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님은 아이돌 매니저 70화
별 매니지먼트 대표실에 배우 파트 고성만 실장이 찾아왔다. 아침 일찍 면담을 요청한 엄지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올라온 것이다.
“대표님. 엄지나가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 <바다에 그린 노을> ‘인혁’ 역에 현우를 추천했습니다.”
“뭐? 헤이데이 현우 말인가?”
“네, 맞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엄지나가 캐스팅에 관여한다는 말 없었잖아.”
백동석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드라마 ‘바다에 그린 노을’ 제작사는 엄지나가 출연하는 조건으로 별 매니지먼트에 두 개의 배역을 배정했다. 일종의 끼워 팔기인데, 엄지나 같은 대스타가 움직일 때는 관행 같은 일이었다.
그중 ‘인혁’ 역할은 비중이 크고 캐릭터도 좋아서 별 매니지먼트 남배우라면 누구라도 욕심내고 있었다.
백현석 아들 민후까지 배역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갑자기 엄지나가 현우를 추천했다니···
“그게, 엄지나가 어제 현우를 직접 봤는데, 연기를 잘하고 배역에도 딱이라고 적극 추천하더라고요. 자기가 지금껏 회사에 뭐 부탁한 적 있냐는 말까지 하면서···”
아~
사실 탑스타 치고 엄지나는 소박한 편이었다. 무리한 계약금을 요구한 적도 없고 청탁을 한 적도 없었고 사건 사고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하면서 별 매니지먼트 주가 상승에만 기여하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복덩어리가 들어왔나 싶을 만큼 엄지나는 백동석에게 소중한 소속 연예인이었다.
그런 엄지나가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냈는데, 그걸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음···엄지나가 그렇게 까지 적극적이라면, 엄지나의 의견에 따라야겠지.”
그때,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
캐스팅 문제를 매듭짓고 있던 백 대표와 고 실장이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형님! 아···니 대표님.”
백현석 상무가 비서를 통하지도 않고 성큼 들어왔다. 얼마나 급했던지 말까지 더듬었다.
엄지나가 현우를 ‘인혁’ 역에 추천했고, 그걸 고 실장이 백 대표에게 보고하러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백 상무.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표실 문을 벌컥벌컥 열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인혁’ 역을 현우가 맡는다고요?”
백현석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백동석은 눈짓으로 고 실장을 내보냈다. 고 실장은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대표실을 나갔다.
대표실엔 백동석 백현석 두 형제만 남았다.
“엄지나가 지금껏 뭘 요구하고 그런 적이 없었잖아. 언제나 회사의 결정을 존중했지. 그런 엄지나가 처음으로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 줘? 엄밀히 따지면 그 배역도 엄지나가 따 온 거고.”
백동석은 백현석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부드러운 말투로 달랬다. 하지만 백현석의 마음은 전혀 달래지지 않았다.
“그건 우리 민후가 점찍어 놓은 배역이잖아요. 안 그래도 헤이데이한테 1위 뺏기고 분해 죽으려고 하는데, 이거까지 뺏기라고요?”
“드라마가 이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시나리오 들어오는 거 많으니까 다시 한번 찾아봐. 민후에게 어울리는 역이 있을 거야.”
“아, 형님!”
백현석은 분통을 터트렸고, 백동석의 인내도 바닥을 쳤다.
“어린애처럼 이럴 거야? 회사가 민후 놀이터야? 앞이 막혔으면 돌아갈 줄도 알아야지. 다른 용건 없으면 나가 봐. 나 바빠.”
백동석은 책상에 쌓인 결재 서류를 펼치면서 돋보기를 썼다. 더 이상 할 말 없다란 의도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 다 형님 때문이에요. 해체하기로 했을 때 해체만 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백현석은 원망의 말을 남기며 대표실 문을 꽝! 닫고 나갔다.
대표실을 나온 백현석은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계속 이렇게 당할 순 없어,’
숨겨 놓았던 번호 하나를 찾았다.
