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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37화 (237/249)

#237화

은행이 돈을 버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핵심은 은행이 시작된 이래 늘 같았다.

예대마진을 얼마나 남기는가.

최소한의 예금금리로 최대한의 대출금리를 뽑아내는 것이 수익의 뼈대였다.

그리고 나는 벤타은행의 행장, 박철완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11조 원을… 저희 은행한테 맡긴다는 겁니까? 그것도 초저금리에 3년간 찾지 않겠다는 조건까지 걸고서…?”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철완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그런 조건은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만한 금액을 융통하는 건 저에겐 아무것도 아닙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본사를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옮기며 여유자금 대부분을 한국은행에서 환전했다.

CDS를 통해 번 돈 중에서도 재투자에 들어가지 않은 돈이었는데, 그 금액이 대략 23조 원 정도 되었다.

철완이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김성표, 서재만. 두 사람의 계좌정보와 관련해 이후 수사에 적극 협조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잘못들은 것 같습니다만? 뭐, 뭘 협조해 달라구요?”

“행장님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차 실장.”

내 뒤에 서 있던 영균이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철완의 앞에 내려놓았다.

철완은 나와 서류 봉투를 번갈아 보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보시죠. 그게 대화가 빠르겠군요.”

“이게 대체… 알겠습니다.”

두툼한 갈색 서류 봉투 안에는 사진 수십 장과 서류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서 새천년 고등학교의 이사장, 김성표가 정재계 인사들에게 쇼핑백을 건네받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성표는 쇼핑백을 든 채 벤타은행의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과, 빈손으로 건물을 나오는 성표의 사진들까지.

지난 이 주간 영균이 사람을 붙여 찍은 사진들이었다.

“이게 무슨….”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김성표 이사장이 촌지, 금액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렇게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촌지를 받고 곧장 이 건물로 들어온 사진들입니다.”

철완이 책상을 짚으며 벌떡 일어났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검찰 조사에서는 그렇게 진술하십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완에게 이어서 말했다.

“행장님은 책임지실 거 없다는 말입니다. 행장님께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

“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모바일뱅킹의 이점을 이용해 벤타은행에 많은 비자금을 묵혀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걸 터뜨리면 은행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실제로 성표가 받은 촌지가 발각되면서, 검찰의 압수수색이 이루어진 뒤, 벤타은행에 수조 원 규모의 비자금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만한 금액이 징수된 이후 벤타은행은 모바일뱅킹 폐쇄는 물론, 부도 위기를 맞이했었다.

이 일이 터진다면 벤타은행도, 성표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서재만 부회장이 그동안 비자금을 축적해 온 차명계좌의 성명들입니다. 행장님께선 익숙한 이름들이겠지요.”

철완에게 건넨 서류에는 이름이 빼곡히 기입되어 있었다.

영균의 조사를 통해 재만의 차명계좌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증거가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벤타은행의 모바일뱅킹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들의 계좌내역을 받아낼 수 있다면, 확실한 증거로 삼을 수 있었다.

“저는 모르는…”

“변명하는 자리 아닙니다. 행장님. 저는 마지막 기회를 드리러 온 것이지, 협박하러 온 게 아니에요. 게다가 11조 원이나 되는 제 돈을 맡길 곳인데, 위해를 가하겠습니까?”

재만이나 성표가 벤타은행에 맡긴 비자금이 아무리 크다 한들, 내가 맡길 금액에 발끝에도 못 미칠 것이다.

내 말만 들으면, 벤타은행 입장에서는 5년간 초저금리만 받는 11조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의 상품이 넝쿨째 굴러온다는 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음에도 철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이유는, 이 사실을 폭로할 시 재만과 성표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겠지.

철완이 손으로 입을 매만지며 말했다.

“욕심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김성표 이사장은 몰라도 한낱 행장에 불과한 제가 서재만 부회장님을 폭로했다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어떻게든 이 일을 터뜨릴 생각입니다. 행장님이 도와주신다면 더 편하겠지만, 굳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행장님도 처벌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지금껏 비자금 형성을 방조하고 도왔으니까요. 저도 제 부탁을 거절할 행장님을 도울 생각이 없고요.”

지금까지의 수익을 상회할 수도 있는 내 투자를 받고, 재만과 성표의 범죄 행위를 고발할 것이냐.

혹은 내 투자보다 낮은 수익에 만족하며 범죄에 연루될지도 모르는 위험부담까지 가져갈 것이냐.

애초에 선택지는 정해져 있으니, 한 가지 확신만 더해주면 된다.

“행장님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엄중한 경호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만약 계좌정보 노출로 인해, 행장님께 법적인 책임을 묻는다면 제 모든 인맥과 힘을 동원해 행장님을 돕겠습니다.”

무엇보다.

