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한 병에 수천만 원이 넘는 로마네 콩티가 몇 병이나 방바닥에서 구르고 있었다.
초아가 내 와인잔을 다시 채웠다.
“한 잔만 더….”
“많이 취했습니다. 여기까지 하시죠.”
화장이 옅은 이유도 있겠지만, 초아의 볼은 한참 전부터 발그레 달아올랐다.
“오늘은 아무도 못 말려요. 더 마실 거야.”
초아가 내 와인잔을 가져가더니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
“하….”
나는 한숨을 내쉬고 초아가 사 온 치즈를 내밀었다.
“안주도 먹어야 속이 안 상하죠. 이게 지금 몇 병째입니까.”
초아가 와인을 꿀꺽 삼키고는 낼름 치즈를 받아먹었다.
그녀는 치즈를 질겅이며 말했다.
“강빈 씨는 왜 그만 마셔요?”
“그야 내일 태선호텔 임원 회의도 있고, 아침에는 태선물산도 정기총회가 있어서 가봐야 합.”
초아가 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진짜 재미없게 사시네.”
“....”
재미없게 산다라.
단 한 번도 살아가면서 재미를 추구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재미있을 때가 있긴 했다.
“저도 나름 재미있게 삽니다. 이번에 설립한 ‘GB톡’이라는 기업이 있는데 내년에 스마트폰 출시와 맞물리면 기대수익이 상당해요. 수년 안에 몇천억 원 이상의 수익이 예상되는데…”
“그런 게 진짜 재밌어요?”
“저는 살면서 돈 버는 것만큼 재밌었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무 살 때는 왜 그렇게 망나니처럼 살고 다녔대.”
“후….”
그건 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곤란해졌다.
“왜 말이 없어요? 숨겨둔 여자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초아 씨도 보시면 알겠지만 그럴 시간 없습니다. 요새는 좀 널널하게 살고 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정말 쉴 틈 없이 일했거든요.”
“그럼 강빈 씨. 저희 만날래요?”
“네…. 네?”
잘못 들었나 해서 초아를 바라봤다.
“사귀자구요. 우리.”
초아의 말에서는 농염하게 익은 딸기 향과 구수한 치즈 냄새가 났다.
그러면서도 체리, 블루베리의 내음이 강렬하게 풍겼다.
“초아 씨 입에서 로마네 콩티 향이 납니다. 위장에 와인이 가득 찼나 봐요.”
초아의 얼굴이 한 차례 더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민망했는지 비어있는 와인 병을 한 손으로 쥐고 들어 올렸다.
“최악의 거절이네요.”
“하하. 죄송해요. 초아 씨는 참 괜찮은 사람이지만. 저는 다른 사람 만날 생각 없어요.”
전생에서의 내 나이만 해도 53살이었고, 서강빈으로 살아온 지 15년이 되었다.
육신은 젊지만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가끔 젊고 건강한 육신이 여자를 찾기도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자식뻘에 불과한 초아도 이쁘고 귀엽긴 하지만, 여자로 보이진 않는다.
초아가 눈을 반쯤 추켜 뜨며 쏘아붙였다.
“왜요. 10년이 넘게 애인도 없으셨다면서요. 이제 태선 그룹도 정리됐고, 연애할 시간 정도는 되지 않나요?”
“초아 씨는 참 매력적인 사람이죠. 연애를 하면 손을 잡고 싶어질 거고, 손을 잡으면 결혼을 하고 싶어질 겁니다. 그리고 아이가 생기겠죠.”
“그래서요…?”
초아의 얼굴에 흥미진진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저는 후대를 남길 생각 없습니다. 저희 집안사람들 보세요. 경영권 물려받겠다고 별 짓거리 다 하지 않습니까. 제 자식이 그런 일 벌인다고 생각하면, 연애 감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어요.”
“진짜 별난 사람이네.”
초아가 와인잔을 들었고, 나도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한 모금을 머금고 음미하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정관수술을 받는 건 어때요?”
