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39화 (239/249)

#239화

“고생했어.”

“다녀왔습니다.”

기현이 꾸벅 묵례를 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 태선AA와 태선전자의 합병을 주요 안건으로 주주총회가 열렸다.

나는 태선전자의 대주주이자 1프로 남짓한 주식을 보유한 태선AA의 주주로서 참여할 자격이 있었고, 기현을 대리인으로 보내 의결권을 행사했다.

“생각보다 늦었네. 아침 9시 시작 아니야?”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보유주식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의결권이 결정되기 때문에, 보통 주주총회는 대주주들 간의 의견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태선AA의 경우 재만의 지분이 차명으로 된 지분까지 합쳐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금방 끝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오래 걸렸다.

주주총회는 통상 1시간도 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한데, 9시에 시작해 기현이 돌아온 시간이 12시가 조금 넘었으니, 평범한 주주총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일련의 소동이 있었습니다.”

“소동?”

“태선 AA의 대주주 중 12명이 참석하지 않았고, 소액주주들이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다며 물리적으로 항의했습니다.”

“몇 프로 정도가 빠진 거야?”

기현은 그만의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태선AA의 30프로에 가가운 지분 소유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하겠군. 다 서재만 차명인들이지?”

“예.”

“30프로가 빠져도 뻔하다는 가정이었겠네. 서재만 지분만 50프로가 넘고 태선전자에선 합병에 긍정적이니까. 형식을 갖춰야 해서 열었던 거지. 정해진 결과였어.”

내가 굳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뻔한 결과를 굳이 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계획을 실행하려면 합병의 결의까지는 진행되어야 했다.

주식매수청권은 합병의 결의 이후에 행사가 가능하니까.

“태선전자 측에서는 반대가 크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현재 저평가 받고 있는 기업가치가 태선AA와의 합병을 통해 정상가치로 회복할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현재 태선전자의 주가는 50만 원 중반대로, 조금씩 회복하고 있긴 하지만 예전과 같은 위상은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태선AA와의 합병의사가 진행됨에 따라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해서, 이를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듯했다.

실상은 태선AA와의 합병을 진행하기 위해 재만이 꼼수를 부린 거지만 말이다.

내가 갖고 있는 태선전자의 지분으로 반대표를 던지긴 했으나, 이를 통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생각은 없었다.

태선AA야 재만이 독단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태선전자는 수많은 이사진들로 구성된 기업이다.

내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고, 재만의 자금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태선전자라는 기업이 매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지분만 날아가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중 일부가 재만의 지분으로 흡수가 된다면, 그것만큼 악수가 없다.

기현이 보고를 이어서 했다.

“태선AA 측에서는 7프로를 소유한 국민연금공단의 홍여환 이사장, 3프로를 소유한 새천년 고등학교의 김성표 이사장, 그리고 부회장님이 소유한 약 1프로의 주식과 일반주주들을 모두 합쳐 약 15프로의 반대가 나왔으나 합병은 결의되었습니다.”

“15프로면 예상 범주 안이네.”

내가 갖고 있는 지분이야, 이미 재만은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것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주주들도 어느 정도 계산하에 있었을 거고.

하지만 여환과 성표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서재만 반응은 어때?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토막 나 버렸을 텐데.”

“부회장님 표현을 빌리자면, 가관이었습니다.”

기현과 가관이라는 단어가 너무나도 안 어울려서 그만, 실웃음이 나왔다.

“하하. 가관. 가관이라고. 내가 직접 갈 걸 그랬어.”

내 두 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보다 이제 성표와 여환이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텐데, 그들의 안위가 조금은 걱정되었다.

“주총이 끝나고 따로 그들을 찾진 않았나?”

“홍여환 이사장은 경호 2팀 실장의 경호 아래 곧장 빠져나갔습니다. 서재만 부회장이 김성표 이사장이라도 붙잡고 얘기하려고 했지만, 김성표 이사장이 뿌리치고 이사회실을 나갔습니다.”

성표에게 했던 말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재만과 성표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여환 쪽이 더 신경이 쓰였다.

“홍여환 이사장은 바로 집으로 갔나?”

“예.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직접 가봐야겠어.”

“부회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걱정되신다면 제가 직접 갔다 오겠습니다.”

“괜찮아.”

저번에는 강원도 별장에서 밀회를 가져야 했지만, 이제 숨길 것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차를 타고 여환의 저택이 있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남산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고, 앞에는 한강이 흐르는 것이 과연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이었다.

태백산의 맑은 물이 중랑천의 물과 만나 물 중에서 최고라는 금성수가 된다고 했던가.

그런 금성수가 한남동을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풍수지리를 믿지는 않지만, 꽤나 유명한 얘기였다.

