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에릭이 서류철을 들고 내 집무실로 찾아왔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전망 죽이네요.”
에릭의 말에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집무실이자, GB타워의 최상층인 이곳은 8면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일자형 통유리가 벽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 누구 집무실인데 평범하게 했을까?”
“예, 예. 대표님 집무실은 최고로 만들어야죠. 흐흐. 제 방도 만만치 않습니다.”
“꽃에 물은 주냐?”
“아침마다 줍니다. 너무 많이 줘서 시들진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요.”
“먼저 물어보길 잘했네”
GB타워가 지어지기 전, 에릭과 준희에겐 따로 요청사항을 받은 바가 있었다.
에릭은 온실과 개인 영화관을 원했기 때문에 온실은 에릭의 집무실 옆에, 개인영화관은 복합시설물로 운용하고 있는 29층에 만들어줬다.
준희의 경우는 수면실을 원했는데, 샤워장까지 추가해서 그의 집무실 안에 지어줬다.
에릭의 서류철을 내게 내밀었다.
“이번 분기 국내 투자처 분석하고 괜찮은 곳 명단 뽑아온 겁니다. 상단에 노출될수록 투자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곳들이에요.”
목록을 주욱 훑는데, 하단에서 익숙한 회사 이름이 눈에 띄었다.
마이톡톡.
현재는 PC를 기반으로 메신저를 메인 사업으로 삼고 있지만, 2010년부터 스마트폰용 메시지와 음성통화 서비스를 메인으로 하는 스타트업이었다.
‘결과는 별로 좋지 못했지만.’
마이톡톡은 한국인 95프로 이상 사용한다는 다카오챗에게 밀려 결국 인수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기업이었다.
다카오챗은 애초에 IT 관련 대기업 출신 20명이 만든 기업이어서 투자할 명분이 없었다.
인터넷 업계 스타 최홍수를 간판으로 내세우며 이미 충분한 투자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런 반면 마이톡톡은 투자를 받지 못해, 기술개발에 큰 난항을 겪고 있을 것이다.
다카오챗과 상당히 흡사한 마이톡톡이 망하게 된 까닭이 있었다.
배터리 문제나, 간소화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장 선점이 다카오챗보다 느렸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부족한 투자금으로 인해 시장진출이 느려졌고,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아이폰이 스마트폰 시장을 열고, 한국에 상륙했던 시기가 2009년 11월이었다.
다카오챗을 개발한 기업, 아이온리는 아이폰을 보자마자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고 4개월 뒤, 다카오챗을 출시해 대박을 터트렸다.
그런 반면 마이톡톡이 모바일 메신저 시장에 진출한 것은 다카오챗이 출시된 지 5개월 뒤인 2010년 8월이었다.
5개월동안 다카오챗은 시장을 독과점 하다시피 지배했고, 후발주자인 마이톡톡이 TV 광고까지 내보내도 따라잡기 힘든 격차였다.
그렇게 망했던 기업이 에릭이 건넨 명단 속에 있었던 것이다.
‘만약 마이톡톡이 다카오챗보다 훨씬 먼저 출시된다면?’
당시에 마이톡톡과 다카오챗은 몰랐던, 아이폰의 시장진출 시기를 나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다카오챗을 만드는 데 주요 공헌을 했다는 수석 개발자 오창혁이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마이톡톡이었다.
창혁이 마이톡톡의 연이은 실패에 실망해서 이직한 곳이 바로 다카오챗이었다.
궁금해졌다.
아이폰의 출시 시기를 알리면서 마이톡톡의 출시일을 다카오챗보다 앞당길 수 있을지.
“마이톡톡 대표랑 미팅 잡아.”
***
마이톡톡은 비록 서울 외곽에 있었지만, 10층이 넘는 건물이 통째로 소유하고 있었다.
인터넷 메신저를 내며 초대박을 터트린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영미권 시장에서 공유 사이트를 내보이며 망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벌이는 프로젝트마다 족족 말아먹었기 때문에 마이톡톡은 현재 피 말리는 심정일 것이다.
웹사이트 수준이라 투자 비용이 낮아서 다행이지, 만약 제품 제조 업계에서 이만한 패착은 도산 위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곧장 11층에 있는 대표실로 찾아갔다.
마이톡톡의 대표, 유진홍은 짙은 갈색 피부에 눈썹이 얇은 게 특이한 인상이었다.
“부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대표라고 불러야 할까요? 허허. 워낙 대단하신 분이 제 앞에 계시니 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홍이 과장스럽게 웃어 보였다.
“대표라고 부르시죠. 오늘은 투자를 위해서 온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따뜻한 커피로 하죠.”
“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진홍은 대표실 한 켠에서 직접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왔다.
