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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42화 (242/249)

#242화

초아의 지휘에 따라 보도국들이 일제히 재만의 차명계좌에 대한 속보를 터뜨렸다.

재만은 이에 즉시 부정하는 성명을 내놓았으나, 반나절도 되지 않아 추가 차명계좌와 함께 합병에 얽힌 비리들까지 보도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든 방송국에서 앞장서서 재만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초아의 지휘로 최초 보도에 나선 것은 5개 정도의 보도국이었지만, 냄새를 맡은 보도국들까지 이에 동참한 것이다.

거대자본과 투자자들을 통해 태선AA의 주가를 뻥튀기하고, 신제품 개발을 미발표하는 등 태선전자의 주가 하락을 유발한 것까지 모든 정황들이 밝혀졌다.

그와 동시에 압수수색도 이루어졌다.

현재 기획재정부의 차현섭 장관을 통해 갑작스러운 강제수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법무부와 청와대에서 빠르게 승인받은 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다.

수화기 너머 현섭에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이 말만큼은 직접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 연락했습니다.”

“감사는요. 비리 기업인 잡아 처넣는 건데 감사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흐흐. 오히려 제보에 제가 감사드려야죠.”

“...일이 끝나면 식사라도 한 끼 하시죠. 제가 좋은 곳에서 대접하겠습니다.”

“이거,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하하. 좋은 곳 가는 건 콜이고 계산은 각자 하자구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죠.”

현섭을 통해서 압수수색까지 진행하며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재만의 만행들이 모두 밝혀졌다.

주가조작, 자본시장법에 위반되는 차명계좌, 횡령까지.

빠른 시일에 밝혀낼 수 있었던 이유는 기현이 그동안 조사해온 모든 정보를 검찰에 넘겼기 때문이다.

범준의 징역행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태선전자의 주가가 주저앉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재만법을 제정하라는 제정 촉구 시위가 연일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늘.

재만은 태선전자 본사 건물 내부광장에서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나는 GB타워에서 임원 회의를 끝내고, 뉴스를 통해 1시간 전 열렸던 기자회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만은 검은색 양복과 넥타이를 단정히 맨 채 굳은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갔다.

그가 기자들을 바라보며 꺼낸 첫마디는.

-자식을… 잘못 두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와우.”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빠져나갈 길은 도저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들을 버리고 자신이 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범준 성격에 가만있을 리가 없을 텐데, 부자(父子)간의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것인가.

앵커의 설명이 이어졌다.

-서재만 부회장이 단상 위에 올라 처음 뱉었던 말은 아들이자 현재 감옥에 수감 중이었던 서범준 씨에 대한 언급이었습니다. 이후 서재만 부회장은 카메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사과했습니다.-

“저 양반이 허리를 굽히는 날이 오긴 오는구나.”

이어지는 재만이 읽어내리는 회견문은 들으면 들을수록 꼴불견이었다.

-한편 검찰은 금일 추가 계좌 28개가 수감 중인 서범준 씨의 차명계좌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서재만 부회장에 따르면 본인의 차명계좌라고 밝혀진 851개의 차명계좌 중 600개 이상이 서범준 씨의 계좌라고…-

상상도 못 했다.

설마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의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할 줄은.

그리고 이어서 꽁트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YTT출신 기자의 기습질문 때문이었는데,

-자녀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라는 재만의 말에

-어차피 경영권을 쥔 건 서강빈 부회장 아닙니까? 공식 소유 지분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요.-

라고 기사가 질문하자, 재만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 것이다.

기자가 굳이 ‘공식 소유 지분’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이번에 차명계좌와 같은 이름의 태선그룹 주식들이 밝혀지면서 재만의 실질적인 지분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재만 소유의 태선전자 지분이 38프로, 범준이 2프로였고 차명으로 밝혀진 지분이 4프로였다.

태선전자의 지분 4프로는 현재 주가로만 따져서 약 5조 원이었다.

이번에 태선 AA와의 합병이 진행되었다면 지분의 약 5프로 정도의 이득을 봤을 거고, 재만은 태선전자의 경영권을 완전히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가 되었고, 추징세액을 맞으면 지분의 상당수를 팔아야만 할 것이다.

기자의 질문에 재만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뉴스 앵커가 현장에 파견을 나갔던 기자에게 물었다.

-서재만 부회장이 공개 회견을 통해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기자들의 질문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까?-

-네. 서재만 부회장은 준비된 입장문을 발표하고, 고개 숙여 사과한 뒤 태선전자 사옥에서 떠났습니다. 대신 태선전자 지완수 대변인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에 답해봐야 밑천만 드러날 텐데 답할 수가 없었겠지.

그보다 이번 압수수색을 통해 나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계좌들도 상당수 밝혀졌다.

