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서재만 부회장이 오늘 차명계좌를 움직였습니다. 현재 차명계좌 9개에서 출금된 금액만 약 4600억 원입니다. 아직 남아있는 차명계좌와 속도를 볼 때 오늘 안에 끝내려는 것 같습니다.”
서재만이 주식매수청구권에 따라 지급해야 될 금액은 약 8천억 원이었다.
기현의 조사에 따르면 공식재산까지 모두 털어도 부족한 금액은 6천억 원이 조금 안 됐다.
그런데 하루만에 4천억 원이 넘는 돈을 뽑다니, 아마 오늘 내로 모든 자금을 뺄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계좌 목록 전부 확인해서 대조하고, 서재만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황들 갖고 와.”
“알겠습니다.”
기현은 묵례를 하고는 왔을 때처럼 빠른 발걸음으로 대표실을 나갔다.
기현이 나갈 때까지 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초아 씨.”
내가 수집한 증거들을 공론화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말씀하세요.”
방금 전까지 신나게 드라마에 대해 얘기하던 사람이라고는 상상 못 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강빈 씨 아니었으면, 저 지금도 감옥에 들어가 있는 서범준과 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사는 건가요?”
초아는 내 덕이라며 말했지만, 그것 역시 온전히 선의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초아가 GBC방송국의 국장이 되고, 언론을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에 했던 것이다.
죄책감에 속이 잠깐 울렁거렸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서재만 부회장 관련 기사 터트려달라는 거잖아요. 관련 자료 국장실로 팩스로 보내세요. 번호는 아시죠?”
“초아씨….”
“아까 와인의 왕? 그거 먼저 마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네.”
초아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도국들 소집하고 시나리오 짜려면 한시가 급해요. 먼저 가볼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일 끝나고 하시죠.”
초아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나는 초아가 사라진 엘리베이터 문을 한참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준을 보냈다고 들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집안을 끝장내려면 서재만, 그놈까지 보내야만 한다.
***
범준은 감옥 안에서 양반다리를 한 채 신음을 흘렸다.
“으….”
감옥에 수감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고관절과 무릎이 비명을 질렀다.
교도소 안에서는 일과시간을 정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데, 평생 재벌로 살아온 범준이 양반다리에 익숙할 턱이 없었다.
무릎을 계속 손으로 문질러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래서 요가라도 하고 들어가라고 한 거구나….”
이미 감옥에 들어간 전적이 있는 재벌 친구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세탁까지 해야 하는 불편함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바깥에 비해 그리 싼 가격은 아니지만, 의류품은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일 입었던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 입었기 때문이다.
범준이 지금 갇혀 있는 곳은 서울구치소의 독방이었다.
천장 모서리에는 24시간 동안 감시하는 카메라가 달려있어서 늘상 감시받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범준은 독방에서 선고받았던 8년을 다 채워야만 한다면 정신병에 걸릴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돈과 권력을 이용해 특별방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곳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1년… 딱 1년만 버티자.”
모범수로 특별사면을 받기 위한 초석인 것이다.
재벌 전문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가석방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가져와야 될 것이 ‘국민정서’라고 했다.
최대한 비루한 모습을 보여서 동정 여론을 살 생각이었다.
현재 정부가 재벌 기업에 갖고 있는 시선도 나쁘지 않았고, 감옥 안에서 특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여론을 타게 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곳에 온 뒤로 혼잣말까지 늘었다.
“그래도, 시발. 이건 아니지.”
방 안에 화장실이 있긴 했다.
가로 80센티미터 정도에 세로 120센티미터 정도 되는 비좁은 화장실이.
심지어 이곳은 목욕실도 겸하고 있어, 샤워와 설거지까지 해야 되는 곳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하긴 했다.
범준은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다가 인상을 찡그린 채 소리쳤다.
“교도관님!”
잠시 뒤, 느긋한 발소리와 함께 교도관이 나타났다.
“하…. 이구팔구. 작작 좀 하면 안 되겠냐. 오늘만 몇 번째야. 쯧.”
이구팔구, 즉 2989는 범준이 받은 죄수 번호였다.
감옥 안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죄수 번호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감옥에 있는 동안 쓰일 이름이었다.
“하하…. 예. 이제 슬슬 시간 되지 않았습니까?”
“따라와.”
“흐흐.”
교도관을 따라 이구팔구, 범준이 들어간 곳은 접견실이었다.
일과시간에도 접견 변호사를 부르기만 하면 접견실에서 30분간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범준은 하루에도 4, 5번씩 면회를 가지며 휴식을 취했다.
특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야 재벌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될 것이 아닌가.
접견실로 들어가자 앉아 있던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며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앉아, 앉아. 오늘만 세 번째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범준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일반 접견과 다르게, 변호사와의 접견은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차단시설이 없는 곳에서 접견이 가능했다.
