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재만은 자신의 아내, 강숙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방금 심비서로부터 대통령 연설이 곧 시작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강숙이 두 손으로 재만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대통령님이시라면, 건설사 시절에 당신이 꽤 많이 도와줬잖아요. 이라크 건설 수주도 당신 아니었으면 따기 힘들었을 거고.”
재만이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내가 따준 이라크 건설 수주 때문에 그 당시 대야건설이 부도가 났는데 그걸 은혜 입었다고 생각하겠어? 생각 좀 하고 살아.
“....”
강숙은 입술을 꾹 다물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2000년 당시, 태선건설에서 포기했던 이라크 수주 건을 재만이 값도 치르지 않고 대야건설 회장에게 넘겼는데, 중동에서 연이어 전쟁이 터져서 대금 회수에 차질이 생겼다.
당신 태선건설에 이어 2위 건설사였던 대야건설은 그대로 부도를 맞이했고.
현 대통령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을, 재만이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통령 연설이 시작되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으로 시작해 심심한 사과의 말씀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연설이.
문제는 그 내용이었다.
-이번 태선전자 관련 사태는 정부와 일체 관여되지 않았습니다! 재벌 기업 총수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정부가 아니라 재만 혼자 벌인 일이고, 정부는 이에 관해 일절의 관용도 베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재만이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을 떨어뜨려 바닥에서 건전지와 분리되었다.
재만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자 강숙은 재만의 팔을 잡았다.
“여, 여보…?”
연설은 계속되었다.
-하도급 갑질, 불공정거래 및 차명거래! 재벌기업들의 불법행위를 싹 다 뿌리째 뽑겠습니다!-
재만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머리를 짚고 있자, 강숙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여보, 왜 그래? 괜찮아요?”
“으으….”
재만은 강숙이 어깨에 손을 올리려 하자 곧장 뿌리쳤다.
“...잠깐 나갔다 올게.”
“당신 지금 불안정해요. 일찍 잠이라도…”
“아니야. 바람만 쐬고 올 거야. 당신 먼저 자고 있어.”
“....”
강숙을 남겨두고 재만은 집을 빠져나왔다.
한 손에는 양주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 겸 수행비서가 달려 나왔다.
“부회장님. 모시겠습니다.”
“차만 두고 가. 경호도 붙지 말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경호원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차 키를 재만에게 건넸다.
그러다 재만의 손에 들린 양주를 보더니 팔을 잡았다.
“부회장님…. 운전하시면서 술은.”
재만은 경호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말없이 차에 올랐다.
경호원은 망연히 재만이 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재만이 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는 곳은 진태가 묻혀 있는 선산이었다.
모든 것을 잃게 된 이 상황에서 진태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다른 손으로는 양주를 쥐고서 벌컥 들이켰다.
“흐흐….”
실웃음이 새어 나왔다.
태선그룹의 회장 자리까지 생각했던 자신이 어째서 여기까지 치달은 것일까.
회장은커녕 자신이 최대 주주였던 태선전자까지 잃게 될 상황에 놓였다.
재만은 스스로 욕심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태선그룹의 장남으로서, 진태에게 가장 인정받는 자식으로서 회장을 이어받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회장이 되고 나면 다른 동생들에게도 한 자리씩 챙겨줄 생각이었다.
진태의 눈 밖에 나면서 완전히 인생을 말아먹은 정순이나 동만도 다시 태선가로 불러올 것이었고.
계획했던 미래가 하나, 둘씩 어긋나더니 이제 하나뿐인 아들놈은 감옥에 갔고, 자신도 그 뒤를 잇게 생겼다.
“아버지…. 다 그놈 때문입니다.”
정순과 동만이 집안에서 쫓겨난 것도, 범준이가 감옥에 간 것도, 재만, 자신이 모든 것을 잃게 된 원흉.
실력은 모르겠으나 운 하나는 끝장나는 서강빈.
검은 세단은 황색 실선을 넘나들며 나아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어섰고, 알싸한 취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산이 있는 인천에 도착했을 때, 해는 수평선에 걸쳐 있었다.
재만은 차를 대충 주차시킨 뒤에 산을 올려다보았다.
높이가 낮아 진태의 무덤이 있는 중턱까지는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 탓에 재만은 옅은 입김을 내뱉었다.
십 분쯤 올라갔을까.
“후우….”
걷는 것도 익숙지 않은데, 산까지 타려니 재만은 벌써부터 허리가 쑤셨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후.”
점점 거친 몰아 내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제 비가 왔었는지, 축축한 흙바닥이 머금은 습기에 바지가 젖는 느낌이 들었다.
재만은 다시 실소했다.
시야의 끝에 진태의 무덤이 걸려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의미인가.
죽은 사람이 뭘 할 수 있다고.
돌아가자.
