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저번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 이후 재만이 또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앞으로 검찰 조사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실망하셨을 국민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재만은 한참을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검찰의 소환을 기다렸습니다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로 인해 일어난 모든 부정부패를 바로 잡고자 합니다.-
정신이 나갔나,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제 와서 자백할 것도 아니고 저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이어진 말은 대미를 장식했다고 할 수 있겠다.
-범준이는 저를 지지하고 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왔던 제 하나뿐인 자식이자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라는 말을 통감합니다. 견딜 수가 없어…-
마지막에 말끝을 흐리는 것까지 완벽한 연기였다.
그 뒤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 말씀은 부회장님께선 차명계좌와 관련해 비자금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까?-
-확실하게 표명해주십시오! 비리 합병을 주도한 것도 모두 서범준 전 사장이 벌인 일이 맞습니까?-
-차명계좌 대다수가 서재만 부회장님 것 아닙니까! 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거 아닙니까!”
질문들에 대한 재만의 대답은 간단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만은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서부지방검찰청으로 들어갔다.
“쇼를 하네.”
이후로 벌어질 일은 뻔했다.
아마 밤샘 조사를 받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와서 동정여론을 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짐은 범준이 짊어지게 되겠지.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다.
“서재만이 서범준에게 모든 죄를 돌리면 무혐의 처분을 받을 수도 있을까?”
뒤에 서서 같이 뉴스를 보고 있었던 기현이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이채규 부회장님 말에 따르면 청와대 측에서도 정부 개혁의 희생양으로 서재만 부회장을 골랐다고 하고요.”
하긴, 정부 입장에서도 재만을 통해 대기업들을 압박하고, 국민 정서를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정부 쪽은 해결됐고.
“그럼 왜 서범준 탓으로 돌리려는 거야? 검찰 소환 조사도 서재만이 자진해서 진행된 거라며.”
“검찰총장과 서재만은 오랜 세월 접촉해 왔습니다. 압수수색까지는 청와대 명령으로 진행했더라도, 검찰 소환 조사에서 도울 생각인가 봅니다. 거기서 혐의를 덜고 자백과 누명을 씌워서 집행유예나 징역을 줄이려는 계획인 것 같습니다.”
“흠… 아비가 살기 위해 자식을 죽이겠다니.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있나.”
“서재만 부회장이 차명을 쓴 태선전자의 임직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워낙 철저해서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결국 진술과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기소 가능한 정도만 모이면 바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우리나라 재판에는 ‘병합심리’라는 것이 있다.
별개의 두 사건을 합쳐서 하나의 재판으로 심리한다는 거다.
범준의 경우 횡령죄와 배임죄, 업무상배임죄 등 10건이 넘는 기소 사실에 대해서 한 번에 처리했다.
재만한테는 천천히, 하나하나 진행할 생각이었다.
압수수색과 정보공개만으로, 재만은 벌써 범준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판이 끝날 것 같으면 추가 기소를 진행하고, 이 짓을 반복한다면?
재만은 정신이 바스러질 것만 같을 것이다.
범준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범준의 형량은 계속 늘어날 것이고, 한계가 온다면 재만도 철창행을 면하지 못하겠지.
***
식물원을 연상시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은 비닐로 덮여 있었는데, 햇빛이 투과해 밖이 제법 쌀쌀했음에도 따뜻했다.
치자나무에 꽃이 잔뜩 피었는지 짙고 달콤한 향기가 건물 안을 메웠다.
돌길을 걷자 안쪽에 앉아 있는 남순이 보였다.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갑작스럽게 불러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찻잔의 밑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음미하며 차를 즐기고 있었다.
“이게 얼마 만이죠.”
“강빈아!”
남순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은 처음 와 보네요.”
“마음에 들어?”
남순이 주전자를 기울여 내 앞에 잔에 차를 가득 채웠다.
“네. 향이 되게 좋아요.”
진탱의 서재에 있던 온실에는 향이 약한 나무들만 심어져 있어서 이곳과는 상반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향이 풍부한 이런 곳이 취향이었다.
“고모.”
“응?”
남순의 성정은 몹시 어질고 온순해서 재만과 범준으로 인해 심란하진 않을까 걱정되던 참이었다.
진태가 숨을 다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옆에서 봤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걱정과는 달리 남순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몹시 평온했다.
“아니에요.”
“후후. 너 범준이랑 재만 오빠 때문에 그런 거지?”
“....”
“네가 그런 거니?”
나와 같이 남순의 조카, 범준을 감옥으로 보냈다.
지금은 그녀의 오빠인 재만도 보내려고 하고 있다.
한국에서 재만과 범준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 더 있을까.
거짓말하는 것에 자신도 없었고, 그녀를 속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네.”
남순은 미소를 지었는데,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이 묘했다.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지?”
“네. 백부님에 대한 기소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한 달 안에 기소가 시작될 거고, 감옥에 들어가도 끝나지 않을 겁니다.”