태선전자의 전직, 현직 임원 512명의 명의로 된 주식만 4조 원에 가까웠고, 벤타은행에 있던 예금만 5700억 원 규모였다.

태선전자의 직원들의 경우는 조사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략적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모든 차명인을 합치면 천 명에 가까운 수치였는데, 이 모든 차명인의 계좌에서 과징금을 징수한다면 과연 태선전자의 지분, 몇 퍼센트를 팔아야 할까.

전생에서도 재만은 차명계좌를 사용하긴 했다.

하지만 때늦은 조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나 제재는 없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수조 원 규모에 때린 과징금이 고작 12억 원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차명계좌들도 다 찾아내지 못했고.

그러나 지금은 재만이 차명계좌에서 돈을 빼자마자 곧장 터트렸으니 빼도 박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태선AA와 태선전자의 주가조작과 불법적인 루트로 축적한 비자금이 걸린다면 재만 또한 범준처럼 실형을 피하진 못할 것이다.

지금이야 범준을 팔아서 위기를 모면하겠지만, 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범준과 같은 길을 걷게 만들 것이다.

***

재만은 수화기를 붙들고 애원하듯 말했다.

“총장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겁니까?”

“어허, 부회장님. 지은 죄가 있으면 저희는 집행할 뿐, 재단하진 않습니다.”

수원고등검찰청의 차장검사 시절부터 알아 왔던 현 검찰총장은 단호했다.

불과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재만과의 저녁 식사를 마다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고도 없이 태선전자로 압수수색이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강제수사가 펼쳐질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 잘못되면 총장님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총장이 일갈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저를 적으로 돌려봤자 부회장님 입장에서 좋을 거 없습니다.”

“이미 적이지 않습니까.”

“후…. 부회장님이 저한테 섭섭한 일을 하신 적이 없는데 무슨 억하심정이 있겠습니까?”

“그럼 뭡니까? 설마 검찰총장한테 지시할 수 있는 위선이라도 있다는 겁니까?”

“....”

“이런…!”

재만은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시내린 사람이 기재부 차현섭 장관. 맞습니까…?”

“...하. 부회장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검찰총장의 대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대한민국의 이인자가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회장님. 차라리 검찰에 자진 출석을 해서 조사받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럼 제가 편의를 봐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일단 끊겠습니다.”

재만은 전화를 끊은 뒤 비통함에 잠겨 이마를 짚었다.

그때 수화기가 다시 울렸다.

“후….”

받지 않아도 뻔했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중견기업의 대표들이, 일이 터지자 재만의 눈에 들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취해왔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연락을 받아왔지만, 현섭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들의 도움은 의미가 없었다.

똑똑.

노크소 리가 재만의 상념을 깼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

“저 유태호입니다.”

유태호라면 재만의 전담 변호사.

그동안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꾸준히 자문을 받고 있었다.

“들어와.”

끼이익, 문이 열리며 태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부회장님.”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 오늘은 일없다고 들었네만.”

“아드님이 유 변호사에게 부회장님을 고소하겠다고 합니다.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 변호사라면 태호의 소개로 자신이 범준에게 붙인 변호사였다.

범준은 자신이 고용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방법이 있겠나?’

“일단 검찰에 자진 출석해서 조사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중에게 부회장님의 이미지가 워낙 강건하시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여론을 되돌릴 수 있을 겁니다.”

변호사의 말을 들은 재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태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던 검찰소환조사를 자신보고 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검찰총장도 자진 출석을 한다면 편의를 봐준다 했겠다,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알겠네. 출석은 언제 하는 것이 좋겠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오늘이라도 진행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래도 뭐가 나오기라도 하면?”

“뭐가 나오긴 해야 됩니다. 다만 그 규모를 조금 줄이고 화살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자는 거지요.”

변호사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른 쪽이라고 한다면 한 명밖에 없었다.

재만의 하나뿐인 자식, 범준.

수십억 원 규모도 아니고 수조 원대의 차명계좌 및 비자금을 뒤집어씌울 사람은 범준밖에 없었다.

일개 임직원이 그만한 규모의 비리를 저지르는 동안 태선전자의 총수인 재만이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게다가 실제로 범준의 차명계좌도 100여 개가 끼어 있으니, 적임자로서 범준이 딱이었다.

“그러니까 내 책임을 피하려면 아들놈을 팔아야 된다는 말 아닌가.”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유일한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해야지, 안 그런가?”

“....”

“방법이 하나뿐이라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자네는 조선시대였으면 충언하다 목이 달아날 인물이었겠어.”

검찰과 청와대 측에 더 이상 금품청탁은 먹히지 않았고, 뇌물을 줄 만한 모든 곳에 시도해봤지만, 가로막혔다.

이제는 정말 수가 없었다.

범준을 팔아서라도 살아남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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