국회의장과 대법원장, 외국 대사관 등 공관이 많이 자리하고 있어 소음도 거의 없다시피 조용한 동네였다.

저택 앞에 도착하자 경호 2팀의 실장인 채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채보의 근육질로 비대한 몸이 문 전체를 가로막은 것 같았다.

다가가자 채보는 나를 알아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구실장. 고생이 많아.”

“하하. 부회장님께서 직접 격려를 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이런, 앞으로 자주 와야겠어.”

채보가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특이사항은?”

“아직 없습니다.”

“밤에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근처 호텔에서 대기 중인 교대팀이 따로 있습니다. 밤 9시에 교대할 예정입니다.”

“그래. 24시간 밀착감시 부탁할게. 김태평 대표 사건 있고 나서 영 불안해서 말이지.”

“걱정하지 마십쇼. 만약 제가 경호하고 있는데 일이 터진다면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지. 몇 달만 더 고생해줘.”

나보다 한 뼘은 더 높이 있는 채보의 어깨를 토닥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과, 건물 안에 상주하고 있는 경호원까지, 저택에만 두 명의 경호원이 대기 중이었다.

여환의 저택이 단층이기 때문에, 행여나 담을 넘을 경우까지 생각해서 배치한 모양이었다.

별장 이후로 처음 마주한 여환은 얼굴빛이 좋지 못했다.

“부회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주주총회에서 서재만 부회장의 표정을 보셔야만 제 심정을 알 겁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오늘 부로 믿게 될 것 같습니다.”

기현은 재만의 표정을 보고 가관이라고 하던데, 여환은 사람을 죽일 듯한 표정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표정으로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게 재미는 있었지만, 여환이 워낙 진지한 얼굴이어서 웃지는 못했다.

여환이 황급히 슬리퍼를 신발장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우선 들어오시죠.”

나는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뒤, 거실로 향했다.

중년의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태선그룹 서강빈 부회장님 맞죠? 저 경비원들까지 보내주신.”

“예.”

“어머, 정말 고마워요. 이이 말로는 연금공단에 앙심을 품은 작전 세력들이 협박을 한다면서요? 세상이 정말이지… 에휴.”

“....”

앙심을 품은 작전세력이라니?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싶어 여환을 바라보자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하고 있었다.

“다, 당신은 잠깐만 들어가 있어 줄래? 부회장님과 할 얘기가 있어.”

“그럴게요. 차라도 한 잔 내어 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으니까 자리만 좀 비워줘.”

“어휴, 당신한테 물어본 줄 알아요? 서강빈 부회장님! 무슨 차로 드릴까요?”

“저도 괜찮습니다.”

“음… 알겠어요. 잠깐 나가 있을 테니까 말씀들 나누셔요.”

“여보! 밖에는 나가지 말고 집 앞에 벤치에 앉아 있어!”

“알겠어요.”

여자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여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말씀 안 드린 겁니까?”

“어떻게 말합니까…. 마누라는 제가 서재만한테 태선AA의 주식을 증여받은 사실도 몰라요. 그런데 이제 내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회장님께서 경비원을 붙여줬다. 이런 말을 어떻게 합니까.”

“흠.”

아내를 생각하는 여환의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내가 봤을 때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여환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다면 모를까.

“주식매수청구권은 언제 행사할 생각입니까.”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지금 밖에 나가기도 무서운데.”

“그래서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

“이미 합병 반대하면서 서재만은 이사장님이 등을 돌렸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이제 와서 무른다고 봐줄 사람도 아니고요. 괜히 줄 타지 마시고 제 쪽으로 넘어오기로 했으면 확실하게 하세요.”

어중간한 태도는 중간은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주주총회에서 합병 반대를 표명한 이상, 여환은 내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후… 알겠습니다. 내일 권리행사 하러 가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전화로 물어보셔도 될 것을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가 뭡니까…?”

“저는 제 말에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리고 싶을 때는, 반드시 얼굴을 봐야 합니다.”

확실한 의사를 전달할 때는, 전화로 말하는 것보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갖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홍여환 이사장님이 다른 수를 생각하고 있더라도, 제 얼굴을 보면 생각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무, 무슨! 부회장님도 말했다시피 저는 이제 빼도 박도 못 합니다!”

“농담입니다.”

“하, 하하….”

여환이 머쓱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이내 입술을 닫았다.

“알려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말씀하시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경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서재만의 차명계좌의 거래 내역을 확보했습니다. 모두 비리와 횡령 등 불법적인 경로로 획득한 자금들이지요. 이후, 서재만이 주식매수청구에 따른 돈을 지급하기 위해 그 계좌에 손을 댄다면.”

“그때가 서재만 부회장이 끝장나는 날이겠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이 온전히 제 것이 되는 날이기도 하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