 되더라고. 네 말처럼 숨을 못 쉬겠어서.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집을 나왔어. 지금은 사촌 형의 도움으로 음악을 배우는 중이고. 그게 1년 된 것 같아.”
“그렇구나.”
크레이즈는 같이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하유진의 고통을 깊이 공감했다. 비난과 죄책감 속에서 꿈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타고난 기질도 섬세하고 여린데 저런 사연까지 있으니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거로구나.’
나도 자신감 없고 병약해 보였던 하유진의 모습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배경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하유진의 실력이 프로듀서에 적합한지, 크레이즈와 음악적 교감을 이룰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었다.
분위기를 전환하면서 크레이즈가 계속 질문을 했다.
“프로그램은 어떤 거 써? 티베이스? 아니면 로직? 일렉트릭 톤도 요즘 많이 쓰던데. 참고로 난 티베이스를 써.”
“난 컴포지트 X를 써. 그게 손에 잘 맞더라고.”
“컴포지트 X를 쓴다고요? 그거 엄청 어렵지 않나?”
컴포지트 X는 독일의 사운드 링크 회사에서 만든 미디 프로그램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인터페이스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고난도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그렇긴 한데... 익숙해지면 괜찮아. 다른 프로그램보다 기본 샘플이랑 플러그 인 퀄리티가 높아. 레코딩 에디팅 속도도 비교가 안 되고. 내장된 사운드 라이브러리도 티베이스가 10기가가 조금 안 되는데 반해 컴포지티 X는 30기가를 가뿐하게 넘기잖아. 그래서 원하는 사운드를 다 뽑을 수 있고 가상 악기도 만들 수 있으니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다 표현할 수 있더라고.”
음악 얘기를 하는 하유진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도 길어졌다.
“그래도 배우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냥 혼자 이것저것 만지면서 배웠어. 보기엔 어려워 보여도 한번 만져 보면 의외로 쉬워. 재미도 있고.”
하유진에게 음악의 기술적인 면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어려운 프로그램을 손쉽게 쓴다는 건 기계를 잘 다루고 머리도 좋다는 걸 테니까.
크레이즈는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럼 자작곡도 있겠네.”
“몇 곡 있어. 비트 메이킹으로 코드를 만들고 있고, 내 나름대로 프로듀싱한 곡들도 있고.”
대화를 나눌수록 하유진의 실력은 탄탄해 보였다. 이제 말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는 일만 남았다.
“들어보고 싶다. 샘플링은 준비해 왔지?”
“응. 준비해 왔어.”
하유진은 매고 온 가방을 쳐다보며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어제 처음 봤을 때 온몸에 범벅이었던 병약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크레이즈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명수 형. 3층으로 올라가자.”
“그래.”
3층엔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크레이즈는 성큼성큼 앞장서 계단을 올랐고 나와 하유진은 뒤를 따랐다.
***
프로듀서 작업실은 얼마 전에 완성되었다. 인테리어를 하고 크레이즈가 원하는 악기와 장비들로 채우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멀젼 트윈스 220K네.”
하유진이 작업실에 들어와서 한 첫마디였다. 크레이즈가 공들여 들여놓은 고성능 스피커를 하유진이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레이즈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처음으로 장비를 알아봐 준 사람이 생겼으니 기쁠 수밖에.
“이멀젼 트윈스 220K를 알아보네.”
“프로듀싱하는 사람이 이걸 모를 수 있나?”
하유진은 이멀젼 트윈스 220K에 손을 얹으며 감개무량해했다.
“이거 해상도 장난 아니잖아. 너무 선명해서 호불호가 있을 정도지. 하지만 사운드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불호는 있을 수 없어.”
“맞아. 불호는 말이 안 되지.”
크레이즈와 하유진의 마음이 점점 일치되고 있었다. 하유진은 작업실에 놓인 또 다른 스피커도 금방 발견했다.
“여기 앰플 나인도 있네.”
“앰플 나인도 바로 알아봐?”
“당연하지.”
하유진이 싱긋 웃었다. 쓰러질 듯 연약해 보였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장비 크레이즈 네가 다 선택한 거야?”
“응. 전부.”
크레이즈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음.. 미치겠네가 그냥 나온 명곡이 아니었어.”
“응?”
“너 감각이 탁월한 것 같아. 이멀젼 트윈스 220K 해상도에 귀가 무뎌질까 봐 저음 전용 앰플 나인으로 보완하는 거 보면... 대단해.”
‘오잉. 크레이즈가 내게 했던 말과 같네.’
