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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49화 (완결) (249/249)

#249화

재만은 결국 뇌사 판정을 받았다.

판정을 받은 당일, 강숙은 나를 찾아와 재만 소유의 태선그룹 지분에 관한 양도 계약서를 작성했다.

숨겨두었던 차명계좌도 재만의 명의로 변경되면서 그 지분이 양이 상당했다.

내가 갖고 있던 태선전자의 지분과 재만의 지분을 모두 합치면 60프로 가까이 될 정도로.

한국 1위 기업이 내 소유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강숙은 그동안 재만이 야금야금 모아왔던 태선물산 및 다른 계열사들의 지분까지 갖고 와서 모조리 매각했다.

예상했던 금액을 상회해서, 총비용만 50조 원이 넘게 들었다.

그리고 이후 재판 결과에 따라 탈세에 따른 추징금이 붙게 된다면 플러스알파고.

하지만 금액적인 부분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구글,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 등 대형 기업들 중 하나만 처분해도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까.

법인을 통한 계약서까지 다 작성한 뒤 나는 에릭을 GB타워의 최상층으로 호출했다.

에릭은 어젯밤도 투자기획서를 짜느라 밤을 지새웠는지, 눈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괜찮냐?”

“예…. 한국 오면 편할 줄 알았는데 어째 일이 더 많네요.”

“쉬엄쉬엄해. 너도 이제 삼십 대 중반이다. 지금 망가진 몸은 평생 가.”

“또 꼰대 같은 말씀을…. 대표님보다는 일 덜 하니까 잔소리하지 마시죠.”

내가 실웃음을 터트리자 에릭도 따라 웃었다.

“에릭. 나 이제 회장 자리에 오를 거야.”

에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밝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언제 다시나 했습니다. 사실 언제라도 달 수 있었던 건데 그동안 미뤄왔잖아요.”

“이제 때가 된 거지.”

재만의 지분을 사지 않더라도 태선그룹의 회장이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대부분의 지분을 내가 소지한 상태로 회장이 되고 싶었기에 미뤄왔던 것이고.

이름뿐인 회장이 아니라, 그룹을 소유한 회장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에릭은 고개를 갸웃하는 한편, 내가 할 말이 예상이 되었는지 침을 꼴깍 삼켰다.

“GB인베스트먼트는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어.”

“대, 대표님…! GB는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대표님 회사입니다, 이러시지 마세요.”

“태선그룹 회장하면 됐지, 투자회사까지 어떻게 맡겠냐. 그리고 어차피 내 돈으로 굴러가는 회산데 대표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너도 언제까지고 총괄 노릇 할 수도 없고.”

에릭이 대뜸 나에게 절을 올리고는 일어섰다.

“맡겠습니다! 제가 대표할게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천진한 모습에 잠깐 후회가 밀려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순수함이야말로 에릭의 투자자로서의 실력일지도 몰랐다.

“그래. 이곳에 있는 내 짐들은 곧 빼도록 하지.”

“이 방을 제가….”

에릭이 황홀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360도 돌리며 GB타워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에릭 장 대표.”

“네. 서강빈 회장님. 흐흐.”

에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계약조건은 안 물어봐?”

“뭐, 따로 필요 있나요? 지금 받는 1프로 커미션만으로도 웬만한 기업 총수보다도 많이 받는데요. 작년 한 해에만 1조 가까이 받았고요.”

“1프로 더 줄게. 이제 네가 이끌면서 경영해봐.”

“....대표님! 아니지, 이제는 회장님이시죠! 회장님! 저 진짜 잘하겠습니다.”

전생에서도 에릭은 미국의 톱 증권사의 대표로 날아다녔다.

이제 나는 자문 역할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뗄 생각이었다.

“그래. 이제 돈은 원 없이 벌 테니 준희도 잘 챙겨주고.”

“제가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요. 괜히 저를 따르겠습니까?”

“하긴. 네가 안 베풀 사람은 아니지. 잘 부탁할게.”

나를 믿고 여기까지 함께해 준 에릭이 참 고마웠다.

아직 투자자로서의 명성을 알리기도 전부터, 그저 내 말만 믿고 따라와 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평생을 함께 갈 내 동료였다.

***

차를 타고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 도착했다.

다년간 내 전용기를 빌려 가신 분이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할머니!”

바람이 거세게 불어 목소리가 묻혔기 때문에 크게 소리쳤다.

