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억울(抑鬱)하다.
이 말은 불공평한 일을 당해서 속상하고 분하다는 말이다.
어떤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저지른 것으로 오해를 받아서 화가 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서두를 ‘억울하다’고 장식한 호소장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감옥에서부터 날아온 호소장 말이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억울한 처분을 받는 사람은 분명히 있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억울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을 것이고.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늘어나고 있는 까닭 중 가장 큰 이유가, 이 호소장을 쓴 범인 같은 놈들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억울할 것도 없는데 억울하다고 하는, 그런 놈들 말이다.
때문에 이 호소장을 읽고 있는 내 감정을 한마디로 하자면.
“어이가 없네.”
호소장을 가지고 온 초아의 표정도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살다 살다 이런 걸 다 보네요. 옥살이를 하더니 결국 미친 걸까요?”
“제 심정은 어떻겠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이딴 걸 보내다니.”
“그러니까 서범준이 감옥에서 직접 쓴 호소장을 초아 씨 이름으로 GBC방송국에 보냈다는 거죠?”
“네. 처음에는 사칭범일줄 알았는데 글씨체랑 지장 보니까 서범준 맞아요.”
호소장 안에는 그동안 재만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고발이 담겨 있었다.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돈을 비자금으로 숨기고, 임원들의 계좌로 보관한 것까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옆에서 직접 본 범준의 증언이라면 재만을 보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동안 내가 노력해 온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른 누구도 아닌, 범준한테 도움을 받을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뭐. 서범준한테 도움받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더럽긴 한데요. 그래도 써먹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저희가 지금 뽑고 있는 자료들은 추가재판을 통해 형량 늘리는 데 쓰면 될 것 같아요.”
“이걸로….”
“네. 초아 씨.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지금까지의 자료들과 압수수색으로 나온 증거들, 여기에 범준의 증언까지 첨부된다면 재만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바로 속보로 터뜨려 주세요.”
“그런 다음… 아시죠?”
초아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네. 같이 와인 한잔하시죠.”
“한 잔으로는 안 돼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제대로 준비하셔야 될 거예요. 제가 술이 꽤 세거든요.”
“궤짝으로 준비해두겠습니다.”
초아가 이를 드러내며 일어섰고, 나도 같이 일어섰다.
“어, 강빈 씨도 어디 가시게요?”
“네. 서범준을 만나 보려고 합니다.”
초아의 눈썹이 둥글게 휘었다.
“서범준을요?”
“무슨 생각인지 물어는 봐야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사전에 예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울교도소에서 직접 현장 접수를 통해 접견을 신청했다.
윗선과 말해서 이런 절차 없이도 만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시간도 넉넉했고, 서범준과 만나는 것만으로 책잡힐 수도 있기 때문에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1시간이 조금 넘게 기다렸을까.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죄수복을 입고 범준이 앉아 있었다.
“접견 받아들인 거 보니까 너도 할 말이 있나 보네.”
범준이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에 일부러 자극시키는 말이었다.
평소같으면 달려들었을 범준은 그저 묵묵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답지 않게.”
“너도 내가 보낸 편지 봤구나. 지금쯤이면 초아씨한테 도착하긴 했겠다.”
“무슨 생각으로 보낸 거냐? 안 그래도 네 아버지가 불리한데 그 증언이면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철창신세야.”
“알고 있어.”
“그럼 대체 왜…”
“아버지가 자기가 지은 죄를 전부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더라.”
며칠 전 재만이 검찰청에 자진 출석하며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범준도 그걸 알고 앙심을 품은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따르던 제 아버지를?
“이유가 그게 끝이냐?”
“그게…? 지금도 8년을 이딴 곳에서 지내야 되는데, 아버지 죄까지 다 받으면 나보고 평생 여기서 썩으라는 거 아니야. 그렇게는 못 살아.”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괜한 생각이었다.
역시나 서범준은 한심한 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그게 서범준이지.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접견을 받아들인 거냐?”
“서강빈, 강빈아.”
범준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내 이름을 부르자 등줄기에 소름이 주욱 그어졌다.
“나… 여기서 꺼내주면 안 되겠냐?”
“그걸 내가 왜 들어줘야 하지?”
“내가 갖고 있는 지분, 너한테 다 넘길게. 나 평생 놀고먹을 돈만 남기고. 어때, 너 사업가잖아. 이 정도면 이득밖에 안 남는 장사 아니냐? 너 윗선이랑 줄도 탄탄하다며. 그냥 말 한마디면 될 거 아니야.”
재만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는 심산일까.
이런 전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당연하게도 서범준을 용서한다는 선택지는 빼고서 어떻게 해야 더 참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까에 관한 고민이었다.
“음. 네가 갖고 있는 지분. 내가 가져봤자 추징금이랑 세금 때문에 골치 아플 텐데. 그 폭탄을 나한테 떠맡기려는 건 아니고?”
“그, 그래도 남는 게 더 크잖아. 나만 여기서 빼내주면 그냥 주겠다니까…? 하하….”
