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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44화 (244/249)

#244화

범준은 변호사가 건넨 휴대폰 속 동영상을 보고 피식 웃었다.

-범준이는 저를 지지하고 저를 위해서 열심히…-

드디어 재만이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자신을 위해 검찰청까지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가 웬일이래? 전에 내가 고소한다고 해서 이러나?”

“...끝까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변호사의 딱딱한 말투에서 싸함을 느낀 범준이 동영상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동영상은 이제 소환 조사를 받고 나온 재만의 모습을 비췄다.

-...직원이었습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말을 통감합니다.-

“이거 뭔데?”

“서재만 부회장님이 결단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이게 뭐냐고!”

범준은 휴대폰을 움켜쥔 채 몸을 떨었다.

최근 재만의 차명계좌가 들통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차명계좌 안에 들어있는 돈은 대부분 횡령하거나 비자금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범준도 재만에게 교육받고 똑같이 했으니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걸 자신에게 전부 뒤집어씌운다?

“유 변호사. 똑바로 말해야 될 거야. 아버지가 나 버리기로 결정한 거야? 너한테는 입막음하라고 여기로 보낸 거고?”

“저는 사장님 사람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범준은 눈을 부라리며 변호사를 흘기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지 말해봐.”

“...사장님이 감형이나 특별 사면을 받으려면 우선 서재만 부회장님이 정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됩니다. 만약 이번 일이 서재만 부회장님이 책임진다면…”

“유 변호사!”

범준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나는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어. 아버지 죄를 나보고 덮어쓰라고? 너 같은 새끼가 변호사야?”

변호사는 시선을 내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옳은 길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서재만 부회장님까지 사장님처럼 감옥에 가게 되신다면 정말 방법이 없어지는 겁니다.”

“다른 방법을 말해보라고. 너도 죽여버리기 전에.”

범준이 변호사의 멱살을 쥐었다.

변호사가 입고 있던 셔츠에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던 카라가 와락 구겨졌다.

“저, 저한테 이러셔도 방법이… 윽.”

범준은 멱살을 쥔 손을 놓자 변호사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는 연락 온 거 없어?”

“네, 네! 연락했습니다. 곧 오실 거라고 합니다.”

“다른 말은 없고?”

“....”

“한심한 새끼. 돈을 그렇게 받아 처먹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죄송합니다.”

변호사가 허리를 꾸벅 숙이는데 접견실의 문이 열렸다.

자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교도관이었다.

“이구팔구! 나와! 급한 면회시란다.”

“면회요…? 누구?”

“낸들 아냐. 아오, 냄새 뭐야. 너 여기서 또 담배 피웠어?”

“아, 아닙니다.”

“아니긴. 쯧. 조심해. 너 내가 지켜보고 있어. 네가 밖에서 재벌이지, 여기서 재벌이냐? 너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은 범죄자 새끼야.”

남자가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킨 뒤 범준을 가리켰다.

돈으로 포섭하려다가 실패한 유일한 교도관이었는데,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범준에게 앙심을 산 인물이었다.

‘나가면 너부터 조진다. 감히 교도관 주제에.’

속마음과 다르게 범준은 머쓱한 웃음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교도관이 나가자마자 웃음을 거두며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게 무슨 소리야? 오늘 면회 약속 없는데. 설마.”

“부, 부회장님일 수도 있습니다.”

범준이 굳은 표정으로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범준의 예상대로 면회를 온 사람은 재만이었다.

범준이 먼저 입을 뗐다.

“왜 이제야 찾아오셨습니까….”

재만의 얼굴을 보면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울 생각이냐고 따질 생각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왜 이제야 찾아왔냐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말이었다.

재만은 심드렁하게 범준을 바라봤다.

“그동안 네 문제 관련해서 처리할 게 많았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

“그게 두 달간 교도소 수감되어 있던 아들한테 할 말입니까? 잠깐 들릴 시간 없었다는 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대신 여편네 보내지 않았냐.”

“어머니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재만의 아내이자 범준의 어머니인 강숙은 대외적으로는 현모양처였고, 안에서는 존재감 없이 죽은 듯이 지내는 여자였다.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상당히 많아서, 정재계 인사들의 아내들과 모임을 자주 가졌다.

모임의 이름은 ‘푸른어머니연대’였는데, 강숙이 회장 노릇을 하며 온갖 갑질을 해댔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멀리하고, 저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만 모임에 끌어들였다.

그런 강숙이 재만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범준은 강숙이 찾아올 때마다 오히려 열패감에 빠져 기분을 잡칠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없는 것보단 낫겠지.”

“아버지 도움이 필요해요. 대체 왜 저를 도와주시지 않는 겁니까, 저를 내치시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럼 아비를 고소하겠다는 아들을 계속 챙겨야 하냐?”