‘가영상회. 아직 번호가 남아 있구만.’
상호는 평범한 가게 이름이었지만, 아이돌 매치 당시 문자 투표 조작을 맡아 줬었던 불법 전산 업체.
백현석은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상무님. 아직 이 번호 가지고 계셨네요.
“지금도 일 하나?”
-금액만 맞으면 언제든.
“액수는 상관없어.”
백현석은 이제 보이는 게 없었다.
***
새벽, 나는 또다시 북한산 백운대까지 올랐다. 순광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쉬지 않고 정진할 생각이었다.
‘내일부터는 또 2주 차 음방을 달린다. 그러니까 오늘 신령한 기운을 한껏 받아놓자.’
눈 쌓인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비우고 명상에 들어갔다. 곧 뜨거움이 배꼽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정진하자,
배꼽 아래 하단전에서 시작한 화기는 심장 아래 중단전을 거쳐 이마의 양미간이 있는 상단전까지 올랐다.
순간 몸속 찌꺼기들이 활활 타버리면서 신령한 기운들이 그곳을 채웠다. 강한 도력이 계곡 물살처럼 온몸을 휘감았다.
후~ 후~
‘순광에 거의 이르렀다. 하지만 욕심은 금물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순광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서 가부좌를 풀었다.
항상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무리를 하다가 몸이 비틀려 쓰러질 수도 있기에 완급 조절을 했다.
휘이이잉~ 휘이이잉~
겨울 칼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얀 눈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산.
허공에 날리는 눈송이가 한 겹의 바람에 춤을 췄다.
잠시 순백의 아름다움을 감상했다.
‘그동안 너무 쫓기듯 생활해 왔어. 조금만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빙의 후 너무 바쁘기만 했다. 물론 헤이데이의 상황이 무척이나 긴박해서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음방이 시작되는 내일부터는 엄청 바빠질 테니, 오늘은 자연을 조금만 즐겨보자.’
나는 살포시 일어나서 천천히 눈길을 걸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정겨웠다,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내 다리 밑으로 와서, 두 발로 서서 손을 쭉 뻗었다.
“목이 마르 구나.”
찍~찍~찍
물병을 꺼내 남아 있는 물을 다람쥐에게 조금 부어 주었다.
다람쥐는 목을 축이고는 자기 갈 길을 갔다.
이번엔 곤줄박이 두 마리가 내 어깨에 날아와 짹짹거렸다.
“너도 목말라?”
손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조금 부었다.
곤줄박이들은 내 손 가장자리로 옮겨 앉아서는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깃털을 두세 번 흔들어 정리하고는 날아갔다.
바스락, 바스락.
어린 고라니 한 마리도 다가와 있었다.
곁을 내주자, 내 다리에 자기 얼굴을 비벼댔다.
나는 고라니의 머리를 따스히 쓰다듬었다.
고오옹, 고오옹.
“그래, 그래. 겨울에 조심하고 엄마한테서 떨어지지 말고.”
고라니는 혀를 내밀어 내 손을 핥고는 숲으로 사라졌다.
‘으흠. 순광의 경지에 다다르니 동물들부터 그 기운에 끌리는 모양이구나.’
그동안 바빴던 삶에 힐링되고 있었다. 얼마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해가 환히 뜨고 등산객들이 몰려들었다. 자연을 만끽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앗, 벌써 10시가 넘었어. 사무실에 들러 처리할 일이 있는데··· 도력이 넘쳐흐르니 다시 한번 축지법이나 써 볼까.’
축지법을 이용해서 사무실로 바로 출근해볼 생각을 했다. 운동복 차림이긴 했지만, 잠깐 사무실에 들러 바쁜 일만 처리할 거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결계를 치고 공간과 공간이 접히는 축지점을 살폈다.
헙!
기가 온몸으로 골고루 퍼지게 한 다음 발을 내디뎠다.