순례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서 등장했다.

“강빈아!”

순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행여나 다칠까 봐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조심하셔야죠.”

“호호. 이렇게 챙겨주는 손자가 있는데 다치긴 뭘.”

“다시 여행 떠나실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호호.”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있는 것을 보아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여행을 갔다 온 모양이었다.

“우선 이거 걸치세요. 한국은 지금 추워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자켓을 벗어 순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며늘아기는 언제 보여줄 거야?”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며늘아기요. 하하.”

“나이 들고 장가가면 너만 고생이야. 갈 거면 얼른 가.”

“고민해보겠습니다.”

순례가 씨익 웃었다.

“그보다 어디 다녀오셨길래 한여름 복장이에요?”

“준만이가 얘기 안 했어? 네가 별장을 세워줬다는 타히티섬에 다녀오는 길인데.”

“요새 조금 바빠서요. 그래서 이런 복장이셨구나. 우선 가시죠.”

“그래. 오랜만에 가족들 볼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떨리는구나.”

차에 타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순례가 말을 끊었다.

“거기 말고. 내가 살고 있는 집부터 가자.”

“관리는 하고 있는데 사람 사는 집이 아니라서 황량할 거예요. 한국 계시는 동안은 저희 집에서 머무르세요.”

진태가 떠난 뒤로, 그가 살던 저택은 방치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든지 순례가 올 것을 염려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사람을 시켜 관리를 하고 있긴 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적막하기 마련이다.

순례가 내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려고.”

“....”

진태가 죽은 지도 벌써 4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진태의 저택에 갔던 것은 순례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임기사. 회장님댁으로 가지.”

“예. 부회장님.”

‘회장님댁’이라는 말을 대체 얼마 만에 쓰는 건지.

임기사도 내 목소리를 듣고는 표정을 굳히고 시선을 정면에 붙박았다.

저택은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사람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겨울이 다가옴에도 집안에 온기가 없었다.

“잠깐 거실에 앉아 있거라.”

“네. 할머니.”

순례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가, 서류 몇 장을 들고 나왔다.

“전용기를 빌려준 답례다. 거절은 하지 마.”

“이게 뭡니까…?”

순례는 주름진 눈가로 나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서류를 건네받고 펼쳐보았다.

“이거….”

“이 집문서다. 앞으로는 네 소유로 썼으면 좋겠어. 살아도 좋고, 살지 않아도 좋지만 네 할아버지의 뜻이기도 해.”

“할아버지가요?”

“그래. 사실 네가 회장이 될 때 선물로 건네주라고 한 거긴 하다만. 준만이 말로는 다음 주에 회장 취임식을 할 거라며?”

그제서야 순례가 다년간의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이 집을 나에게 주기 위해.

“내가 회장이 될 때….”

“그이는 다 알고 있던 게지. 감이 워낙 투철한 사람이니 말이야.”

서류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집은 잘 쓸게요.”

“그래 주겠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눈시울이 붉어졌고, 순례는 나를 안았다.

노인의 작은 몸이었지만 따스하고 포근한 품이었다.

***

가족들과 만찬을 하기 위해 태선호텔 판교점으로 왔다.

가족들과 꼭 이곳에서 밥을 먹기로 했었는데, 계속해서 시간을 미루다 보니 지금에야 자리를 만들었다.

식사가 이루어질 방 안에서는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판교의 전경이 보였다.

가족들은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그럼. 일하는 사람보다는 쉬는 사람이 일찍 와야 하지 않겠어?”

준만이 넉살 좋게 말했고 옆에서 영빈이 거들었다.

“나야 아직 현역이긴 하지만 너만 하겠냐.”

옆에 있던 영혜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들, 엄마 옆에 앉아. 가까이서 좀 보자.”

“하하. 알겠어요.”

옆에 가서 앉자 영혜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희는 여전히 환갑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관리를 잘해서인지 얼굴에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 반면 준만은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이마에 주름이나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진태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랑 데이트라도 하시려면 관리 좀 받으셔야겠어요. 누가 보면 삼촌과 조카인 줄 알겠습니다.”

“이 녀석이!”

준만은 인상을 와락 구겼고, 맞은편에 앉은 영빈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아버지 장난 같지만 진심입니다. 귀찮더라도 어머니 관리받을 때 같이 받아 보세요.”

“....”

