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말로만 들었는데,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고등학교라니. 선수촌이라 해도 믿겠어.”
두 번이나 검문을 받고 들어간 새천년 고등학교의 자태는 실로 웅장했다.
입구 옆으로 초록빛 나무들이 잔뜩 뿌리를 내리고 있어 친환경적인 느낌을 내었고 그 뒤로 골프 연습장과 야구장, 축구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강현재 시절에는 이런 부유한 학교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서강빈인 지금은 연결고리가 없었기 때문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태선가의 자제들 중 새천년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재계 2위의 YS그룹 자제들이 모두 이 학교 출신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이는 진태의 교육관이 단단히 한몫을 한 결과인데, 진태는 어차피 사회에 나가면 모든 사람의 위에 서는 것이 태선가 사람이기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평범한 생활을 하길 바랐다고 한다.
대학교는 몰라도 국중고에서는 재벌인 건 티내되, 태선가 사람이란 건 비밀에 부치라고 했다던가.
잔디밭을 지나자 보이는 건물은 총 5채였는데,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본관은 근대식으로 다소 예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반면 몇 년 전에 신축했다는 신관들은 건축의 나라라 불리는 스페인의 건축 양식을 떠올리게 했다.
“로비 받은 돈으로 신축에 돈을 쓴 건가? 스포츠시설까지 합치면 꽤나 들었을 텐데.”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영균이 고개를 슬쩍 돌려 대답했다.
“신관 두 채는 YS그룹에서 기부한 거랍니다. 스포츠시설도 골프 연습장과 축구장을 제외하곤 전부 재계 인사들이 투자한 거고요.”
“과연.”
성표는 일종의 ‘전학비’와 ‘입학비’ 명목으로 정재계 인사들에게 금품 청탁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재계 인사들간의 중간다리 역할을 수행하며 중개비를 톡톡히 챙겼는데, 그동안 받아 온 돈이라면 신관을 신축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학교에는 투자를 하지 않고, 제 부를 축적하기 바빴던 모양이었고.
하긴, 학생들을 위해 돈을 쓸 정도로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식으로 돈을 받아 먹진 않았겠지.
본관까지 차도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본관 입구까지 차를 타고 갔다.
영균이 열어준 차문으로 내리자, 성표가 손을 공손히 모으고 나를 맞이했다.
“서강빈 부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이! 새천년 고등학교 이사장 김성표라고 합니다.”
혀가 짧은지 소리를 높일 때, 끝음이 늘어졌다.
성표가 허리를 굽힌 채 손을 내밀었는데, 평생 잡았던 손 중에 살집이 가장 두터웠다.
“예.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내가 손을 잡지 않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가자 성표가 황급히 나를 뒤따라 오며 말했다.
“부회장님이 저희 학교에는 어쩐 일로….”
“직접 할 얘기가 있으니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우선 이사장실로 모시겠습니다이!”
성표가 뒤뚱거리는 거치고 제법 빠른 걸음걸이로 앞서나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건물 내부와는 달리, 이사장실은 얼마나 돈을 처발랐는지 벽지부터가 남달랐다.
새하얀 벽지에는 황금빛을 내는 좁쌀만 한 것들이 오돌토돌 붙어 있었다.
‘설마.’
내가 벽지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성표가 설명했다.
게걸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흐흐. 이게 진짜 금칠이죠. 남들이 벽에 똥칠할 때 저는 금칠을 해버렸습니다이!”
“많이도 받아 처먹었나 보네.”
“예?”
“앉으세요.”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표를 뒤로 하고 나는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성표는 두꺼비처럼 살에 파묻힌 두 눈을 끔뻑이고는 내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바다를 가르는 불길?’
내 기억으로는 1년 전쯤에 형주가 그렸던 그림이었다.
내가 준 항공권으로 여행을 떠났던 하와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었나.
저 그림이 여기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왜냐하면….
“부회장님?”
성표가 대뜸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 부회장님도 저 그림에 시선이 끌리나 보군요. 하하. 네. 맞습니다. 김형주 화백의 그림입니다이!”
“아, 예.”
“그보다 제가 알기로 부회장님께선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차실장.”
영균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를 성표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보면 아시겠죠.”
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입 마시고 성표의 표정변화를 관찰했다.
성표는 불안한지 나를 힐끔거리며 서류 봉투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마 매끈한 표면이 손에 닿았을 것이다.
봉투 안에는 성표가 그동안 정재계 인사들에게 금품청탁을 받아 온 정황들을 담은 사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 손에 사진 수십 장을 집고 꺼낸 성표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애써 태연한 척하려는 것 같지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제 뒷조사라도 하신 겁니까?”
“예. 뒤가 많이 구리더군요.”
“쇼핑백에 뭐가 들어있는 줄 알고 구리다는 겁니까?”
“인사들, 학부모에게 쇼핑백을 받자마자 은행에 가는 건 조금, 아니 많이 수상쩍지 않습니까. 나올 때는 빈손이더군요.”
“이건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이!”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증거라니, 제가 뭘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고 계신가 봅니다?”
“....”
성표는 입구에서부터 유지했던 웃음기를 순식간에 거두고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쇼핑백에 현금을 담아 건네는 사람들은 절반 정도더군요. 아무래도 ‘VM 뱅킹’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철완에게 받은 성표의 계좌 거래 내역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성표는 인사들에게 리베이트받은 돈을 전부 자신의 VM뱅킹 계좌로 넣었다.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이체한 돈은 그대로 두면 되었고, 현금이 담긴 쇼핑백을 받을 때는 곧장 벤타은행에 찾아가 계좌에 돈을 넣었다.
