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서재만 부회장님이 저를 배신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컵에 보리차를 따라 마시고 답했다.
“애초에 신뢰 없는 관계 아닙니까?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을 위해서 이사장님께 지분을 준 것인데. 합병이 어그러진다면 그 지분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제 명의로 된 지분을 어떻게 하다니요. 아무리 서재만 부회장이라 해도 강탈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사장님. 그 자리 유통기한이 멀지 않은 것 알고 있습니다. 이건 이사장님도 알고, 서재만 부회장도 아는 사실이지요.”
국민연금공단의 이사장은 길게는 4년에서 5년, 짧게는 1년 정도로 정권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올해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여환의 이사장직도 아무리 길게 봐야 올해 안에 끝난다는 소리였다.
“몇 년을 더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합병 한 번만을 위해 3천억 원이 넘는 지분을 이사장님께 쥐여줬을 것 같습니까?”
“그럼….”
“합병이 끝난 뒤 모든 비리 과정을 이사장님께 뒤집어씌우려는 겁니다. 그걸 위한 지분을 이사장님께 쥐여준 거고요.”
꽤나 충격받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여환은 덤덤해 보였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부회장님이야 별거 아닌 돈이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감옥 한 번 가는 대가로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이 들어오는 겁니다.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정이 상당하신 걸로 압니다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여환은 미국에서 폴로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아들을 보러 1년에도 몇 번이나 미국으로 갔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애처가라는 것은 깊게 조사하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처자식을 두고 감옥으로 가는 게 아무렇지 않다고?
“...고작 몇 년입니다. 길어야 3년만 버티면….”
“서재만이 그렇게 말하던가요? 3년만 버티면 빼내 줄 거라고?”
“이런 자리에서 말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차를 세 번 갈아타셨고, 이동시간만 5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오신 이유는,”
여환은 눈꺼풀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사장님도 불안하셔서 그런 거겠지요.”
“....”
“현재 서재만 부회장이 진행하는 합병은 엄연한 비리 행위이며, 주가조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가조작의 형량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후. 우리나라는 경제사범에 관대한 편입니다. 미국에서야 수십 년 형도 그냥 때리지만, 우리나라는 주가조작 처벌이 세지 않습니다.”
“조 단위를 움직였는데 정말 괜찮으리라 생각하십니까? 판례는 없지만, 그 정도 금액을 움직였다면 현재 법상으로만 최소 6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됩니다. 만약… 서재만 부회장이 의도적으로 이사장님을 주범으로 몬다면 그 이상이 되겠고요.”
여환이 테이블을 짚고 벌떡 일어났다.
“아까부터 서재만 부회장님이 저를 배신할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그 근거가 뭐냐는 말입니다!”
“앉으세요.”
“....”
“소리 높이지 마시고요.”
여환이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자리에 앉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여환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제가 반대로 물어보겠습니다. 서재만 부회장이 이사장직을 내려놓은 당신을 돕겠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건… 합병만 하게 되면 얻게 되는 이득이 얼만데. 저 하나 빼내는 게 큰 문제겠습니까…?”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그게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사장님 스스로도 아시지 않습니까?”
“....”
“합병에 반대하세요. 그게 이사장님이 살길입니다.”
“그게 무슨…. 제가 가지고 있는 지분이라고 해봐야 겨우 7프로입니다.”
“아뇨.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면요.”
주식매수청구권은 합병에 반대하는 의사를 가진 주주가 합병 이전에 자신이 소유한 주식의 매수를 기업에게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여환이 합병에 반대한다면, 재만은 여환의 지분을 매수해야만 한다.
여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반대의사를 밝힌 순간 서재만 부회장은 저를 죽이려 들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서재만 부회장이 주식을 매수한 뒤 합병을 진행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현재 재만이 주가를 올릴 대로 올려놓은 태선AA의 시가총액은 약 6조 1100억 원이었다.
여환의 지분 7프로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약 4300억 원이다.
여환의 생각은 재만이 고작 그 돈을 못 내겠냐는 뜻이었고.
“태선AA의 주가를 올릴 때는 좋았겠죠. 그만큼 자신의 몫이 커지는 거니까. 하지만 결국 그것이 서재만 부회장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현재 재만이 공식적으로 갖고 있는 태선AA의 지분은 15프로밖에 되지 않는다.
범준 명의의 지분은 10프로로, 공식적으로는 두 사람이 합쳐서 25프로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공식, 그러니까 재만이 차명으로 갖고 있는 지분은 약 40프로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돈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돈이다.
서범준이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돈을 메꾸고, 중국계 투자회사에 빌린 돈을 갚는 과정에서 재만은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썼다.
차명으로 쥐고 있던 주식도 조금 처분했고.