작업실이 완성되고 난 후 크레이즈는 나를 불러놓고 장비 하나하나를 설명했었다. 그때 크레이즈에게서 들었던 말과 하유진의 말이 완전히 똑같았다.
하유진은 스피커뿐만 아니라 오디오 인터페이스, 드럼머신, 미니노바 신디사이저, 누이바 마이크에 이르기까지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장비에 감탄했다.
그런 하유진의 얼굴은 홍조를 띠면서 발랄한 생기가 감돌았다. 크레이즈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둘이 죽이 잘 맞아. 최고의 궁합이다. 오! 그리고... 도도한 자색 빛이다.’
그 순간,
하유진의 등 뒤로 문곡 귀인의 상징인 자색 후광이 드러났다. 억눌려 있던 마음이 풀리면서 자기 본래 색이 드러난 것 같았다.
이제 하유진에 대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헤이데이 정규 앨범을 성공으로 이끌어줄 문곡 귀인이 분명했다.
장비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크레이즈는 하유진의 음악이 들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유진과 쿵짝이 맞는 건 사실이지만, 핵심은 음악.
그의 음악을 들어보기 전까진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샘플링 들어볼까? 아주 기대가 돼.”
“아, 그래. 내가 말이 많았지? 살면서 오늘처럼 말 많이 한 날은 처음인 것 같아.”
하유진은 싱긋 웃으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이멀젼 트윈스에 연결해도 될까?”
“당연하지.”
크레이즈는 작업실 컴퓨터에 꽂혀 있는 이멀젼 트윈스 220K 잭을 뽑아 하유진에게 건넸다. 하유진은 그 잭을 자신의 노트북에 연결한 다음 오디오 세팅 프로그램을 열어서 세밀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됐다.”
준비가 끝나자 이번엔 컴퓨터 폴더를 열었다. 수백 개의 프로듀싱 곡, 비트 메이킹, 자작곡 파일이 쫙 펼쳐졌다.
하유진은 어떤 걸 보여줄까 잠시 생각했다.
“음... 미치겠네가 Urban Electronica 장르인데 강렬하고 경쾌한 리듬이잖아. 아이돌은 정체성에 대한 시그니처가 형성되기 전에 다른 걸로 갈아타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정규 앨범도 미치겠네처럼 강렬하고 신나는 비트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다고 너무 똑같으면 자기 복제가 될 수 있으니 그건 피하면서...”
“어떻게 내 생각하고 똑같냐?”
“그럼, 이 비트가 잘 어울리겠다. 물론 크레이즈 네가 작곡한 멜로디를 먼저 들어 봐야겠지만.”
하유진은 파일 하나를 클릭했다.
쾅쾅쾅!!!
이멀젼 스피커가 진동하면서 충격적인 비트가 터져 나왔다. 첫 벌스(Verse부터)부터 심장을 디스코 팡팡에 올려놓은 것 같은 강한 사운드가 압도적이었다.
‘드럼의 킥이랑 베이스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런 효과가 나지?’
그런데 그것조차 단순하지는 않았다. 드럼의 킥 사운드는 다운시키고 베이스는 업 시켜서 전체적으로 베이스가 킥을 꾹 누르고 있었으니까.
원래 드럼이 뼈대를 잡고 나가면 베이스가 뒤로 깔리면서 음을 쳐 올리는 것이 기본인데, 이건 역으로 베이스를 뼈대로 잡고 드럼의 킥으로 음을 떠받들고 있었다.
“와우, 이런 거 잘못 쓰면 베이스의 음이 다 찢어지는데... 대단하다.”
크레이즈는 입을 쩍 벌린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벌스가 나왔고···
“펑키한 느낌에 808 베이스가 치고 나오는 거 너무 신선해. 그리고 뒤에 스네어가 계속 중심을 잡아주네. 와우!”
크레이즈는 비트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내 몸도 흔들리려는 걸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다. 몸을 흔들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신났지만 체면을 생각해서...
“이건 붐붐붐 스네어라고 이름 지었어. 붐붐붐 촥촥촥. 자, 여기가 포인트야.”
하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드럼 하이엣이 절묘하게 꽂혔다.
붐붐붐! 촥촥촥!
와~
나와 크레이즈는 동시에 감탄을 내질렀다.
‘문곡 귀인 하유진과 함께 한다면 5월 안으로 정규 앨범이 나오겠다. 그것도 최고 완성도로. 하하.’
나도 모르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더 이상의 자제력은 무의미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