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현재 태선AA의 시가총액은 6조2천억 원을 살짝 상회했다.
합병에 반대한 지분 15프로 중 일반주주들 전부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여환, 성표, 내 지분만 합쳐도 11프로가 넘는다.
재만이 약 7천억 원에 가까운 자금을 지불해야만 합병이 성사되는 것이다.
나라면 얼씨구나, 좋다고 그 돈을 지불하고 지분을 더 늘리겠지만, 현재 재만이 그 돈을 정당하게 지급할 능력은 없었다.
분명 차명계좌를 건드려 자금을 확보하려 들 것이고, 그건 멀지 않은 미래가 될 것이다.
“이 불편함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참아주세요.”
여환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입구를 지키고 있는 채보였다.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부회장님. 지금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서재만 부회장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내가 곧 가지. 막고 있어.”
통화를 끊자 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서재만 부회장이 저택으로 찾아왔답니다.”
“예, 예?”
“일단 막으라고 지시는 내렸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 어떻게라니…. 그 양반 앙심품고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구 실장에게 확실하게 막으라고 전달하겠습니다. 경호원도 더 충원해드리고요.”
“감사합니다….”
여환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쯤이면 여환이 반대표를 던졌다는 게 나와 연관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심히 궁금했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자 익숙한 재만의 목소리에 노성이 섞여 들렸다.
“구채보 실장! 당신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채보의 이름과 직급을 재만이 아는 이유는, 채보가 진태 밑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문을 열자 평소보다 밝은 톤의 얼굴을 한 재만이 보였다.
반질반질하고 윤기 나는 것이, 오늘 주주총회라고 화장을 한 듯했다.
그런 반면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귀는 새빨개져 있어 눈에 띄었다.
“백부님. 남의 집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네가 뭔데 홍여환 이사장을 만나냐.”
“홍여환 이사장님은 저와 한배를 타기로 약속한 사이입니다. 아니다, 이미 출항까지 했으니 같이 바다를 항해하는 사이라고 하죠.”
재만은 자켓을 벗어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와 두뼘 거리까지 걸어오자, 채보가 손을 내밀어 가로막았다.
재만은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성표 이사장이 태도를 돌변한 것도, 방송국에 범준이 일 터트린 것도 다 네놈 짓이지. 차현섭 장관이 감싸고 돌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재만이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나를 찾지 않나 의아했었다.
지금 말하는 것을 보아, 현섭이 나를 그동안 지켜준 듯했다.
어차피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던 일이지만 현섭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뭐?”
“이미 알고 계실 줄 알아서 말입니다. 백부님 정보 라인이 영 별로인가 봅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 앞에서…”
“제가 욕지기 들을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너…!”
“태선전자 제외하고 모든 계열사에서 백부님보다 제 지분이 월등하게 높습니다. 주주총회 열면 지금이라도 회장 달 수 있는데 왜 안 그러는지 아십니까?”
내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음에도 재만을 도발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를 자극해서 하루라도 빨리 차명계좌에 손을 대게 하기 위해서다.
재만은 아니꼬운 눈초리를 나를 흘기고 있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거다. 네놈은 뭐가 두렵기에 승계를 늦추고 있는 게냐?”
재만의 말대로 나는 두려웠다.
범준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을까 봐 두려웠고, 재만이 태선전자 하나에 만족하고 욕심을 거둘까 애가 탔다.
나를 죽였던 이 재벌 놈들에게 복수하려면 그들이 욕망을 표출해야만 했으니까.
“저랑 김성표 이사장, 홍여환 이사장 전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할 겁니다.”
“뭐…?”
“계산기 돌리면 아시겠지만 반대표 던진 일반 주주들 중 반의반만 청구권 행사해도 8천억 원은 필요할 거예요. 감당되시겠습니까?”
감당이 될 리가.
이번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재만이 뿌린 돈으로 강남에 건물 몇 채는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차명계좌에 손을 대거나, 갖고 있는 태선의 주식들을 처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알아 온 재만이라면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순식간에 분노를 거두고 발걸음을 돌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식도, 제 감정도 회장 승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이다.
괜히 그의 심기를 더 건드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고가 받아들여졌다면서요? 최종심이 다음 주라던가. 무슨 수를 써도 실형은 확정이라던데 상심이 크겠습니다.”
“....”
재만이 멈춰 섰다.
“범준이 형 잘 격려해주세요. 평생 곱게 자라다가 감옥 생활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재만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래도 서범준보다는 낫네. 참을 줄도 알고.”
***
“이 사건 공소사실 중 피고인 서범준에 대한 2007년 6월 20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의 점 및 피고인 서범준에 대한 2008년 1월 19일 증거위조교사의 점은 각 무죄를 선고한다.”
범준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죄’라는 말에 안도해서가 아니었다.
증거위조교사야 혐의에 불과했으니 무죄를 받는 것이 당연했고 특정경제범죄, 즉 횡령에 대해서는 2007년에 단 한 건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었다.