그런 상태에서 여환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다면, 합병을 취소하거나 불법적으로 마련한 비자금을 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은 차명으로 된 주식과 비자금이 재만의 것이라는 증거가 없지만, 재만이 여환에게 돈을 지급하기 위해 그 돈을 꺼내게 된다면.
“저는 서재만이 불법적으로 마련한 비자금과 차명으로 갖고 있던 주식을 회수하는 순간을 잡아낼 생각입니다.”
여환이 이채가 도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제 목표는 이번 합병을 막으려는 것만이 아닙니다. “
그리고 이건 재만을 태선전자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첫 번째 목표가 바로 재만의 차명주식 들을 모두 양지로 꺼내는 것.
“저는 서재만을 부회장 자리에서 끌어내릴 생각입니다.”
여환에게는 나쁠 것 하나 없는 제안이었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도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잃게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가 주식매수청구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돈이 무려 3천억 원이 넘는다.
굳이 재만을 지지하며 감옥에 갈 위기를 감수하지 않고도 말이다.
재만과 꽤 오랜 기간 유착했지만, 나와의 대면은 오늘이 처음.
여환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고민에 잠겼다.
길게 이어진 침묵 끝에 여환이 입을 열었다.
“자신… 있는 겁니까?”
“저는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들 중 그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없습니다.”
“...며칠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이라.
“자기 아들도 감옥에 가는 걸 막지 않은 사람입니다. 과연 이사장님이 그 아들보다 소중한 사람이겠습니까?”
“서범준 사장은 어쩔 수 없이…”
“아뇨.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재만이 이번 합병과 태선전자의 우호지분을 만들기 위해 썼던 로비금만 수천억 원이 넘을 것이다.
합병을 포기하고 그 돈을 돌려서 정계와 법조계에 먹이고, 언론사에 광고를 뿌려 댔다면 정말 막지 못했을까.
결국 재만은 자신이 태선의 회장이 되기 위해 아들까지 저버린 것이다.
나라는 경쟁자가 없었다면 결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겠지만… 그런 사람인 거다.
여환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주총회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 될 겁니다. 만약 시기가 늦는다면… 저도 이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여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저희 직원 번호입니다. 생각 정리되시면 연락하세요.”
물끄러미 명함을 바라보고 있는 여환을 뒤로하고 별장을 나왔다.
***
냉기가 감도는 늦은 새벽.
여환의 집으로 재만이 찾아왔다.
잠옷을 입고 대문으로 나온 여환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와이프도 자고 있는데….”
“오늘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예…? 그게 무슨. 설마, 사람이라도 붙인 겁니까?”
재만이 여환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이사장님도 아실 거 아닙니까. 말씀해주시죠.”
“하… 사람 붙였으면 알 것 아닙니까. 등산복 입고 나간 거 뻔히 알 텐데. 산 좀 타다 왔습니다.”
“산타러 간 사람이 차를 갈아탄 겁니까?”
“....”
아무래도 재만이 제대로 냄새를 맡고 온 모양이었다.
평소에 여유롭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초조한 기색이 눈에 띄었다.
여환은 떨리는 기색을 최대한 감추고 담담하게 말했다.
“예전 구의원 시절에 알던 지인 차를 타고 같이 움직인 겁니다. 산속이라 연락이 닿지 않은 거고요. 제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됩니까?”
“지인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환이 한숨을 깊게 내신 뒤 한쪽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불쾌하네요. 제가 부회장님 밑의 사람입니까? 이런 식의 방문도 그렇고 선은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재만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연락도 안 되시고 사라지시니 제가 예민했나 봅니다.”
“그럴만 하죠. 아드님도 그렇게 됐으니…. 아직 재판 중이잖아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범준은 1심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그것도 횡령한 금액을 모두 회수시키고 일부 횡령 사실에 대해 자백함으로써 감형한 것이었다.
“...아무리 줄여도 최소 5년 형은 받게 될 겁니다.”
“실형은 피할 수 없는 겁니까? 제가 법원행정처장과 조금 연이 있는데…”
“제 아들입니다. 이사장님께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
“오늘처럼 연락 안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괜히 이사장님 의심하지 않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곧 다시 뵙도록 하죠.”
“예. 들어가시지요.”
여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재만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환을 잠깐 바라보던 재만은 흘깃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재만이 검은 세단을 타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여환은 참아왔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후아…. 저런 미친 자식을 지금까지 믿고 있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범준은 재만의 아들이 아니던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자식까지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일이든 못할까.
여환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뒤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여보! 일어나 봐!”
“으응…?”
아내가 눈을 비비며 여환을 바라봤다.
“당신 핸드폰 어딨어?”
“저기 서랍 열어 봐… 당신 무슨 일 있어?”
“아니야. 다시 자.”
여환은 반쯤 감긴 눈을 하고 있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서랍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강빈에게 받은 명함에 적힌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