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추가로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재만이 혼자 진태의 선산으로 향했다고 한다.
근처 CCTV를 통해 재만의 투신은 타의에 의한 일은 아니었다고 밝혀졌다.
투신 직전 전화 연결을 했던 모 변호사에 의해 신고가 접수되었고, 곧바로 출동한 119구급대에 의해 심폐소생술을 받은 뒤 병원으로 옮겨졌다.
재만이 투신한 절벽의 높이가 10미터쯤 되었으나, 근처에 나무에 몸을 부딪쳐 충격이 완화되어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의식불명의 원인은 척추 및 온몸 골절로 인한 충격과 경미한 뇌진탕으로 알려졌다.
“서강빈 부회장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태선병원 앞에서는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 있었다.
경호팀이 나를 둘러싸고 취재진을 뚫고 들어갔다.
마이크 몇개가 경호팀의 어깨 넘어 나에게 들이 밀어졌지만, 영균이 그대로 밀쳐냈다.
“고생이 많네.”
내가 걸릴 것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굳이 취재진과 엮일 이유도 없었다.
인파를 뚫고 태선병원으로 들어가자 병원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부회장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병원장에게 맞인사를 하고 뒤를 따랐다.
재만이 머물고 있는 병실은 일전에 진태가 머물렀던 방과 동일했다.
“저 혼자 들어가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지요.”
병원장이 다시 공손히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전의 진태의 위치를 그대로 내가 이어받았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차 실장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괜찮겠습니까. 그 서재만 부회장 아닙니까.”
“의식도 없는 양반이 뭘 하겠어. 괜찮으니까 앉아서 쉬어.”
VIP실 안으로 들어가자 재만이 산소마스크를 낀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는 그의 아내, 강숙이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와!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됐는데!”
강숙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나를 쏘아붙였다.
참고로 강숙과는 조우가 거의 없었지만,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준만이 인정받기 전, 영혜를 무시하고 시종 부리듯 해왔던 주범이 강숙이기 때문이다.
딱히 앙금이 남은 것은 아니지만, 별로 유쾌한 사이는 아니었다.
“횡령한 것도, 주가 조작한 것도 다 백부님이신데 왜 저한테 책임을 떠넘기십니까.”
“네 할아버지도 다 하던 짓이었어. 이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꼴을 당해.”
“남들도 다 하던 걸 했을 뿐인데 왜 우리한테만 이런 일이. 억울하다 뭐, 이런 겁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우리한테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가 뭐니? 태선이, 그렇게 갖고 싶어?”
범준이 대뜸 화부터 내는 습관을 누구한테 교육받았나 했더니,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병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역시 VIP실이라 그런지 외부인용 의자도 푹신해서 몸을 파묻기 좋았다.
“저한테 목소리 높이실 처지가 아니실 텐데요.”
“뭐?”
“아까 백모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저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고. 그럼 더한 일도 벌일 수 있다는 걸 알 거 아닙니까.”
“너, 너!”
강숙이 부들거리는 손을 치켜들다가 다시 내렸다.
“너라면, 강빈이 너라면 이이랑 범준이 다시 꺼내줄 수 있지?”
화를 내다가 갑작스레 회유하는 듯, 목소리를 부드럽게 까는 것까지.
어쩜 이렇게 판박이일 수가 있을까.
“대통령 각하께서 친히 지목하신 사건인데, 저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역시….”
“기재부 장관님이라면 모를까요.”
“...? 기획재정부? 차현섭 장관님?”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저랑 연줄이 꽤 단단하거든요.”
물론 지금 상황에서 현섭에게 말한다 한들, 재만의 죄를 덮긴 어렵다.
현섭이라는 강력한 패를 이런 일에 쓸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강숙이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강빈아…! 이번 한 번만 도와주라. 응? 큰엄마가 뭘 해주면 좋겠니, 말해봐. 도움이 될 만한 건 다 해줄게.”
참으려 했는데 결국 피식, 웃음이 터져버렸다.
“백모님 도움이요? 제가 정말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숙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반문했다.
“그, 그럼 여기 올 이유가 없잖니. 나밖에 없는 거 뻔히 알고 왔을 텐데 제안할 거라도 있던 거 아니었어?”
“아뇨. 백부님 의식 돌아오시면 말씀드리려던 게 있어서 온 겁니다. 그런데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시네요.”
“어머, 이이한테 할 얘기면 나한테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니? 말해보라니까.”
제 남편이 투신까지 해서 의식불명인 상태인데도 강숙은 걱정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놈은 옥중편지로 고발하질 않나, 아내는 제 살길 찾으려 원수 같은 놈에게 빌고 있질 않나.
생각해 보면 재만은 인복이라곤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투신까지 하신 분한테 도리는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겁니다.”
“그래서…? 말을 해야 내가 알아듣지.”
“지금 밝혀진 차명계좌만 해도, 추징금이랑 부과된 세금에 금리까지 계산하면 3조 원이 넘는 건 잘 아실 겁니다. 그걸 제가 내드리려고요.”
“저, 정말…?”
“예. 그렇게 하려면 태선전자 지분은 저한테 넘기셔야 해요. 왜 그런지는 아실 겁니다.”
강숙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가 그대로 매수해드릴 겁니다. 전자 지분이랑 관련 계열사 지분 전부 저한테 넘기신다면요.”