남순이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그녀가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가, 삼킨 뒤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오빠가 전생에 죽을죄라도 지었어?”
죽을 죄를 짓긴 했다.
재만은 아니지만, 그의 아들이 나를 죽였으니까.
하지만 전생이 아니라 지금만 보더라도 범준과 재만이 감옥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회장 승계를 하려고, 권력을 쥐려고. 범준이 형은 사람을 죽이려 했습니다. 증거도 없고 혐의에 그쳤지만 저는 확신해요.”
“...증권사 대표 말하는 거니?”
“네. 제가 확신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도 제가 알고 있는 건이 하나 더 있거든요. 제가 아는 것만 벌써 두 건인데,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살인 교사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
“제가 막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남순은 축 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부님이라고 다를 것 없습니다. 회삿돈을 횡령하고 직원들을 무단으로 자르고, 차명계좌를 만들 것을 강요했어요. 가족과 같은 회사 임직원들의 자리를 놓고 협박한 겁니다. 저는 막아야 했어요.”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진태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태선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니까.
남순이 말을 이었다.
“재만오빠가 아니어도 태선의 회장으로서 올바른 길을 걷기란 쉽지 않을 거야. 너는 그러지 않을 자신 있니?”
“고모. 제가 가는 길이 올바르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고요. 그래도 저는. 할아버지와는, 백부님과는 다른 태선을 만들 겁니다. 이건 확실해요.”
내게는 후대에 대한 계획도, 권력을 위한 욕심도 없었다.
그저 태선을 갖고 싶었을 뿐.
그리고 내가 갖게 될 태선이 더럽혀지는 것은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
“나는, 너를 믿고 싶어.”
“그 말씀은.”
“응. 맞아. 내가 갖고 있는 태선전자, 태선물산… 그 외 모든 태선그룹과 관련된 주를 전부 줄게. 대신.”
“유통 관련 지분을 전부 고모님께 달라는 거죠?”
태선유통의 지주회사는 태선백화점으로, 계열사는 존마트, 태선면세점, 태선홈쇼핑, 그리고 실질적으로 내 소유나 마찬가지인 태선택배가 있었다.
남순이 유통을 제외하고 갖고 있는 지분은 태선그룹 총 지분의 약 1.2프로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만약 유통관련 지분을 전부 남순에게 준다면 차익을 계산했을 때 최소 1조 원 이상의 손해를 보게 된다.
남순에게 그동안 진 빚을 생각해서,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남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태선백화점과 존마트 지분만 나한테 넘겨. 나머지는 네가 갖더라도 상관없어.”
“그럼 고모 손해가 막심하실 텐데요.”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고 했던 건 사실 태선택배가 컸다.
남순에게 경영을 일임하긴 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지분만 90프로 가까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곧 다가올 내년에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모바일시장이 확대된다면, 태선택배가 다시 한번 성장할 가능성은 더 무궁무진했다.
“고모가 손해 보는 거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는 이게 거래처럼 보이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남순이 특유의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차를 호로록 마셨다.
“설마… 태선그룹에서 나가려는 겁니까?”
“응. 태선백화점과 존마트를 태선에서 분리하려고 해. 태선백화점은 사명을 MH백화점으로 바꿀 거고.”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태선백화점이 태선그룹에서 분리되며 바뀌었던 사명도 MH백화점으로, 남순의 말과 일치했다.
그 당시 남순이 기자회견을 열어서, 태선과 분리한 이유로 밝힌 이유가 뭐였더라.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경쟁을 정말 즐겨. 10년도 더 전에 업계 1위였던 샹스백화점을 꺾었을 때 기분은 정말 짜릿했지. 우리 백화점이 해외 지점을 내면서 글로벌시장에서 경쟁하는 것도 재밌고. 그런데. 집안싸움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 이름을 바꾸는 것도 같은 이유야. 태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나도 욕심이 날 것 같거든.”
생각났다.
남순은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말이.
-획일화된 한국 백화점에서 벗어나 저만의, MH백화점만의 차별화로 글로벌 시장에 나아가겠습니다.-
“아직 세상 끝난 게 아니잖아? 유통은 무궁무진한 세계고. 늦기 전에 빨리 내 독자적인 사업체를 꾸려서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어.”
전생에도, 지금도 남순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그녀의 꿈을 응원해주고 싶었다.
“말씀하신 대로, 존마트와 태선백화점에 있는 제 지분을 모두 양도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나머지 지분들을 전부 너한테 줄게.”
“대신, 계산은 철저하게 할 겁니다. 차익금은 한 푼도 빠지지 않고 고모한테 돌아갈 거예요.”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태선그룹의 지분을 받아오는 일이다.
억만금을 줘도 모자랄 판에 제 돈 주고 사 온다면 그것보다 좋을 수 없었다.
태선백화점과 존마트는 내가 그리는 태선그룹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업들이었고.
남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태선그룹을 잘 부탁해. 서강빈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