“푸흡!”
“푸흡.”
황급히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입 안에 있던 와인 몇 방울이 초아의 옷에 튀었다.
초아도 그 모습을 보고는 깔깔대며 웃었다.
“강빈 씨가 먼저 놀렸으니까 정당방위예요.”
“하하. 그런 걸로 하시죠.”
나도 즐거운 마음이 들어 다시 잔을 들고 와인을 홀짝였다.
“그럼 종종 같이 술친구나 해요. 강빈 시 친구 한 명도 없는 거 다 알아요. 혼자 외롭게 술 마시지 말고 같이 마시자구요.”
“그건… 좋습니다.”
“분명 강빈 씨가 좋다고 했어요. 건배가 무슨 한자가 쓰인 건지는 아시죠?”
“마를 건에 잔 배 아닙니까?”
“그럼 건배!”
“...?”
초아는 잔을 부딪치고는 와인을 주욱 들이켰다.
그러고는 꿀꺽 삼키더니 제 머리 위로 털었다.
“캬아. 이 맛이지. 조신하게 있느라 힘들었네요. 뭐 해요? 강빈 씨. 잔이 말라야죠! 구경만 하지 말고 빨리 털어요.”
“....”
수천만 원짜리 와인을 원샷 때려버리는 술친구가 생긴 것 같다.
***
초아와 거의 밤을 지새우며 와인을 마셨다.
초아를 위해 준비한 로마네 콩티 3병은 물론, 같이 사 온 부르고뉴 지방의 그랑크뤼까지 대여섯 병은 깐 것 같다.
서강빈의 몸이 아무리 술에 강하다지만 이 정도는 힘든 모양인지 잠에서 깨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머리맡에 놓인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해가 뜨기 직전까지 술을 마신 뒤, 초아는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운전기사를 시켜 초아를 집에 보내고, 나는 GB타워의 최상층에서 잠을 청했다.
최상층은 내 독채로 쓰이기 때문에 따로 침실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침실을 나오자 아침에 청소부가 다녀갔는지, 어젯밤 흔적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서 있는 자세에서 길게 기지개를 켜고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후우….”
그러자 숙취가 대부분 가셨다.
“젊은 몸이 좋긴 좋아.”
오랜만에 과음을 했음에도 기지개 한 번만으로 몸이 가뿐했다.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기현이 나왔다.
“부회장니…임?”
“왔어?”
기현이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늘 깔끔하게 하고 다니던 내가 까치집 모양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어서 저러는 것 같다.
“아, 어제 여기서 잤거든.”
“지금 10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잔소리하는 거야? 흐흐.”
“아, 아닙니다….”
기현이 당황하는 얼굴이 제법 재밌었다.
기계처럼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기현도 꽤 많이 변했다.
그나저나 10시라니.
이 시간에 일어나 본 적이 언제더라.
“오늘 서영만 부회장 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연락이 없으셔서 왔습니다.”
“그랬지. 어제가 그 양반 생일이었거든.”
그리고 그 말은 영만이 만 나이로 60살이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럼….”
“응. 오늘이 그 양반 정년퇴직하는 날이야.”
물론 공무원도 아닌 기업에서 정년 60세 규정은 아직 법 개정이 되지 않아 의무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내가 쥐고 있는 영만의 약점만 수십 개는 될 터인데.
지금까지 자르지 않은 것만으로 영만은 나에게 감사를 표해야 될 것이다.
“직접 가실 필요 있겠습니까? 제가 정리하고 와도 됩니다.”
“내가 직접 가는 게 나아. 허튼 생각 못 하게 해야지.”
“알겠습니다. 그럼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너도 같이 갈 거야.”
기현의 눈에 잠시 의아함이 떠올랐다가 곧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씻고 나갈게. 1층 카페에서 쉬고 있어.”
기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엘리베이터로 몸을 돌렸고, 나는 침실 옆에 나란히 있는 샤워실로 발을 움직였다.