재만 명의의 지분과 차명으로 밝혀진 지분, 범준이 갖고 있던 지분까지 모두 더한다면 현재 주가로만 약 60조 원 가까이 된다.
나는 저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벌어들인 돈을 전부 여기에 쓸 생각이었다.
“그 말은…. 이제 우리 가족은 태선그룹에서 아예 손 떼라는 말이니?”
“떼셔야죠. 지금 태선전자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20프로 아래입니다. 태선그룹 전체 신뢰도도 이번 사건 일어나면서 대폭 떨어졌고요. 태선그룹 살리기 위해서라도 물러나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네가 다 처리해주겠다는 거고…?”
“예. 조세포탈(租稅逋脫)은 제가 다 책임지고 해결할 겁니다.”
차명계좌를 이용해 발생한 탈세나 추징금 관련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수조 원의 손해를 발생하겠지만, 언젠가 해야 할 일을 지금 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이가 뇌사 상태일 수도 있다는 의사 소견이 있거든? 그럼 내가 결정해야 될 수도 있어.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일단 수락한다고 생각하면 돼.”
식물인간도 아니고 뇌사 상태라면, 강숙의 의사대로 일이 진행될 확률이 높다.
뇌사 상태라면 법률적으로는 의사 무능력의 상태로, 강숙이 재산에 대한 분배권을 갖게 된다.
강숙도 이 점을 노려 태선전자의 지분을 나에게 매각하려는 것일 테고.
재만이 투신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흠… 일단 진단 나오면 연락하시죠. 명함 남기고 가겠습니다.”
“알겠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재만을 흘깃 바라보았다.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았고, 얼굴까지 붕대에 가려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투신이라.
추징금에 세금까지 모두 해결하더라도 수십조 원이나 되는 자산을 보유한 재벌이 투신까지 할 일인가.
그깟 감옥살이가 두려워서?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가지고 노는 재벌 새끼가 이딴 일에 몸을 던졌다는 것에 화가 났다.
VIP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뜻밖의 사람이 안에 타고 있었다.
“서강빈.”
범준이 검은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왔다.
“재벌이 좋긴 좋네. 부친상도 아니고 부상인데 휴가까지 내준 거 보면. 감옥 휴가를 귀휴라고 하던가?”
“....”
재벌들은 감옥에 갇혀서도 자식 결혼식은 간다는 말이 있던데, 범준이 곧장 귀휴를 나온 것을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범준은 내 앞에 서고는 입을 꿈틀거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전에 도와주기로 한 거 있잖냐. 진행 중이야…?”
“전에? 뭐 말하는 거냐?”
“장관한테 잘 얘기해서 뒤 봐주기로 했잖아!”
거울로 지금 내 표정을 본다면 물음표를 띄우고 있을 것이다.
“아, 접견실?”
“그래. 거기서 네가 분명 기재부 장관한테 말해서…”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어. 내가 미쳤다고 너를 도와줘?”
“뭐…?”
아버지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제 안위를 챙기고 싶을까.
“그리고 너 추가 기소한 것도 나야.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너 이 새끼!”
범준이 태도를 돌변해 나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영균에게 뒷목을 잡히긴 했지만.
영균은 한 손만으로 뒷목을 잡은 채로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버지나 잘 챙겨. 죗값 다 치르려면 몸은 성해야 될 거 아니야.”
“너, 너…!”
“차실장. 대충 처리하고 내려와. 앞에 취재진 뚫으려면 같이 가야지.”
“예. 먼저 내려가 계십시오. 금방 가겠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노발대발하고 있는 범준도 시야에서 사라졌다.
***
병원을 나와 내가 향한 곳은 태선물산이었다.
진태의 최측근이었으며, 지금은 태선물산을 이끌고, 나를 위해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 중인 고마운 사람.
채규는 의자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셨다면서요.”
“예. 목숨에는 지장 없다고 합니다.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고요.”
“김강숙 여사한테는 말하셨습니까?”
“말했습니다. 의사 소견으로는 뇌사 상태일 확률이 높다고 하네요. 확정된다면 백모가 직접 지분 매각을 진행하겠다고 하더군요.”
채규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부회장님께서 모든 추징금과 조세포탈을 책임지고 해결하신다면 기업이미지도 쇄신될 겁니다. 태선에 대한 국민 여론도 되돌아올 거고요.”
“그렇게 만들어야죠.”
비록 재만과 내가 이제는 철천지원수라 하더라도 같은 집안 사람이다.
태선전자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는데, 나에 대한 공분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재만이 갖고 있는 태선전자의 지분을 모두 매수하려는 것이다.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고 대신 빚을 갚았는데, 누가 나를 비난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태선전자를 이끌 새로울 총재가 필요합니다. 누가 좋겠습니까?”
“태선전자 안에서만 꼽으라면 반도체의 오치동 사장이 제일 적합하겠지요.”
치동이 태선반도체를 맡은 뒤, 경영적인 문제에서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주가가 천정부지로 솟은 가장 큰 이유는 켈러의 활약 덕분이었지만, 이후 안정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치동 덕분이었다.
그런데 태선전자 안에서만이라면.
“더 나은 사람이 있는 겁니까?”
“얼마 전에 금융 부회장으로 보내셨더군요. 이제 자리를 재정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현이를 부회장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채규가 자리에서 빙긋 웃었다.
“이제 신(新) 태선의 회장이 되셔야지요. 취임식을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