“아시겠지만,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책임이 있는 것은 행장님뿐만이 아닙니다. 정보를 요구한 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내가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벤타은행에 온 이유였다.

일이 잘못된다면 나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성명이자, 그럴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철완이 굳은 표정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회장님.”

나는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그저 바라봤다.

“서류에 적힌 이름들…. 그리고 김성표 이사장님과 서재만 부회장님. 계좌정보 전부 따오겠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철완이 넘어왔다.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양이 워낙 방대하고 제가 직접 처리해야 될 것 같아서요. 그래도 이틀 안에 해보겠습니다.”

“그럼 목요일 퇴근 시간에 맞춰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철완 행장님.”

“말씀하시죠.”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같은 조건으로 저축성 예금의 규모를 늘리겠습니다. 한국 최고의 은행으로 거듭나 보시죠.”

11조 원에 더해, 예금을 늘린다면,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벤타은행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동기를 부여할 생각에 꺼낸 말이었는데, 철완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씀하신 예탁금으로 충분합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비자금들 걷어내고, 부회장님의 예탁금을 정비하려면 많이 바쁠 겁니다. 우선은 재정비하는데 사활을 다 할 생각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는 걸까.

확실하게 눈앞의 목표만 좇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철완 행장님.”

철완이 오늘 처음으로 내게 웃음을 비쳤다.

“예. 부회장님.”

***

“하이고야, 장 의원님이 이런 누추한 곳을!”

성표가 두터운 몸을 씰룩거리며 버선발로 뛰어 나갔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비례대표를 통해 초임을 달고, 올해 4월에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강남구 의원이었다.

또한 슬하에 있는 자녀가 새천년 고등학교로 전학을 희망하는 학부모이기도 했다.

새천년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정재계 인사들과 안면 트기가 쉬우니, 정재계 인사가 직접 성표를 찾아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늦기는요. 흐흐.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할 따름이지요. 앉으시지요. 어이! 빠르게 차 한 잔 내와라이!”

‘어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이사장실을 나갔다.

장 의원은 소파에 앉으며 흘끔 이사장실을 둘러보았다.

척 봐도 고가의 장식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벽에 걸려 있는 그림 중 하나는 이름은 모르지만, 예술에 무지한 그도 익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저 그림은 김형주 화백이 그린 것 아닙니까?”

“‘바다를 가르는 불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흐흐. 맞습니다. 저 녀석 데려오느라 돈 좀 썼지요. 우히히.”

성표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바다를 가르는 불길’은 형주의 그림답게 전체적으로 보면 노을이 비치는 바다지만, 노을과 바다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제각기 형태를 갖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를테면 색이 바랜 꽃무늬 벽지라든지, 녹이 슨 자 같은 것들.

성표가 암시장에서 가격을 후려쳐 20억 원 정도에 사온 것인데, 미술품 감정사에 따르면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감정 결과 경매에 나가면 최소 50억 원은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상당한 차익을 얻어낸 것이다.

물론 암시장에서 구한 것이기 때문에 성표는 벽에 전시나 하다가 몇 년 뒤에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장 의원이 만면에 웃음꽃을 피고 있는 성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학교를 소개해 준 전 대표님께 들어서 알고 있긴 했습니다만. 한국을 빛내고 있는 김형주 화백의 그림까지 소유할 정도면, 이사장님의 예술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해 온 것이 있는데.”

장 의원이 태선백화점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성표에게 넘겼다.

“아이고야, 의원니임! 요새 이런 거 받으면 큰일 나요.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그러지 마시고 넣어 두세요. 선물 하나 준 것 가지고 큰일 안 납니다.”

“크흠.”

성표는 쇼핑백을 슬쩍 보고는 말을 붙였다.

“그것보다 제가 이용하고 있는 게 있는데. 잠깐만요.”

성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 의원에게 다가가더니 귀에다가 속삭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장 의원이 토끼 눈을 뜨고는 말했다.

“아니, 계좌로 바로 쏘다니요.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걸리면 이사장님이랑 저랑 둘 다 목 떨어져요.”

“흐흐. 이건 안 걸린다니까요. 태선전자 서재만 부회장님 아시지요? 그분 소개로 이용하게 된 건데 아는 사람들은 요샌 장물보다 싹 다 이것 씁니다.”

“그래도….”

“그 서재만 부회장님이 직접 쓰시는 건데 못 미더우십니까? 아니면 현금으로 주셔도…”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예의 ‘어이!’라고 불렸던 남자가 들어왔다.

얼굴빛이 하얗게 죽어 있었다.

성표가 그를 보며 호통쳤다.

“왜 이제 들어오는 거야! 차 시킨 지가 언젠데.”

“그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받아야 될 것 같은데요.”

“이 새끼가 지금이 어떤 자린 줄 알고. 쯧. 누군데?”

“그게… 태선그룹의 서강빈 부회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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