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님은 아이돌 매니저 14화
사전 미팅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크레이즈와 재경은 기분이 좋은지 뒷자리에 앉아 투닥투닥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저 둘 준비 좀 시켜야겠다.’
“아까 한상호 피디님이랑 촬영 감독님 허벅지 봤어?”
백미러로 쳐다보며 말을 걸자, 둘은 장난을 멈추고 내게 집중했다.
“허벅지?”
“아니, 못 봤는데. 그런데 그건 왜?”
갑작스러운 허벅지 타령에 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아까 봤거든. 나 작가님까지 포함해서 세 사람 허벅지랑 장딴지 장난 아니더라. 허리는 헐렁한데 바지는 다리에 딱 달라붙어서 무슨 바위덩이 같았어.”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피디님 허벅지까지 볼 정신은 없었거든.”
“근데 군살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기는 했어.”
지게를 지고 산을 헤매며 촬영을 한다는 피디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 나는 세 사람의 몸을 관찰했었다. 피디의 말은 완전 사실로,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이 엄청났었다.
“고정 출연자 정상우 씨도 근육 덩어리잖아.”
“정상우 선배님 몸 좋은 건 연예계 소문났지.”
“근데 근육은 왜?”
“너희들 나이만 믿고 대비 없이 촬영 갔다가 바로 뻗을까 봐. 일주일 동안이라도 다리 근력 위주로 훈련을 좀 해야 해. 회사 비상계단 오르내리는 게 도움이 될 거야.”
“형, 우리 허약체질 아니야. 안무하면서 노래해도 지치지도 않아.”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산타는 건 쓰는 근육부터가 달라. 산을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코다쳐. 촬영 때 후회하지 말고 준비 좀 해서 가자.”
“알았어. 매니저님이 하라면 해야지.”
“···그런데 난 형이 더 걱정이다.”
이야기가 급작스레 내 걱정으로 바뀌었다.
“나?”
“응. 형 무리해서 촬영 따라오다가 진짜 관절 다 나가는 거 아냐? 촬영 모임 장소까지만 태워주면 우리끼리 갔다 와도 되는데.”
“맞아. ···혹시 형이 쓰러질까 봐 진짜 걱정이야. 아까 피디님도 오죽하면 실례를 무릅 쓰고 그런 말씀까지 하셨겠어?”
하긴 지금 내 몸 상태로 애들에게 몸을 만들라는 충고를 했으니 웃기긴 하다. 하지만 난 예전의 조명수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촬영 전까지 초강력 특훈을 할 거야. 두고 봐. 완전 달라져 있을 테니.”
***
다음 날 새벽 4시,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해오던 대로 생수 한잔을 마신 후, 운기조식으로 기를 모았다. 단 십분 만의 운기조식으로도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현재 내 정신은 신령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광(精光)의 경지이지만 몸은 115 킬로 비대한 살덩어리. 15 킬로를 감량하고 몸속 노폐물을 많이 제거했지만, 겉으로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아직 이 몸으로는 도력을 행함에 있어 제한이 많다. 살을 더 빼고, 뼈와 근육을 튼튼히 하자.’
나는 자연에 살으리랏다 촬영 전까지 살을 빼고 체력을 회복하려 특훈에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세 가지에 신경을 써야 했다.
첫째로 식(食).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오염이 되어 있으면 안 된다. 기름에 튀긴 음식이나 정제된 설탕, 조미료는 최악. 그런 음식을 먹는다는 건 몸으로 독을 주입하고 쓰레기를 쌓아 두는 것과 같다. 몸을 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식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로는 기(氣).
기가 바르지 않으면 몸속 에너지가 소멸하거나 뒤틀려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음양오행에 맞춰 원활하게 기를 운용하기 위해 운기조식을 행한다.
마지막은 기를 담는 그릇인 몸.
타고난 기골에 맞게 근육이 적당히 붙어 있어야 균형이 잡히고 건강을 유지한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다.
이 세 가지를 꾸준히 행한다면 온전한 도인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식은 이미 단식을 통해 어느 정도 다스렸고, 운기조식도 매일 새벽 빠짐없이 행하고 있다.
이제 운동하는 것만 남았다.’
지금까지는 딱히 시간을 들여 운동을 하지 않았다. 조명수의 몸으로 섣불리 운동을 했다가는 무리가 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저번에 회사에서 운동 삼아 계단을 내려가다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 운동을 감당할 정도의 몸은 되었다. 삼일 물만 마셨더니 다행스럽게도 밀물처럼 들어왔던 살들이 썰물처럼 쭉 빠져나갔다.
“이 정도면 운동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현관에 붙어있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의 정비를 했다. 운동복과 운동화를 신고 나는 원룸을 나섰다.
***
이른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쓸었다.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이 무척 시원했다.
의식적으로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쉬며 천천히 걸었다.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페이스를 조절해 가며 원룸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무등 공원을 향했다.
도인의 몸이었다면 이십 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지금의 속도로는 두 시간도 빡빡했다.
물론 축지법을 쓴다면 단 1초 만에도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축지법은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일종의 공간 왜곡현상이기에 신체 단련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축지법은 도력의 최상 단위인 정광(精光)과 천하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도안(道眼)의 경지를 합쳐야만 시전 가능하다. 빙의하기 전 최율하 일 때, 왕왕 시전해 보긴 했지만, 조명수의 몸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아무리 다이어트에 성공한다고 해도.