벤타은행이 VM뱅킹을 출시한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으나, 성표의 계좌에 지금껏 쌓인 금액만 800억 원이 넘었다.
“그, 그걸 어떻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성표의 뺨으로 한줄기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보자가 있었습니다. 필요하시면 증거도 있고요.”
“...원하는 게 뭡니까?”
굳이 철완에게 받은 계좌 내역이 아니더라도 성표는 빠르게 수긍했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을 눈치는 되는 모양이었다.
“갖고 계신 태선AA 지분 말입니다. 어떻게 매수하신 겁니까. 투자자들은 만나주지도 않고, 시장에는 살 수 있는 수량이 없던데요. 제가 싹 다 긁어모은 게 1프로가 조금 넘거든요.”
“...서재만 부회장님께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대가로 매수한 겁니다. 반드시 오르는 주식이라고 했거든요.”
성표가 태선AA의 주식을 매수한 시기가 8개월쯤 전이었으니, 그 뒤로 태선AA의 주가는 2배가 넘게 뛰었다.
3프로의 지분이면 그때와 지금의 시세차익만 계산해도 900억 원이 넘었다.
사람 하나 소개시켜 주고 받았다기에 지나치게 큰 금액.
성표는 아직도 숨기는 것이 남아있었다.
“그게 끝입니까?”
“....”
“이사장님. 저 다 알고 온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말 빙빙 돌리시면 피차 곤란해집니다.”
“....”
“신두식.”
“그걸 어떻게…”
“작년 11월에 이사장님이 300억 원을 입금한 사람 이름이죠. 그리고 서재만 부회장과 연결된 차명인 중 한 명이기도 하고요.”
영균이 조사해 알아낸 차명계좌 중 하나의 명의가 신두식이었다.
성표는 작년에 신두식 명의로 된 계좌로 300억 원을 보낸 바 있었다.
이는 재만이 주가조작을 일으켰고, 성표는 대가를 지급받고 그에 협조했다는 증거로 충분했다.
“주가조작으로 얻을 돈이 훨씬 클 테니 지분을 매수하고, 대가로 300억 원을 지급하신 겁니까?
그 300억 원은 서재만의 비자금으로 쓰였겠군요.”
“주가조작이라뇨! 저는 그냥 오를 수도 있다, 그 말만 듣고 샀을 뿐입니다.”
“말만 들었는데 300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급하고,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900억 원을 전부 태선AA를 매수하는데 쓴 겁니까?”
성표는 태선AA의 주식이 일시적으로 시장에 풀리고 나서 2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사전에 재만과 말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성표 입장에서는 곧 천정부지로 솟을 주식이었기 때문에 전 재산이나 투자할 수 있었던 거고.
재만은 사람도 소개받을 겸, 급한 비자금을 당겨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리라.
“주가조작은 이득액 5억 원 이상부터 원칙적으로 실형이 권고됩니다. 그런데 이득액이 천억 원이 넘어간다? 최소 6년에 무기징역까지 가능해요.”
성표가 털썩 무릎을 꿇고는 두 손을 모았다.
“살려주십쇼…!”
“교육자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앞으로 절대 이런 일 만들지 않겠습…”
“이사장님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아갈지 저는 일절도 관심없습니다. 언젠가 그렇게 부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걸려 옥살이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그렇게 만들 생각도 없고요.”
내가 건드리지 않았던 전생에서도 성표는 옥살이를 살았다.
그동안 쌓아온 부와 명예를 완전히 잃고서 말이다.
어차피 서재만의 차명계좌들을 밝혀낼 때, 벤타은행에 압수수색이 들어갈 테니, 때가 되면 성표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의 비자금과 민낯이 드러나게 돼 있다.
“그럼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곳까지 찾아오셨으면 단순히 경고하려고 오신 건 아닐 거 아닙니까….”
말하다가 자신감이 사라졌는지, 말끝을 흐렸다.
“다음 주면 태선AA와 태선전자의 합병을 주요 안건으로 한 주총이 열리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합병을 반대하고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세요.”
“그리고요…?”
“그게 끝입니다.”
여환과 달리 성표는 재만에게 대가, 300억 원을 지급하고 주식을 산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적으로는 걸릴 게 많았지만 재만과 성표, 둘에게는 정당한 거래였으니 의결권에 대해 재만이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만약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날 모든 자료를 검경에 뿌리겠습니다.”
“...예. 걱정하지 마십쇼. 반드시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아까 봤던 형주의 그림이 눈에 밟혔다.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르는 불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그림 말입니다만. 선물로 받으신 겁니까?”
“아, 아뇨. 제가 직접 구입한 겁니다만….”
“그동안 세상 밖으로 나온 그림이 아니니, 공식 경매장은 아닐 테고…. 얼마에 구하신 겁니까?”
“그건 또 어떻게 아셨답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알 수밖에 없지.
아마 블랙마켓에서 샀거나, 뇌물로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성표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20억 원 조금 넘는 돈 주고 산 겁니다.”
혀를 차며 말했다.
“저거 가짜입니다. 진짜는 제 사무실에 걸려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