“... 그 외 횡령죄와 배임죄 그리고 업무상배임죄에 대한 공소사실은 피고인 측 변호에 수긍하기 어렵다.”
공소사실 17건 중 단 2개만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범준이 옆을 돌아보자 한국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받는 변호사라는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범준이 눈을 흘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5유형은 피할 수 있을 거라면서. 공소사실 중 저거 몇 개 무죄됐다고 변하는 거 없잖아…!”
횡령과 배임죄는 총 5개의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그중 최고가 5유형이었다.
감형을 받는다 해도 법정형기만 최소 4년이었고, 가중처벌을 받는다면 최장 11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유형이다.
재판부의 재량으로 작량감경을 한다 치더라도 5유형이 선고된 이상 실형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범준이 공소 받은 죄목은 총 4개였는데 횡령죄, 배임죄, 업무상배임죄, 증거위조교사였다.
증거위조교사는 없다 치더라도 나머지 항목의 죄들을 모두 실형을 선고받는다면 몇 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변호사는 범준의 시선을 느꼈지만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말했다.
“그, 그게…. 이상하게 대법관 분들 중 세 번과 분명 얘기가 됐었는데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판사가 마지막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 서범준을 징역 8년에 처한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판결봉을 두드리는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범준은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소리를 지르거나, 욕지기를 뱉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질린 얼굴로 변호사의 팔을 붙잡고 뇌까렸다.
“아버지, 아버지한테 당장 알려. 아버지는 왜 안 오시는 거야…!”
“최종심까지 진행하면서 부회장님이 어떠셨는지 아시잖아요…. 그만 포기하세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특별사면이라든지, 특사라든지. 아니면 감면이라도 괜찮으니까….”
“우선 말씀은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법무법인에서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감옥에서 조금만 버티고 계세요.”
“이런…. 시발….”
욕 한마디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서범준 전 태선전자 사장이 거액의 횡령 등으로 최종심에서 징역 8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부는 횡령 및 배임 액수가 천억 원이 넘고, 범행에 회사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해 죄질이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 피고인이 피해액을 모두 갚기는 했으나 그 사정은 이미 지난 판결이 반영이 되었다며 설명했습니다. 국민기업이라 불리던 태선전자에서…”
TV에서는 범준과 관련된 속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범준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채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이제 어엿한 GBC방송국의 국장이 된 초아와 함께 하고 있었다.
GB타워의 꼭대기 층에서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뉴스를 감상하고 있었다.
“오늘은 축배를 들어야겠습니다.”
“저야 좋죠. 강빈 씨 언제 시간 되나 했는데. 서범준이 도움이 될 때도 있네요?”
초아가 천진하게 말하자 빙긋 웃음이 지어졌다.
“오늘 같은 날에 마시려고 아껴둔 술이 있습니다.”
“강빈 씨가 아끼는 술도 있어요?”
“로마네 콩티입니다. 와인의 왕이라고 불리더군요.”
“술은 잘 모르지만 엄청 비싼 와인이겠죠?”
“돈이야 차고 넘치니까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초아는 수긍한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자랑이라도 한 것 같아 머쓱해져 말을 돌렸다.
“국장 일은 어때요? 벌써 두 달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초아의 아버지이자, 전 국장인 규명이 고문역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GBC방송국을 경영하고 움직이는 건 온전히 초아의 몫이었다.
YTT를 비롯한 언론사들에 압박을 가하는 것도 규명에서 초아의 권력으로 온전히 이전되었다.
언론 쪽을 장악하기 위해서 초아는 절대 놓쳐선 안 되는 인맥이었다.
“요새 너무 행복해요. 강빈 씨가 광고도 여러 개 띄워주시고, 수백억 원 규모의 투자도 계속해주셔서 저에 대한 임원들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거든요. 예전에는 따르기만 했다가, 제가 주도해서 제작 들어간 드라마는 시청률이 30프로가 넘어섰다니까요?”
지상파 방송 3사에 포함도 되지 않은 GBC방송국에서 시청률 30프로는 말도 안 되는 수치긴 했다.
현재 GBC방송국에서는 ‘그녀의 유혹’이 방영 중이었는데, 이게 그렇게 재밌는지 연일 화제였다.
전생에서는 지상파 방송국, SCB에서 방영했는데 시청률이 40프로를 넘어섰었다.
“초아 씨 안목이 대단하네요.”
“막장 드라마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정말 재밌어요. 강빈 씨도 시간 나면 봐보세요.”
“하하. 초아 씨가 그리 말씀하시니 꼭 봐야겠네요.”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기현이 들어왔다.
기현답지 않게 다급한 모습에 무언가 일이 터졌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기현이 초아를 힐긋 바라봤다.
이 정도로 다급한 일이라면.
“초아 씨는 들어도 괜찮으니까 얘기해.”
“서재만 부회장과 관련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