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사님은 아이돌 매니저 13화
자연에 살으리랏다 사전 미팅 날이 되었다. 크레이즈와 재경을 데리고 OCBS 방송국 로비로 갔다. 10분 일찍 도착했음에도 작가는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자연에 살으리랏다 작가 나소유입니다. 반갑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푸근한 인상의 나소유 작가가 크레이즈와 재경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 우리도 얼른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번에 통화했던 매니저 조명숩니다.”
“감사해요. 매니저님. 이렇게 섭외에 응해주셔서.”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저희가 더 감사하죠.”
“3층 회의실에 피디님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일단 갈까요?”
“네. 가시죠.”
우리는 나 작가를 따라 오늘 사전 미팅이 있을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회의실에는 피디와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 세팅을 하고 있었다.
똑똑-
나 작가가 회의실 문을 열자, 피디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연에 살으리랏다 피디 한상호입니다. 저 카메라 뒤에 서있는 분은 카메라 감독님이시구요.”
키가 훤칠한 카메라 감독이 렌즈를 살피며 인사를 꾸벅했다.
“반갑습니다. 헤이데이 매니저 조명숩니다.”
“헤이데이의 래퍼 크레이즈입니다.”
“막내 재경입니다.”
크레이즈와 재경은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인사성은 성공한 아이돌 덕목 중 하나로 각 기획사마다 철저하게 교육시키는 것. 우리 크레이즈와 재경도 인사성 하나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았다.
“아, 역시 젊은 분들이라 활기가 넘치네요. 이번 촬영 분위기는 기존이랑 많이 다르겠는데요. 하하하.”
이렇게 활달한 아이돌 게스트는 처음이라 그런지 한상호 피디는 기뻐했다. 이런 활기가 프로그램에도 그대로 반영되면 대박이겠다 싶은 표정으로.
“앉으세요. 뭐 좋아하실지 몰라서 주스랑 커피 우유 두유 다 준비해 봤어요.”
“저는 아침에 커피를 마셔서 주스로 할게요.”
“커피 마시겠습니다.”
“전 다이어트 중이라 물이면 됩니다.”
나 작가는 준비해뒀던 주전부리를 내밀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으며 각자 취향에 맞게 음료수 하나씩을 골랐다.
사전 미팅은 시작부터 화기애애했다.
“현역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저희 자연에 살으리랏다에 출연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전에 다른 아이돌들한테 몇 번 섭외 전화를 걸었다 퇴짜를 좀 맞았거든요. 이번에도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흔쾌히 승낙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에 섭외해 주셨는데 저희가 감사하죠. 저희 헤이데이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 바쁘실 텐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네.”
의례적인 인사를 몇 차례 더 나눈 후, 본격적인 사전 미팅이 시작되었다. 한 피디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촬영에 대한 큰 틀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냈다.
“저희 자연에 살으리랏다는 예능보다는 다큐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본은 오프닝 정도고, 대부분은 자연인의 생활을 간섭 없이 관찰하면서 2박 3일 동안 함께 생활하는 것. 그게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인과 고정 출연자 정상우 씨는 당일 날 만날 수 있고요.”
크레이즈와 재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디의 말에 집중했다.
이미 알고 있는 프로그램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는 말은 없었지만, 진지한 자세로 경청했다.
“혹시 저희가 섭외를 해서 좀 의아하지 않으셨나요?”
수첩에 뭔가를 적어나가던 나소유 작가가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 크레이즈에게 물었다.
“··· 솔직히 처음엔 많이 어리둥절했어요. 명수 형한테서 섭외 얘기 듣고 멤버들 모두 잘못 들은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포항 무대에서 저희들을 좋게 봐주셨다고 하고, 또 프로그램이 좋으니까, 출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크레이즈가 주춤거리면서도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잘 설명했다.
한상호 피디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질문을 계속했다.
“크레이즈 씨, 혹시 저희 프로그램 보신 적은 있어요?”
“네, 너튜브에 짤로 올라온 거 몇 번 봤습니다.”
“혹시 기억나는 거 있으면 얘기해 줄래요?”
“정상우 선배님이 살아있는 굼벵이를 씹어 먹는 장면이요. 너무나 유명한 짤이라··· 특히 그 그라데이션 표정 변화는 너튜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봤을 거예요.”
“아, 그건 뭐 엄청났죠. 우리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에게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재경 씨는?”
한 피디는 재경에게도 똑같이 질문을 했다.
회의실에 설치되어있는 카메라에 쓸 만한 영상을 담아내려는 것 같았다.
터프해 보이는 크레이즈보다 귀여운 재경에게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거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저는 자연인이 겨울에 발가벗고 차가운 계곡에 들어갔다가, 바로 나와서 다시 옷 껴입던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이라. 크크.”
재경은 허당미 가득했던 자연인의 모습이 눈에 선한지 유쾌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웃었다. 백번 봐도 백번 다 웃을 수밖에 없는 명장면이었기에.
“하하하. 그 장면도 진짜 유명하죠. 저희가 완전 리얼이라는 걸 보여 준 장면이기도 하고요. 처음엔 편집할까 하다가 자연인의 반전 매력이 압권이어서 그냥 그대로 내보낸 건데, 신의 한 수였어요.
그런데···혹시 말이죠. 만약에 이번 촬영 때도 그런 상황들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한상호 피디는 뭔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재경을 바라봤다.
“계곡물 입수하는 거요?”
“네. 계곡물에 입수하거나 굼벵이를 먹거나 뭐 그런 거··· 사실 촬영 다녀보면 그 정도가 기본 이라서요.”
