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내가 GB타워로 출근함과 동시에 기현이 찾아왔다.
기현치고는 꽤나 다급한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오늘 새벽 2시쯤에 홍여환 이사장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명함을 주긴 했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연락해 올 줄은 몰랐다.
“아침도 아니고 새벽에?”
“네. 도청을 염두에 둔 것인지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맥락으로 봤을 때 서재만 부회장이 찾아간 것 같습니다.”
“서재만이 직접이라…. 나와 만났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니야?”
“홍여환 이사장이 강원도 별장으로 향하던 중, 두 번째로 차를 갈아탔을 때 이미 미행은 없었습니다. 서재만 부회장은 아마 장시간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재만이 알게 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어차피 여환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재만도 알게 될 테니까.
비밀리에 여환을 만났던 이유는, 재만에게 대처할 시간도, 여유도 주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다.
“그래서, 홍여환은 뭐래?”
“저희 지시에 따르겠다고만 말했습니다. 자세한 건 얘기하지 않았고요.”
“그것도 도청을 의식해서 그런 거겠지. 마음은 결정된 것 같네.”
“제가 따로 키워 둔 직원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고요. 그 직원을 통해 홍여환 이사장에게 접근하겠습니다.”
채규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다더니, 역시 기현은 사소한 것 하나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좋겠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시기를 알릴 때 적절하겠어.”
“예. 그리고 오늘 출근하는 길에 차현섭 장관님의 수행비서라는 사람이 연락이 왔습니다.”
“장관님의 수행비서가? 웬만한 일이 아니라면 이채규 부회장님한테 연락을 했을 텐데.”
“서재만 부회장이 장관님께 직접 미팅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호오.”
재만과의 미팅을 앞두고 그 사실을 내게 알렸다는 것은, 현섭은 온전히 내 편을 들 것이라고 시사하는 것과 같았다.
“장관님께 들을 재밌는 일화가 하나 생기겠군.”
재만이 무슨 꿍꿍이로 현섭을 만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수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진태가 공을 들여 금품 청탁을 해왔고, 그 장부를 내가 이어받았다.
그러고도 채규는 현섭에게 협박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장관이 된 이후 청탁하는 금액을 높였다.
게다가 퇴임 후에 보장된 자리까지.
재만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현섭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
현섭이 미팅 장소로 잡은 곳은 여의도에 위치한 한식집으로, 별실조차 없이 오픈된 공간이었다.
식당 전체를 대관한 것인지,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이런 곳을 선택한 이유야 뻔했다.
한국 1위 기업의 총수가 요청을 했으니 미팅은 해주지만, 은밀한 얘기를 주고받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미팅 장소가 이런 곳이라는 걸, 식당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재만은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현섭은 부총리를 겸하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아니던가.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부재할 경우에,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높은 자리였다.
그동안 사람을 시켜 현섭에게 금품청탁을 계속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심지어 범준의 사건이 터지고 언론사를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막혔는데, 알고보니 배후에 현섭이 있었다.
자신의 압박에도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는 기사가 몇 개 터지기도 했었는데, 그 배후에도 현섭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재만의 추측이었다.
현섭이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배척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 정권 안에서 현섭은 막강한 권력자였다.
아군으로 끌어들이진 못해도 적어도 척을 지진 말아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재만은 굳게 다짐을 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현섭이 손짓으로 재만을 불렀다.
태선전자의 부회장을 저따위로 부르는 사람은 현섭 말고는 없으리라.
재만은 불쾌감을 숨기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차현섭 장관님.”
“살다 보니 서재만 부회장님께 영광이라는 말도 들어보고, 제가 헛되이 살진 않았나 봅니다? 허허.”
“하하….”
재만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현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각하께서 기업규제를 풀면서 요새 살만하시겠습니다?”
“네? 뭐….”
정권이 바뀐 뒤, 그동안 재계가 주장해 온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수도권 공장증설을 위한 규제 완화 등 벌써부터 재계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태선전자도 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최근 주가가 소폭이나마 회복하고 있는 중이었다.
재만은 그전에 합병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범준의 일이 터지고 나서 잠시 시간을 벌고 있었다.
현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반응이 영 시원찮네요. 만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충분히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회장님 아들놈은 왜 그런 짓을 벌였답니까?”
“...예?”
재만은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다른 사람 입에서 ‘아들놈’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서범준 말입니다, 서범준. 아들 이름도 까먹으신 건 아닐 테고. 그 자식 때문에 각하께서도 골머리를 앓고 계시지 뭡니까.”
“그게 무슨…”
“각하께서 경제 한번 살려보고자 규제들을 풀어나가고 있는데, 정경유착이 아니냐, 서울시장 시절, 태선전자에 개입한 게 아니냐. 뭐 이딴 소리를 듣고 있어야 되냐, 이 말입니다.”
그제야 재만은 오늘의 자리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현섭은 지금 재만을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태선전자의 총수인 재만에게.