“비자금도 다 뺏겼겠다, 네가 추징금 내려면 어차피 지분 팔아야 될 텐데 그때 사면 돼. 어차피 나야 돈이 썩어 넘치는데, 거지새끼도 아니고 너한테 받을 필요가 있겠냐?”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돈과, 이번에 밝혀진 범준의 차명계좌에 대한 탈세와 벌금, 추징금 등 내야 할 돈만 최소 수천억 원이었다.
범준은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기 때문에 지분을 팔아야 할 테고.
시장에 풀린 걸 다시 사 오려면 차익에 따라 손해가 있겠지만, 그 정도야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았다.
범준이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건지, 아니면 최후의 보루로 나한테 부탁한 것인지는 몰라도 받아들일 생각도, 필요도 없었다.
범준이 유리창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냐.”
생각해 보면 범준이 ‘서강빈’한테 잘못한 게 있었던가.
기껏해야 면박을 주려다가 되레 자기가 당한 거? 욕 몇 마디를 뱉었다가 쪽을 당한 거?
의도까지 따지면 모르겠으나, 결과만 본다면 나한테 피해를 준 게 없긴 했다.
그러나 범준은 나에게 있어 전생이든, 지금이든 똑같은 쓰레기일 뿐이다.
사람 죽이려는 본성도 어디 가지 않았고.
“그냥 너 같은 새끼는 나오면 사회악일 뿐이야. 평생 거기서 썩다가 죽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강빈아…. 나 여기서 반성 정말 많이 했어. 일기도 쓴 거 있는데 보여줄까? 나가면 새사람 돼서 살게. 그래도 우리 같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손자 아니겠냐….”
“그게 내 유일한 오점이지.”
“...나 추가 혐의로 기소됐어. 아버지 차명계좌 드러나면서 내 것까지 싹 다 드러났다고. 기재부 장관님이랑 너랑 가깝다며, 한마디만 해주면 안 되겠냐…?”
그렇구나.
그제야 범준이 자존심을 버리고 나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한 이유를 깨달았다.
추가 혐의까지 집행된다면 최소 5년 이상은 실형을 더 살게 되기 때문에 평소에 그토록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나한테까지 손을 내민 것이다.
현재 범준의 나이가 40대 중반쯤이니까, 형이 더 늘어나게 된다면 환갑은 넘겨야 감옥에서 나올 것이다.
평생을 재벌로 살아온 범준이 모든 것을 다 잃고 환갑의 나이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 정도면… 됐다. 범준아. 그동안 고생했어.”
전생에서 네놈이 한 짓 때문에 복수의 대상이 되어주느라 고생 많았다.
앞으로 평생 감옥에서 나오는 일 없길 바란다.
“강빈아…!”
범준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한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해 줄 필요 없었다.
미약하나마 희망을 갖고 있어야 절망감이 더 클 테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빈아. 편지할게. 내 일은 천천히 처리해줘도 돼… 아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나야 좋긴 한데…. 아무튼 진짜 고맙다.”
주절거리는 범준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초아의 활약으로 범준의 증언이 빠르게 전파를 타고 퍼졌다.
태선전자는 부모들이 미성년 자녀에게 주식 공부를 하라며 선물로 줄 정도로 국민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에서 주가조작과 더불어 횡령, 비자금 관련 기사들까지 터졌으니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태선전자와 재만은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이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대통령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로 목을 숙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솔직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태선전자 관련 사태는 정부와 일체 관여되지 않았습니다! 재벌 기업 총수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저의 무지로! 인하여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것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범준의 증언까지 더해지며 재만의 혐의는 확실시되었다.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는지, 도망갈 염려는 없다는 판단하에 구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재판 일자가 다음 주로 잡힌 상황이었다.
TV속에서 대통령 연설이 이어졌다.
-하도급 갑질, 불공정거래 및 차명거래! 재벌기업들의 불법행위들을 싹 다 뿌리째 뽑겠습니다!-
열화와 같은 박수 소리.
-이번 사태는 차명거래 및 비자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줬습니다!-
그리고 법 개정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요약하자면 개정된 금융실명제법이었다.
차명계좌의 금융자산을 명의자의 소유로 추정한다는 규정이었는데, 이 규정에 따르면 자금의 실소유자가 차명금융계좌의 자금을 본인 소유로 주장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현재 재만이 태선전자의 임직원의 명의로 갖고 있는 차명계좌들이, 태선전자의 임직원의 소유로 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은행에서는 불법 차명금융거래의 금지 및 실소유자의 고객확인 의무를 지게 되었다.
법안 개정까지 진행하려면 꽤 긴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2014년에 개정되었던 건데….”
나로 인해 다시 한번 미래가 앞당겨졌다.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나야 걸릴 것이 없으니 나쁠 건 없었다.
앞으로 개정 금융실명제법은 ‘서재만법’이라 불릴 것이다.
대통령까지 저렇게 나섰다면, 모든 화살의 시위는 재만을 향할 것이다.
끝났다.
다 끝…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초아가 한 손에 비닐 봉투를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저는 약속 지켰어요. 이제 강빈 씨 차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