“저는 먹는 건 가리지 않는 편이라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재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비위 하나는 워낙에 좋으니 자신만만했다. 뭐. 멤버들 중에서 대표로 뽑힌 것도 그런 능력 덕분이고,
순간 한 피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림 하나 건졌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 그래요? 그런데 대부분 다른 출연자 분들도 사전 미팅 때는 잘 먹는다고 하다가, 막상 현장에서 먹으려고 하면 기겁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글쎄요. 저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재경이 한번 더 확신하자, 한 피디와 나 작가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작가는 공책에 크게 동그라미까지 쳤다.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연인이 먹기 곤란한 곤충이나 징그러운 생물을 권하면, 재경이가 기겁하고 도망칠 거라 생각하나 보네.
본방송에서는 오늘의 자신 만만한 인터뷰 영상과 기겁하고 도망치는 모습을 교차 편집해 내보내고.
시청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재경이의 모습을 재밌어하겠지.’
자연에 살으리랏다에서 종종 써먹는 편집 방식이고, 시청자들이 재밌어하는 포인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경이는 정말 맛있게 먹을 놈인데··· 뭐, 피디가 뻥 찌는 걸 보는 것도 재밌겠지.’
나는 프로그램이 어떻게 방송에 나가고 어떤 포인트로 재미를 줄 건지가 눈에 훤히 보였다. 조명수가 정리해 놓은 파일들을 도사의 눈으로 보다보니 척하면 착이었다.
“등산하는 거는 좋아하세요?”
이번에는 나소유 작가가 바통을 이어받아 질문을 던졌다.
“가끔 산에 올라가기는 하는데, 힘들진 않더라고요.”
크레이즈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을 했다.
“저도 체력은 자신이 있습니다.”
재경도 크레이즈의 말에 덧붙였다. 나 작가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2박 3일 정도 자연인과 함께 생활하는데 자연인들은 하루에 3-4번 산을 타요. 대부분 자연인들은 저희들을 배려해서 천천히 움직이기는 하는데, 가끔 고라니 같은 산짐승을 발견하고는 막 뒤쫓을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같이 뛰어 주셔야 해요.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려면.”
“네. 그 정도는 뭐. 저희도 안무 연습하느라 하루에 12시간씩 춤을 추거든요. 체력은 자신 있습니다.”
“체력 딸린다는 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네. 아직 젊고 매일 그렇게 춤을 추니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그 후로도 세부적인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한상호 피디는 자연인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우선 자연인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고, 우리는 관찰자 시점으로 따라다닙니다. 때문에 자연인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해야 해요.
되도록 자연인이 같이 하자고 하면 힘들더라도 호응해 줘야 하고요.
예를 들면 계곡물에 입수를 한다거나 먹기 힘든 음식을 권한다거나. 재미있게 보셨던 영상에 나왔던 장면들처럼요.”
“네, 카메라 의식하지 않고 자연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크레이즈와 재경은 시종일관 장난기 없는 진지한 태도로 미팅에 임했다.
‘크레이즈와 재경. 볼수록 잘 맞아. 이번 기회로 헤이데이가 뜰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거야.
너튜브에 포항 공연 영상도 한 두 개씩 올라오고 있고, 미치겠네 음원도 망고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어. 살아있는 이 불씨들이 자연에 살으리랏다를 통해 활활 타오르기만 하면 돼.
그렇담 ···결정적인 한방이 필요한데. 그저 그런 에피소드들만 나열된다면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한 회가 돼 버리고 말 거야.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도배할 수 있을 만한 굵직한 사건이 필요하다!’
한참 촬영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런데 매니저님도 촬영 때 동행하실 건가요?”
“아···네, 네. 당연히 매니저니까 함께 해야겠지요.”
한 피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버버거렸다.
피디는 곤란한 표정이 되어서는,
“···매니저님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자연인은 산 깊숙한 곳에 사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번 자연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저희는 산 아래 차를 주차해 놓고, 자연인이 있는 곳까지는 걸어갑니다. 촬영 장비나 생필품 같은 건 지게에 싣고 말이죠. 그런데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니에요. 20-30 키로 쌀 한 가마니 이상 되는 무게를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걸어 들어간다는 거죠. 그냥 걸어도 힘든데, 그런데 매니저님은···”
내 비대한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짐짝이 된다면 큰일이니까.
조명수는 180 센티에 130 킬로의 몸무게로 죽었다. 원래는 95키로 정도로 적당한 덩치였는데, 근래 스트레스로 인한 음주와 폭식으로 35키로나 급증가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심장마비도 왔고.
내가 조명수의 몸으로 빙의 하자마자 삼일 동안 물만 마신 덕분에 15킬로가 빠졌지만, 아직도 115 킬로.
험한 산을 타야하는 제작 환경을 생각하면, 피디 입장에선 내가 함께 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촬영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고,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몸만들기는 충분했다.
“아···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몸은 이래도 어렸을 때부터 산을 밥 먹듯이 타고 다녀서 전문 산악인 못 지 않거든요.”
“저, 죄송한 얘기지만 나무가 촘촘해서 걸릴 수도 있는데.”
나소유 작가가 두 손을 좁게 벌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허세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제가 약속드릴 게요. 촬영 날까지 살을 빼서 오겠다고. 나무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좋습니다. 우리 매니저님이 이렇게 확고하시다면 문제없죠.”
한상호 피디가 박수를 치면서 마무리에 들어갔다.
“촬영은 경북 홍천군 내석면 앵산 주차장에서 시작되겠습니다. 매니저님 핸드폰으로 자세한 문자가 다시 갈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촬영 날을 약속하며 사전 미팅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