온몸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한 강한 압력을 도력으로 이겨내면서 나아갔다. 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안으로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
팟, 팟, 팟, 팟, 팟. 팟.
‘하아~~여기까지. 그래도 도력이 완전히 고갈되지는 않았어··· 하~아.’
이 정도면 됐다.
처음 축지법을 시도했었을 때보다 도력이 훨씬 향상되었음을 느꼈다.
주변을 살폈더니 별 매니지먼트 사옥 지하 1층 주차장이었다.
밴은 지하 2층에 주차하기에, 지하 1층 주차장은 눈으로 보기만 했지 처음 와 봤다.
조금은 낯선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엘리베이터를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기에 금방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안에 사람이 있었다.
백현석 상무였다.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백현석 상무와 단 둘이 마주하게 됐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난 후,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상무님.”
백현석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만 봤다.
그런데 그 순간 내 귀에 백현석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윽, 이 재수 없는 새끼. 뭐 반가워? 1등도 하고 우리 민후 배역도 앗아가고 그래 좋겠지. 실컷 좋아해라. 그런데 내일도 계속 좋을지 한번 보자.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순광의 기운이 점점 차올라 상대방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타심독견(他心讀見)이 발동된 것이다. 백현석이 분노를 폭발해서 내게 강한 메시지를 보내니, 타심독견이 자동으로 발동돼서 내 귀에 쏙 들어온 것이다.
백현석은 나를 본체만체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기 차로 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나는 문이 닫히기 전까지 백현석의 마음의 소리를 계속 들었다.
-11시 삼정 주차 빌딩 5층이라고 했지··· 은행에 잠시 들러 현찰을 찾아가야겠다. 그나저나 조명수를 여기서 딱 만나다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 어쨌든 헤이데이 이번 기회에 끝장을 보겠어.
‘뭐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백현석의 마음은 독기로 가득했다.
마음을 좀 더 읽고 싶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마음의 소리도 끊겼다.
***
사무실에 올라갔더니 주선해가 반갑게 다가왔다.
“매니저님. 뿜뿜 아이돌 다음 주 녹화 최종 결정 났고요.”
“아, 네.”
뿜뿜 아이돌 측이 우리 쪽에서 제시한 조건을 다 수락한 모양이었다. 다음 주 첫 스케줄로 뿜뿜 아이돌이 낙점되었다.
“NBS 어메이징 인기가요에서 좀 전에 연락이 왔는데, 헤이데이가 1위 후보랍니다.”
“네, 이번 주도 파이팅 해야겠네요.”
저번 주 마지막 음방 뮤직월드에서 1등을 했으니,
헤이데이는 이번 주도 웬만하면 1위를 쭉 할 것이다.
“근데, 빅터스도 1위 후보인데···”
“네, 헤이데이와 빅터스의 대결이 계속될 거라는 건 다들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죠.”
“그게, 빅터스가 생방송에 나온다고 하네요.”
“빅터스가 생방에 나와요?”
이건 좀 의외였다.
급이 있는 아이돌은 1위 후보에 오르면 미리 예상을 하게 된다. 자신들이 1위를 할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1위 할 가능성이 없다면 가차 없이 출연을 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다.
심지어 카메라 리허설까지 다 마치고도 1위에서 멀어졌다 싶으면, 바로 짐을 싸서 가버리는 것이 1티어 아이돌의 기본 행동.
빅터스도 크게 다르지 않아, 2위란 사실이 자명해지면 방송에 나오지 않는다.
‘빅터스가 내일 음방에 출연한다고? 그건 1위를 확신한다는 말인데···’
현재 빅터스는 앨범을 제외한 모든 지수에서 헤이데이에게 뒤쳐 있다.
유일하게 역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것은 생방송 문자 투표뿐이지만··· 그것도 이미 저번 주 뮤직월드에서 밀렸었다.
‘무슨 배짱이지?’
아까 백현석의 마음의 소리와 빅터스의 음방 출연.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뭔가 있어.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