***
태선보험 본사에 방문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신경 쓸 새 없이 바쁘기도 했고, 기현이 구축한 감시 시스템이 워낙 탁월해 영만이 딴짓할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빈아… 여기는 무슨 일로…?”
“자기 회사에도 못 옵니까.”
“뭐, 뭐…? 강빈아. 태선보험의 부회장은 나야.”
“차 실장. 전해 줘.”
영균이 잘 포장된 네모난 종이 박스를 건넸다.
“저희 태선호텔에서 판매하는 케이크입니다. 입맛을 잘 몰라서 제일 잘 팔린다는 걸로 갖고 왔어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그래…. 고, 고맙다.”
영만이 눈알을 굴리며 두 손으로 케이크를 받았다.
“정년도 축하드리고요. 그동안 제 태선보험을 이끌어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빈아…!”
털썩 무릎을 꿇은 영만에게, 이번엔 기현이 갈색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몇 년 전에 태선캐피탈과 태선증권사에서 돈을 끌어다 쓰셨더군요. 그에 대한 자료들과 태선보험에서 횡령한 정황들, 속칭 ‘구사장’이란 인물과 접촉해 불법 대금 회수를 진행한 것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이게 무슨…?”
의문을 표하고 있는 영만에게 내가 대신 설명했다.
“태선캐피탈과 태선증권사 둘 다 제 회사지 않습니까. 서영만 부회장님은 제 돈을 훔치셨고요. 제가 선택지를 두 개 드릴 테니 고르세요.”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야! 나 그동안 깨끗하게 태선보험 잘 이끌어 왔어. 너도 실적표 보면 알 것 아니냐. 업계 부동의 1위, 태선보험을 내가 만들었다고!”
“그렇게 뛰어나신 능력으로 새로운 보험사 설립하셔서 태선보험을 꺾으시면 되겠네요. 아무튼 제 말 끊지 마세요.”
영균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자 영만이 몸을 움찔했다.
“첫 번째 선택지는 서영만 부회장님이 태선캐피탈, 태선증권사에서 끌어다 쓴 돈과 태선보험에서 횡령한 돈과 동일한 시가의 태선보험의 주식을 저에게 넘기는 겁니다. 당연히 그간 이자도 계산해야 하구요. 제가 계산해봤는데 갖고 계신 태선보험 지분을 전부 넘기시면 얼추 계산이 맞더군요.”
태선보험의 기업가치는 대략 9조 5천억 원 정도이고, 영만이 갖고 있는 지분은 약 33프로로 3조 원이 조금 넘었다.
영만은 태선카드 이전부터 다른 계열사의 자금들을 끌어다가 비자금 형성 및 태선보험에 투자했고, 그 금액이 얼추 3조 원이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빼먹은 돈과 갖고 계신 돈이 같다니 말입니다. 딱 맞아떨어지니 얼마나 깔끔합니까.”
“강빈아…. 그거 내 전 재산이야. 내가 수중에 있던 현금까지 태선보험 지분 사는 데 쓴 거 다 알고 있잖아.”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다 부회장님이 진 빚을 갚으려고 그러셨던 거 아니었습니까?”
이게 지금껏 영만을 그대로 두었던 이유다.
그가 횡령하고 자금수혈을 하느라 빼돌린 돈들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서.
영만이 고개를 거칠게 흔들자 턱살이 따라 움직였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그동안 어떤 심정으로 모은 것들인데 그걸 한순간에 빼앗겠다고? 네 이노옴!”
벌떡 일어나려는 영만을 영균이 제지했고, 나는 이어서 말했다.
“두 번째 선택지도 들으셔야죠. 지금껏 불법으로 쌓아온 모든 돈을 추징당하고 지분을 몰수당하는 것. 이건 돈이 더 들겠네요. 잘못하시면 백부님처럼 감옥 들어가실 수도 있고요. 그래서 추천 드리는 건 첫 번째입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영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첫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나는 기현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빙긋 웃었다.
“승진 축하해. 유기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