내 진심이 느껴져서일까, 준만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뒤에 고베산 최고급 스테이크를 썰고, 파스타와 피자 등 양식으로 점철된 식사를 했다.

한식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지만, 가족들의 취향에 맞춰야지 어쩌겠는가.

그래도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뜨끈한 된장찌개에 밥이었다.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쌀이 없으면 밥이 아니지?”

“흐흐. 그렇긴 하죠.”

그렇게 된장찌개에 밥까지 말아 먹고 나서야 식사가 끝났다.

식후차로 나온 우전녹차를 홀짝이고 말했다.

“내일 취임식에는 오실 겁니까?”

영혜가 부드러운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고, 영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준만이 입꼬리가 부드럽게 늘어졌다.

“당연한 거 아니겠냐?”

***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임직원, 공급사, 협력사, 그리고 지역사회를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저는 오늘 태선그룹 제2대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수십만 태선인을 취임식에 초대할 수는 없었기에, 임원들과 정재계 인사들만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수가 약 삼천 여 명에 달했다.

태선호텔의 대연회장이 가득 찰 정도였으니까.

내가 서 있는 강단 뒤에는 기현, 진석, 채규 등 태선그룹을 함께 이끌어나갈 중추들이 앉아 있었다.

기현은 약속했던 대로 태선그룹의 부회장 자리를 내어주기로 했다.

태선전자와 태선금융을 역임하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맡을 것이다.

채규는 여전히 태선물산의 부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은퇴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후계자 양성에 주력하는 중이었다.

진석은 내가 회장으로 오르게 되면서 태선호텔 계열의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태선백화점이 빠진 유통 계열은 택배사장이었던 재심이 총괄했다.

모두 내가 신뢰할 수 있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전생에서는 더럽게 없던 인복이 이제서야 보답받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간 태선그룹이라 부르긴 했지만, 태선은 그룹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진태의 지휘와 태선경연의 운영으로 인해 그룹으로 운영되었긴 했으나, 전자 계열, 물산 계열 등 그동안 태선은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과반수 이상의 지분을 취득함으로써 진정한 하나의 그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렇기에 저는 가슴 벅찬 설렘과 함께 여러분들과 그려나갈 미래에 대한 소명감으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한국 제일을 넘어, 세계 제일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는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희 ‘태선’이라는 이름 안에는 수익 창출뿐만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이끌어나가야만 하는 의무감이 동반됩니다.”

현재, 태선은 범준과 재만을 겪어 진통을 앓고 있다.

단순히 수익만을 낸다고 만사형통이던 시절은 지난 것이다.

“...앞으로 신(新) 태선은 화합과 단결로 하나가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짧은 연설을 마친 뒤, 나는 정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3천여 명의 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이후로 나를 위해 한국에 방문한 구글의 페이지, 알리바바의 마윈 등 글로벌 인사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곧이어 집행부 소개까지 끝낸 뒤에는 화려한 연회가 열릴 터였다.

그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어디 가십니까?”

따라 일어서려는 기현에게 손을 저었다.

“갈 곳이, 아니 가야만 하는 곳이 있어.”

“저도 가겠습니다.”

“너도 이제 부회장이야. 자리 지켜야지.”

내 뒤에 앉아 있던 페이지와 채규도 의문을 표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기현의 어깨를 두드린 뒤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그토록 염원해 왔던 태선의 회장이 되었다.

세계에 퍼져 있는 자본들을 거두어들인다면 세계 제일의 그룹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강현재, 지나가 버린 나의 생에 대한 미련을 보냈고, 서강빈으로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해냈다.

하고 싶은 일이,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이 순간이 올 때까지, 그간 꾹 참아왔던.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진태의 저택으로, 서재로, 온실로 발을 옮겼다.

진태가 죽은 뒤로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제가 이루겠습니다.-

진태가 마지막을 보낸 이곳에 다시 찾아올 때는 반드시 그 약속을 이행한 후라고 결심했었다.

온실의 천장은 전부 개방되어 있었다.

측백나뭇과의 식물들이 초록빛으로 일렁였다.

그리고 온실 속 가장 깊은 곳에, 흔들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언젠가 흔들의자에 앉아 달콤한 낮잠에 빠졌던 것이 기억났다.

“저 왔습니다.”

내가 뱉은 말이 힘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닿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내 얘기를 시작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에 대해서,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에 대해.

이 이야기는 밤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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