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창혁과 조우한 다음날, 내가 찾아간 곳은 태선물산이었다.
새로 창업해야 할 회사가 두 개가 생겼기 때문이다.
채규는 태선경연에서 수십 년간 인력을 관리해왔고, 태선그룹의 계열사 창업에 앞장서 왔다.
주변에서 조언자의 역할을 맡기에 채규만 한 사람이 없었다.
“우주산업과 모바일메신저라고 하셨죠.”
“예. 모바일메신저의 대표는 정해졌습니다만, 우주산업은 이제 시작입니다. 차스유즈와 소송전쟁을 벌여야 되니, 윤곽을 잡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고요.”
중국어가 되면서 투자자로 훌륭한 안목을 갖고 있는 준희를 중국으로 출장을 보낸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준희는 발 빠르게 움직이며 차스유즈에게 소송이 걸렸거나, 특허권 관련 시비가 걸려오는 우주산업 관련 중소기업들을 찾아다녔다.
모두 신광마그넷의 사례처럼 차스유즈의 횡포로 기술이 뺏길 위기에 처한 것들이었다.
로켓과 엔진의 성능이나 항행 측위, 위성통신 방송, 유인 우주선 등 우주 산업 안에서도 분야가 다양했다.
눈 뜨고 기술을 뺏길 위기에 처한 기업들은 제값을 쳐주겠다는 준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윤길처럼 아예 회사째로 태선로드에 입사하길 희망하는 곳도 꽤 많았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 이후, 이제 남은 것은 차스유즈와의 소송전쟁에서 이기는 것 뿐이다.
GB인베스트먼트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법무법인 앤 무어가 차스유즈를 상대로 15건의 소송을 동시에 걸었다.
애초에 기술의 주인이야 명명백백하니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한 사실.
중소기업들이 당해왔던 이유는 소송기간이 길어지면 손해가 막심해지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해서지, 끝까지 가면 질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돈이야 차고 넘치고, 앤 무어만큼 법정에 능한 기관은 없습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모두 이기고 저희 태선만의 독자적인 우주탐사기업을 만들 겁니다.”
채규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모습이 꼭 전대 회장님 젊을 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젊을 때의 진태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늙어서도 늘 호승심에 불타올랐던 그를 보면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금의 나처럼 돈 되는 것들은 모조리 손에 쥐려고 했겠지.
“넘어서야죠. 저는 할아버지보다 욕심이 많거든요.”
“지금처럼만 나아가시면 뭔들 못 하시겠습니까.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전력을 다해 부회장님을 지원하겠습니다.”
“그것 참 든든한 말이군요. 이런 분을 곁에 둔 것을 보면, 제가 전생에 복을 많이 쌓은 모양입니다.”
순간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전생을 운운하는 게 스스로 웃겨, 헛웃음이 나왔다.
채규는 펜을 들어 종이에 슥슥 적어나가며 말했다.
“우주산업이 얼마만큼의 자본 규모는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실험대로 올릴 부지도 꽤 넓어야 할 테니 알아봐야겠군요. 시설도 매입하는 방향보다 저희가 직접 지어야 할 것 같고요. 현지 상황은 제가 여준희 전무와 직접 연락하면서 파악하겠습니다.”
“예. 해야 될 게 많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보다 미래를 생각해 투자하는 거니까요. 당장 급한 건 모바일메신저입니다.”
아이폰 출시까지 앞으로 약 1년 반이 남았다.
그때에 맞춰 출시하려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채규는 고민하는지 시선을 잠시 내렸다가 다시 들어올렸다.
“건물은 강남구 안에서도 당장이라도 임대하거나 매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시설은 GB타워가 아니겠습니까? 여분의 층이 꽤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GB인베스트먼트의 규모는 더 커질 겁니다. 본사 직원도 충원해야 되고요. 30층 위로는 전부 GB인베스트먼트로 채울 예정입니다.”
GB인베스트 뿐만 아니라, 창혁이 창업할 모바일메신저, GB톡도 빠르게 성장해 나갈 것이다.
전생에서 다카오챗이 성장해 나갔던 속도를 생각하면, GB톡도 결국 독자적인 건물이 필요하다.
“그렇군요. 건물 면적을 따져야 하니 그럼 이번 주 내로 오창혁 대표와 미팅을 잡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범준의 태선전자 횡령과 관련해 두 달 전, 전문 수사팀이 꾸려진 이후 어제 검찰은 범준을 소환해 조사했다.
밤샘 조사 끝에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나타난 범준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횡령한 규모가 얼마나 되냐, 직원복지 명목의 자금에 손을 대놓고 죄책감은 없느냐 등 여론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범준은 묵묵부답이었다.
재만은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 억울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긴 했지만 말이다.
“실형을 사는 건 피할 수 없겠죠?”
“예. 업무상횡령죄는 단순횡령죄보다 2배는 가중처벌을 받게 되니까요. 게다가 50억 원 이상이면 무기 징역 아니면 5년 이상의 징역입니다. 300억 원 이상이면 가중처벌을 받고요.”