한 손에 여전히 들려 있던 양주를 들어 벌컥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키고는 아쉽다는 듯 혓바닥을 내밀었다.
“끄윽….”
속이 천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다.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정도 내려가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재만의 전담 변호사, 유태호였다.
좋은 소식은 절대 아닐 것이다.
대통령이 재만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걸 공공연히 알린 지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또 어떤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무엇을 상상하더라도 지금보다 비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만은 휴대폰을 들었다.
“나일세.”
“부회장님! 왜 연락이 안 되셨습니까.”
“바람 좀 쐬고 있어.”
“집 밖으로 나오셨다면서요. 오늘은 집 들어가지 마시고 다른 데서 주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집 앞에 기자들 쫙 깔렸습니다.”
“...그 말 하려고 연락한 건 아닐 텐데.”
“....”
태호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이보다 밑바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괜찮으니까 말하게.”
“부회장님. 저는 부회장님을 위해서만 일해왔고, 그럴 겁니다.”
태호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나를 위해서만 일하겠다고?’
아니다.
“내가 주는 임금과 명예를 보고 일하는 거겠지. 그건 아무런 상관없네. 말해봐. 뭐가 나를 위한 길인지.”
범준에게 누명을 씌우라고 제안했던 것도 태호였다.
이번에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우선… 실형은 피할 수 없다는 거 잘 아실 겁니다. 청와대에서 직접 나섰고, 지금 부회장님은 국민의 공분을 사고 계십니다.”
“자식까지 팔았는데 실형을 피할 수 없다라. 이게 자네가 말한 최선의 상황인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드님이 옥중 증언을 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일단 벌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재만이 양주병을 풀숲으로 던지고는 말했다.
“최선을 다할 게 또 뭐가 남아 있는가.”
“현재 밝혀진 차명계좌에서만 추징금이 3조 1천억 원이 넘을 텐데, 일단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주식 처분하시고 자진 납부하는 게 형량 낮추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뒤에 정권 바뀌고 여론 잠잠해질 즈음 광복절 특사 같은 걸 노려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결국 어떤 수를 써서라도 실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자 재만은 휴대폰을 그 자리에 놓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산에 오르며 봐두었던 곳이 있었다.
동산 수준으로 고도가 낮은 산이었지만, 절벽 하나쯤은 있었다.
높이는 건물 4층 정도 되려나.
고민은 진작에 끝났기에,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재만은 몸을 던졌다.
***
-경찰은 어제 오후 9시경에 인천 모 산에서 태선전자의 부회장, 서재만 씨가 투신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재만이 어젯밤 진태가 묻힌 선산에서 투신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현재 서재만 씨는 의식이 돌아오고 있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의식이 없다라.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뉴스에 따르면 높이 10미터는 되는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하니, 심각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투신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연설이 그렇게 충격적인 내용도 아니었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상황 아니었나?”
기현은 뒷짐을 진 채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여온 일들이 싹 다 터지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추징금을 낸다고 해도 실형까지 피할 수는 없으니까요. 서범준도 서재만 부회장 때문에 감옥에서 추가재판이 열린다고 하니 그 죄책감이 어련하겠습니까.”
“하긴.”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아들 형량까지 늘렸는데, 결국 옥살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게 죄책감에서 온 것이든, 자괴감에서 온 것이든 견디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재만이 이대로 의식불명 상태가 된다면, 더 이상 나를 가로막는 것은 없어진다.
별다른 절차 없이도, 내가 선언만 한다면 자연스럽게 태선그룹의 회장이 되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태선이 온전히 내 손아귀에 쥐어진다.
내가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태선그룹은 전생에 비해 약 1.5배에 달하는 성장을 거두었다.
태선택배부터 시작해 태선증권사, 태선물산, 태선호텔 등 내 손을 거친 기업들은 특히 압도적이었다.
만약 재만이 합병하기 위해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더 커졌겠지만, 이 정도로도 엄청난 성과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손에 쥘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세상사가 다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야.”
전생을 한 번 살다 왔음에도, 세상은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강의 흐름은 알고 있지만, 내일 비가 올지는 모르는 것처럼.
“병원은 태선병원인가?”
“예. 아까 병원장에게 전화가 오더군요.”
“흠…. 가보긴 해야겠어. 백모(伯母)님만 계시려나?”
“연락받기로는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연락 온 거 없고?”
기현이 고개를 저었다.
재만이 준만의 맏형이라고는 하지만, 둘의 관계는 평범한 형제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재만은 단 한 번도 준만을 자신의 혈육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준만은 그것 때문에 태선물산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온갖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재만이 투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충격이 클 것 같진 않았다.
“가지.”
“차 대기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태선병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재만에게 그간 없던 정이 생겨서가 아니었다.
그의 아내, 강숙에게 볼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