재만이 그동안 피해왔던 범준의 면회를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가, 범준의 전속 변호사를 통해 면회를 오지 않으면 자신을 고소하겠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제가 설마 고소를 하겠습니까. 아들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게 많이 섭해서 한 소리였습니다.”

“질 게 뻔해서 하지 않은 건 아니고?”

“아버지!”

“너도 이제 알고 있지 않냐. 어제 검찰청 가서 밤샘 조사받고 왔다. 범준아.”

재만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며 유리창을 어루만졌다.

“설마 내가 너를 저버린다고 생각하는 게냐.”

“인터뷰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 소유의 차명계좌들, 다 제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형량만 8년인데 차명계좌랑 얽힌 비자금이랑 횡령 다 들키면 저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됩니다.”

“범준아. 이 어린 내 아들 녀석아.”

재만의 목소리는 타이르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범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늘 그랬듯 말이다.

“만약 내 잘못이라고 치자. 이 아비가 네 감방 동료가 된다고 가정을 해보자꾸나. 그럼 누가 너를 꺼내줄 수 있겠냐. 특사건, 감형이건 간에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을 너한테 떠맡기는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아.”

“저보고 입 닥치고 형량 늘어나는 꼴을 구경하라는 겁니까?”

“뭐라고...?”

“왜 저입니까. 하송혁 부사장이나 지완수 전무, 하다못해 윤희완 상무라도 대체자는 많지 않습니까. 왜 하필 저에게 덤터기를 뒤집어씌우냐구요.”

범준은 지금 재만의 행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

재만이 끙, 하는 침음하는 소리를 내고 말했다.

“지금 얽혀 있는 자금이 수천억, 아니 조단위야. 그걸 고작 이사 나부랭이가 뒤집어쓸 수 있다고 생각하냐?”

범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붙여서 말했다.

“그럼 아들한테 뒤집어씌우는 건 말이 되고요?”

“그러니까 너보고 어리다고 하는 거다. 멀리서 볼 줄을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감옥에 가면 그다음은? 서강빈, 그 자식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지금도 숨기고 있는 계좌들이 발각되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죄는 더 커질 거다.”

“제가 아버지 죄를 가져간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아버지 말대로 서강빈이 지금도 계속 증거자료 찾고 있다는데.”

“지금 상황을 모면하는 게 가장 중요해. 일단 숨 좀 돌리면 네 혐의도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금방 꺼내줄 수 있을 거다. 너는 그냥 닥치고만 있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일단은…”

범준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재만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재만은 쉬지도 않고 감언이설을 쏟아내고 있었고, 혹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

“그래. 범준아.”

“결심했습니다.”

재만이 벌떡 일어나며 입가에 미소를 슬쩍 띠었다.

“잘했…”

“저는 절대 아버지 죄를 뒤집어쓰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한 행동을 스스로 돌아보세요. 제 인생이 지금, 누구 때문에 망가졌는지.”

“...범준아.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그냥 아버지 뜻대로 따라주면 안 되겠냐. 이번 한 번만 참으면 태선은 네 것이 되는 거 잘 알지 않냐.”

“수십년간 옥살이를 한 쓰레기 같은 자식을 누가 회장 자리에 앉히겠습니까. 여론이, 정부가 그걸 허락하겠어요? 제가 볼 때 아버지도 제대로 살긴 글러 먹었습니다. 서강준… 그 새끼 보니까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요. 제 다음 타깃은 아버지가 될 겁니다. 미리…”

“서범준!”

재만이 유리벽을 내려치자 구석에 앉아 있던 교도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회장님!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이 자리도 어렵게 마련한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너는 닥치고 있어!”

“회장님…!”

오늘 이 자리는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됐다.

면허 절차를 밟지도 않고 교정본부장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재만도 조심해야 된다는 걸 알았지만, 자식새끼가 말을 들어 먹지 않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

재만이 실소하며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 멋대로 해 보거라.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이제 들어주지 않을 게다. 네가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이 침묵하는 꼴을 보게 될 거야.”

“하.”

범준은 기가 차다는 듯 입을 벌린 채 재만을 노려보았다.

“결국 아버지가 살기 위해서 저를 버리겠다는 말 아닙니까? 뭘 그리 거창하게 포장하세요?”

“네가 뭐라 생각해도 상관없어. 나는 이 자리를 지키고 너를 감옥에서 빼낼 게야. 너도 나중에 내 뜻을 알게 될 때가 올 게다.”

“아버지. 지금 할아버지 따라 하고 있는 거 아십니까? 그런데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투도, 행동도 할아버지여서, 그런 시대여서 가능한 거지. 아버지가 백날 천날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범준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때는 아버지를 동경했어요. 아버지의 뒤를 반드시 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재만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범준을 응시했다.

“조카 한 명 이기지 못하고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는 한심한 사람이었네요. 제 도움을 바랄 생각은 하지도 마십쇼. 저도 제 살길 알아서 마련하겠습니다.”

범준이 나간 면회실에서 외마디 고함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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