재만은 모멸감과 분노로 속에 천불이 날 지경이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 아들 교육을 잘못시킨 제 잘못입니다.”
“그게 부회장님 잘못이라면 벌도 부회장님이 받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자식에게 다 뒤집어씌워서 감방 보낼 게 아니라.”
“...분명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책임이 맞지만, 제게 법적인 책임은 없습니다.”
“전부 아들놈이 한 짓이다?”
“...예.”
현섭은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재만을 바라봤다.
재만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쥐어짜며 말했다.
“저한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장관님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라도 있던가요? 있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반드시 고쳐나가겠습니다.”
“부회장님. 제가 처음 입당했던 25살에 처음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정관수술입니다. 정치질은 하면 할수록 못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자랄 자식새끼들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현섭은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어 도무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제 보니 기업가도 똑같습니다? 부회장님을 보니 그때 제 결심이 옳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부회장님도 정관수술을 받으셔야 됐습니다. 흐흐.”
재만은 견딜 수 없는 모멸감으로 침잠했다.
살아생전 이따위 모욕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각오를 하고 속에 있던 말을 뱉었다.
“장관님을 뵙고 이 나라를 위한 참다운 정치경제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렇게 유치한 분이실 줄 몰랐습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듯하군요.”
“참다운 정치경제적인 대화요? 푸하하!”
현섭이 터트린 웃음은 한 톨의 가식도 없어 보여서 비웃음인지, 진짜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재만은 식당에서 빠져나왔다.
***
스마트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모바일 뱅킹은 주류가 된다.
그렇다고 아직 모바일 뱅킹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인터넷뱅킹에 비해 이용자 수는 월등히 낮지만, 현재도 모바일뱅킹은 있었다.
종류는 두 가지로, 우선 수년 전 출시한 ‘칩 뱅킹’은 은행에서 발급받은 IC칩을 휴대전화에 끼워서 이용하는 것으로 카드를 대체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이를 보완해 작년에 등장한 것이 ‘VM 뱅킹’.
VM 뱅킹은 별도의 칩이 없어도 2G 통신망을 이용해 모바일뱅킹이 가능했다.
내가 오늘 찾아갈 벤타은행은 모바일뱅킹 중 ‘VM 뱅킹’을 메인사업으로 잡은 유일한 은행이었다.
다른 은행이 주저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VM 뱅킹을 실현시키고 투자받은 곳이었다.
그리고 2015년에 수많은 비리 계좌가 개설되고 비자금 형성에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 발각된 은행이기도 하다.
그 당시, 일이 터지고 나서 돌았던 풍문이 있다.
VM 뱅킹이 탈세와 비자금 조성, 각종 로비금을 보관하는 데 탁월했다는 것을.
VM 뱅킹의 비리 계좌가 발각되고 나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바로 재만.
재만은 벤타은행의 VM뱅킹 시스템을 이용하여 약 2천억 원 상당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뇌물수수 혐의를 받았었다.
벤타은행이 VM 뱅킹을 시작할 때쯤 재만이 투자자로 나타났다고 하니, VM뱅킹의 시작이 재만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있었다.
물론 재만은 교묘히 수사망을 빠져나갔고, 결국 의혹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아직 VM뱅킹이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고, 정보를 은닉할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벤타은행의 대표를 찾아가 재만의 계좌정보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주목받았던 또 다른 인물은 정재계 인사들의 자재들만 다닌다는 명문사립 고등학교인 새천년 고등학교의 이사장, 최성표였다.
최성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즉 일제감정기에 일제에 협력하며 부를 쌓아온 집안 출신이었다.
집안 내력인지, 성표는 학부모 재벌들에게 받은 리베이트와 불법 투자정보를 통해 쌓은 부가 상당했다.
성표가 부적절한 방법으로 축적한 부를 보관했던 곳이 벤타은행의 VM 뱅킹이었다.
재만과 달리 성표는 수사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징역을 살게 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거기에 그쳤다면 알아서 망하게 될 인물이니, 굳이 성표를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표는 현재 태선AA의 주식을 3프로 보유한 인물이었다.
재만과 같은 은행의 VIP들끼리 접촉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가 갖고 있는 태선AA의 지분이 결코 정당하게 획득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과도한 기업평가를 받고 있는 태선AA의 주식에 투자할 이유도 없다.
거기에 더해 이미 재만이 독점하고 있는 태선AA의 지분을 3프로나 매수하기는 불가능하다.
‘재계 인사들의 자재들만 다니는 학교의 이사장이니, 재만에게 소개해주는 조건으로 지분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지.’
벤타은행의 은행장에게 재만과 성표의 정보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당연하게도, 은행장 입장에서는 꺼릴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벤타은행의 은행장을 구워삶는 법은 간단하다.
돈을 맡기면 된다.
거절할 수 없을 만큼의 아주 많은 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