실제로 5년 전쯤 태선전자의 자금을 관리하던 과장이 500억 원을 횡령해 주식투자와 유흥에 사용했는데, 이때 선고받은 징역이 13년이었다.
그게 정말 그 팀장이 횡령한 것인지, 재만의 지시로 대신해서 잡혀간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범준은 이번에 아예 장부 기록과 차명계좌 등 명백한 증거들을 남겼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고 잡혀가게 된 것이다.
“징역을 낮출 수도 있습니까?”
“투자금뿐만 아니라 직원복지비에도 손을 댔으니 여론이 최악입니다. 횡령죄의 처벌을 낮추려면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 수십만 직원이 피해를 봤으니 피해자를 특정할 수나 있겠습니까? 형량을 낮출 수단은 많지 않을 겁니다.”
채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나라 법률에 따라 범준은 3심제에 걸쳐 최대한 실형을 낮추려고 발버둥치겠지만, 최소한 5년 이상의 징역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면, 재만이 쌓아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충분한 시간.
범준은 징역을 다 살고 나와도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평생을 범법자로 살며 죽지 못해 살아가게 만드는 것.
그게 내가 계획한 최고의 복수였다.
그러기 위해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홍여환 이사장과 만나야겠습니다.”
현 국민연금공단의 수장을 맡고 있는 홍여환.
그가 재만을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다.
채규가 안경다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장부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저는 홍여환 이사장한테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생각이거든요.”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해보도록 하지요. 부회장님이 직접 만나실 생각입니까?”
“예. 서재만 부회장이 사람을 붙일 테니, 접선 장소도 적당한 곳으로 알아봐 주십시오.”
채규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접선 장소는 강원도의 한 이름 없는 산에 지어진 별장이었다.
초입에서 20분 이상 걸어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채규의 조카 명의라고 하는데, 진태가 10년도 더 전에 접선 장소로 만들어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기본적인 가구들은 잘 갖추어져 있었으나,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었고 물탱크는 텅 비어 있어 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버려진 별장이었고 외부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사장은 언제 온대?”
영균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답했다.
“지금쯤 평창에 있을 겁니다. 홍천으로 되돌아가서 저희 쪽 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려면 1시간쯤 걸립니다.”
재만의 눈길을 피해 만나느라, 여환은 강원도 전역을 누비며 재만이 보낸 사람들의 미행을 떨칠 것이다.
홍천에서 영균이 보낸 차를 타고 별장이 있는 산에 도착한 뒤에는 나와는 다른 산로로 별장에 올 예정이었다.
“조금 기다려야겠네. 차 실장도 그동안 차나 한잔하지.”
“아닙니다. 혹시 모르니 주변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재미없긴.”
영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별장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여환은 등산복 차림에 정글 모를 푹 눌러 쓰고는 나타났다.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 앉으시죠.”
일어서지도 않은 채 맞이하는 나를 보고 여환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를 이런 곳으로 불러내신 이유가 뭡니까?”
“그럼 이사장님은 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같은 맥락입니다.”
“....”
“우선 앉으세요. 할 얘기가 많습니다.”
여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짧게 차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된 목재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원한 보리차입니다. 더위를 식히는데 이것만 한 게 없죠.”
보온병에서 얼음이 부딪히며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컵에 가득 따라서 여환 앞으로 내밀었다.
여환은 정글모를 벗고는 한 손으로 땀을 훔친 뒤에 컵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나이 먹고 산을 타는 게 꽤나 힘들었는지 단숨에 컵을 비웠다.
“한 잔 더 하시죠.”
그의 잔에 다시 보리차를 가득 붓자 여환이 손사래를 쳤다.
“이제 괜찮습니다. 충분히 마셨어요.”
“마시세요.”
“....”
내 말투가 강압적이어서일까, 여환이 흠칫 몸을 떨고는 컵을 다시 쥐었다.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컵을 비웠다.
그리고 나는 그의 컵에 다시 보리차를 채웠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여환이 컵을 들고는 손을 덜덜 떨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더위에 산을 타고 마시는 시원한 차 아닙니까.”
“충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속이 시렵지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선선했을 산의 공기가 이제 으슬으슬할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이사장님이 지금 하고 계신 행보가 과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태선그룹의 지분, 9프로를 국민연금공단이 소유하고 여환이 기관의 수장을 맡게 되면서 온갖 청탁이 들어왔을 것이다.
재만에게 받은 태선AA의 지분 7프로도 마찬가지고.
“이사장님이 갖고 계신 태선AA의 지분 말입니다. 그거 서재만 부회장한테 받은 거 아닙니까.”
재만의 차명으로 된 태선AA의 지분 중 7프로가 경영목적상 신탁이라는 탈을 쓰고 여환의 명의로 넘어갔다.
말이 신탁이지, 신탁회사도 아닌 여환에게 대가 없이 지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점을 꼬집은 것인데, 여환은 오히려 자신감 있게 말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이시는 겁니까? 그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서재만 부회장이 이사장님한테 면종복배(面從腹背)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오늘, 여환이 재만을 배신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