심지어 교도관도 참여 및 접견 장면을 청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물론 창문 밖에서 교도관이 감시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매수한 사람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범준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불.”
변호사가 허리를 뻗어 담배 한 개비를 범준의 입에 물린 뒤 불을 붙였다.
범준은 볼이 푹 패일 정도로 깊게 담배를 빤 뒤에 연기를 내뱉었다.
“후…. 아버지는 요즘 어때? 뭐,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아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한 번도 면회를 안 오시니 섭하네.”
“....”
변호사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 범준은 불현듯 불안감이 스쳤다.
“표정이 왜 그래?”
“그게….”
“아, 뭔데. 나한테 숨기는 거라도 있냐?”
“그건 아닙니다.”
“그럼 말해.”
“....”
“아오, 이 새끼가! 맞고 말할래? 됐다. 휴대폰이나 내놔 봐.”
변호사는 주저하다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원래 보안법상 핸드폰은 교도소 내로 반입이 불가하기 때문에, 이것 또한 매수된 교도관으로부터 받아 온 것이었다.
변호사가 휴대폰을 범준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범준은 눈을 흘기며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태선전자의 전무이사이자, 재만의 심복인 지완수였다.
태선전자에서 꽤 오랜 세월 함께 해왔기 때문에 범준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다.
어릴 때는 범준이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인물이었다.
신호음이 꽤 길게 이어지다가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무님. 저 범준입니다.”
“...예.”
범준이 평소의 완수에게는 들어본 적 없는 축 처진 목소리였다.
“전무님은 목소리가 또 왜 그러십니까?”
“...후. 잘 들으십쇼. 부회장님 차명계좌가 터졌습니다. 지금 건물에 검찰들이 압수 수색하겠다고 쳐들어오고 난리… 아, 전화 끝내고 준다고! 이 새끼들이.”
“전무님…?”
“영장도 안 갖고 온 새끼들이 휴대폰까지 내놓으라고 지랄들이네요.”
“아니, 그보다 아버지 차명계좌가 터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통화 길게 못 합니다. 차명계좌뿐만 아니라 합병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터졌습니다. 밖에서 잘 해결해볼 테니…. 사장님은 안에서 몸 사리고 계세요.”
“잠시만요! 잠시만…”
“끊어야 될 것 같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범준은 곧바로 재만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적인 목소리만 들려올 뿐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범준은 눈앞에서 좌불안석하고 있는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야. 너 솔직하게 다 불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까 접견 이후에 부회장님이 불법 비자금을 차명계좌를 이용해 숨기고 있었다는 기사가 터졌습니다. 연이어서 합병과 관련된 것들까지 싹 다…”
“그게, 시발! 말이 돼? 한 번에 어떻게 다 터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범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말했다.
“나는? 나는 더 터진 거 없어?”
재만의 차명계좌가 밝혀졌다면 범준의 차명계좌가 안 밝혀졌을 리가 없다.
“검찰 발표든, 기사든 간에 터진 거 없냐고.”
“그, 그게 말입니다.”
“당신 변호사 아니야? 주둥이 터는 직업이 아까부터 입 닥치고 뭐 하는 거야, 어! 이러라고 내가 니네 법인에 돈 쏟아부은 줄 알아?”
재만과 범준 모두 예금으로 된 비자금들은 벤타은행에 잠들어 있었다.
같은 은행에서, 그것도 재만의 비자금이 밝혀졌는데 범준이라고 무사할까.
게다가 벤타은행에 있는 비자금이 걸렸다면, 같은 명의로 된 태선그룹의 지분들이 차명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변호사는 머리를 조금 숙이고 침음하다가 말했다.
“사장님의 차명계좌 111개도 적발되었습니다….”
“이런 시발!”
범준은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쾅, 쳤는데 이 소리를 들었는지 교도관이 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후. 아닙니다. 나가 계십쇼.”
“저 이거 걸리면 목 날아갑니다. 조심 좀 해주십쇼.”
“예. 조용하겠습니다.”
“그리고 담배도 좀… 아으, 냄새 진짜. 저 잘리면 이런 편의 봐줄 교도관이 또 있을 것 같아요?”
“....”
교도관은 못내 미더운 눈치로 범준을 바라보다가 다시 문을 닫았다.
“감옥만 아니었으면 내 발가락이라도 핥았을 새끼가.”
“....”
범준은 재차 담배를 입에 물며 변호사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 지금도 합병해보겠다고 자식 새끼 감옥으로 보낸 인간인데. 과징금이랑 세금폭탄 맞으면 자기 살기 바쁘지 나를 도와주겠어?”
“제가 따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없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변호사가 할 말이 없다는 건 범준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재만이 진태에게 받은 비자금을 통해 정재계 인사들에게 청탁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합병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버지한테 연락하라고 전해. 이번에도 연락하지 않으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