‘일단은 한 걸음 한 걸음 제대로 걷자. 몸을 최대한 움직여 쓸모없는 살들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야.’
걷다 보니, 가을 새벽 가로등에 비친 붉은 단풍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단풍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상에 젖었다.
‘이 시대에도 단풍은 아름답구나!’
천지암의 골짜기가 생각났다. 노란 느티나무와 붉은 단풍나무가 번갈아 가며 서로 얽혀서 수정처럼 맑은 계곡을 아치 모양으로 덮었던 그 절경.
계곡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빙글빙글 돌면서 우수수 떨어지면,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입속을 맴돌았던 그때.
고요함과 평온함이 일상이던 그 무아지경의 황홀한 세계를 다시 경험하고···
퍼억!
아앗!
그때,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깊은 감상에 빠져, 앞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상대방도 나를 보지 못했던지, 길 위에 두세 번 굴러 나자빠져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앞을 보지 못한 걸 보니, 이 사람도 어지간히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괜찮으세요?”
“···”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내가 다가가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바리했다.
“괜찮으세요?”
걱정이 되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자는 머리를 도리도리 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아, 네. ···괜찮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단풍만큼이나 고왔다. 이마부터 눈썹, 눈썹에서 코끝, 코끝에서 턱 끝까지 똑같은 비율로 떨어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나저나 여자가 정말 괜찮은지 알아야 했다. 크게 다쳤다면 병원에라도 가야 하니까.
“정말 괜찮은가요?”
“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아니 뭐, 저도 단풍에 시선을 뺏겨서 앞을 못 봤어요. 죄송합니다.”
“그래요? 저도 그랬는데. 단풍이 너무 예쁘게 물들어서··· 그걸 보느라 앞에 사람을 못 봤네요.”
여자는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 그러고 머리에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찾는지 더듬거렸다.
“어? 내 모자?”
부딪히면서 모자가 날아간 모양이었다.
“모자를 잃어버리셨어요?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네.”
나는 시력에 힘을 줘서 주변을 살폈다.
“어, 저깄다.”
모자는 환경미화원이 쌓아 놓은 낙엽 더미 위에 너부러져 있었다. 나는 모자를 주워다 낙엽을 털어내고 여자에게 건넸다.
“여기.”
“감사해요. 그럼 전 이만.”
여자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떠나려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여자의 관상을 봐 버렸다.
‘이마에 흑운이 끼어 있어 앞이 보이지 않아. 오늘 분명 큰 사고를 당할 것 같은데. 저 흑운만 걷어낸다면··· 그 뒤론 평탄한대.’
여자의 이마에 선명하게 붙은 불운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여자를 빤히 쳐다만 봤다.
여자는 당황하여 발걸음을 멈췄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네.··· 이마에 안 좋은 것이 붙어 있네요.”
“그래요?”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만졌다.
갈등이 일었다.
‘이 여자를 구해 줄 수도 있지만, 그러면 운명에 간섭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자니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고. 이것 참.’
“이제 사라졌나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니야.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여자가 나와 부딪힌 것 자체가 그녀의 운명일지도 몰라. 난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주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그녀의 몫인 거지.’
나는 오늘 벌어지게 될 불운을 그녀에게 말해주기로 결심했다.
“흑운이 이마에 서려있습니다.”
“네?”
“그 말인 즉, 오늘 큰 사고를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네, 사고요?”
여자는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새벽부터 덩치 큰 남자랑 부딪히고, 사고가 날거란 얘기까지 들었으니, 이것만 해도 그녀에겐 오늘 하루 재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난 내 할 일을 다 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더 말을 보탠다면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므로.
그런데 여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요? 사고를 피할 방법은 없나요?”
여자는 적극적으로 운명을 피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를 사기꾼으로 취부하고 그냥 가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내 발걸음도 멈췄다.
“부적이 필요합니다.”
“부적?”
“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한 장 써드리지요. 혹시 종이나 붉은 펜이 있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운동하러 나온 사람에게 종이와 펜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근처에서 구하려 해도 아직 깜깜한 새벽에 문을 연 상점도 없었다.
“그럼 손을 내밀어 보세요. 손에 부적을 써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손에라도 부적을 써주려 성의를 보였지만, 여자 입장에선 좀 이상했나 보다. 그녀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뒤돌아섰다.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더 권하지는 않았다. 나는 부적 쓰기를 포기하고, 원래 목적지인 무등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잠시 만요. 손만 내밀면 되나요?”
그녀가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끄덕였다.
“자. 여기.”
여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부적을 써 드릴 테니, 오늘 하루는 절대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네. 사실 깜깜한 새벽에 낯선 사람이랑 이러고 있는 거 진짜 이상한 거 아는데, 어젯밤 꿈자리가 많이 뒤숭숭했거든요.”
그녀는 불운을 겪을 거라는 예지몽을 꾸고, 뒤숭숭한 마음으로 새벽 조깅을 나온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만나 사고를 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던 것이다.
이 또한 그녀의 운명!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여자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굳이 그렇게 까진 할 필요가···”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인데 이 정도는 뭐.”
나는 그녀의 손바닥에 한글로 칙령 서풍이라고 썼다.
그녀가 풋 웃었다.
“웃어서 미안해요. 한글로 적힌 부적은 처음이라.”
“굳이 한자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글자에 새겨진 도력이 중요한 겁니다. 오늘 하루는 절대 지워지지 않게 각별히 유의하세요.”
“네, 알았어요.”
나는 무등 공원으로 다시 걸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좀 더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