“예가체프산 커피입니다. 미국에서 딸아이가 보내오더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향이 산뜻하고 적당한 산미가 있어 맛이 좋았다.
진홍이 먼저 본론을 꺼낼 때까지 적당히 즐기기에 훌륭한 커피였다.
진홍은 뜸을 들이다가 내가 먼저 얘기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결국 입을 열었다.
“저… 투자 말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일단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마이톡톡이 다카오챗을 넘어 가장 먼저 한국 모바일 메신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인물.
“마이톡톡의 수석개발자 오창혁 씨가 마이톡톡에 최소 5년은 잔류해야 된다는 게 조건입니다.”
“그… 오창혁 부장은 이번 달 말 퇴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의견이 너무 확고해서….”
“그분이 없으면 제가 투자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마이톡톡의 PC 메신저를 만들어낸 주역도 오창혁 씨 아닙니까?”
“그건 맞지만 워낙에 확고해서요…. 아! 대신 이번에 미국의 프로 메신저의 개발 팀장을 맡았던 조지 프롤 씨를 영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창혁이 없다면 더 이상 마이톡톡에 미련은 없었다.
게다가 프로 메신저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지금이야 유망한 기업일지 몰라도, 전망이 없는 곳일 테다.
그런 곳의 개발 팀장은 내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 저희가 할 얘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 서대표님! 일단 저희 회사의 비전부터 먼저 들어보시고.”
창혁마저 없는 마이톡톡이 과연 다카오챗보다 먼저 모바일 메신저를 출시할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이다.
확신이 없는 도전은 내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
“만약 재계약에 성공하시면 그때, 연락 주십시오.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벙찐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홍을 뒤로하고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일주일 뒤, 창혁이 직접 GB타워로 찾아왔다.
직급이 부장인데다가, 고작 2년 뒤에 다카오챗을 독과점기업으로 키워낸 주역이기 때문에 꽤 나이가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완전히 내 착각이었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는 창혁의 얼굴은 풋풋한 20대 청년이었다.
아무리 동안이라고 쳐도, 30대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얼굴.
“저… 초면에 실례지만 나이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22살입니다.”
“...젊은 나이에 부장 자리까지 달다니 능력이 출중하신가 봅니다.”
“서강빈 대표님도 제 나이 때 이미 성공한 투자자시지 않았습니까. 나이는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희 대표님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없으면 마이톡톡에 투자하지 않겠다면서요.”
역시 젊은 나이라 그런지 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왔다.
“예. 분명 그런 말을 전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보다시피 저는 어리고, 대학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창혁을 그저 다카오챗을 개발한 인물로만 알고 있었지, 어떤 인물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마이톡톡의 PC메신저를 개발한 사람이 창혁 씨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해 개발한 겁니다.”
“....”
천재는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며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에서 개발 쪽으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아니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는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중국인들조차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더군요. 그래서 메신저를 개발한 거고요.”
“....”
“저는 서강빈 대표님의 투자를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마이톡톡에 그대로 남아 계신다면 제가 투자할 텐데요. 창혁 씨가 조건이니 연봉도 꽤 높아질 겁니다.”
창혁이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이톡톡에 남고 싶지는 않습니다. 거기 대표가 완전 꼰대마인드라 개발 방향을 정해주거든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개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럼 창혁 씨가 원하는 건 제가 개인 투자를 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창업을 할 겁니다. PC메신저에 한정 짓지 않을 거예요. 지금처럼 사적인 메신저뿐만 아니라 대학교, 직장에서 쓸 수 있는 메신저를 만들 겁니다.”
창혁의 눈에는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단순히 젊어서 치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릭이 내 자금을 바탕으로 투자를 시작한 게 저 나이 때였으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성공할 수 있느냐, 마냐 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창혁이 스마트폰 출시 이후 4개월 만에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내고 초대박을 터트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혁은 반드시 잡아야 되는 인재였다.
“창혁씨. 만약에 말입니다. 곧 컴퓨터 지원 기능을 추가한 휴대전화가 나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만약이 아닙니다. 머지 않아 그런 시기가 올 거예요. 태선전자에서도 지금 개발하느라 혈안이지 않나요? 기사 몇 개만 봐도 알겠던데.”
역시 천재의 생각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창혁은 이쪽 분야에 관해선 천부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휴대폰이 내년 말에 출시된다고 칩시다. 메신저 시장에는 어떤 변화가 있겠습니까?”
창혁이 벌떡 일어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개발이 되는군요! 태선그룹의 중추에 대표님 정도 되는 분이 허언을 하실 리 없습니다. 내년 말에 컴퓨터 기능을 갖춘 휴대폰이 출시가 되는 거죠?”
어린 애를 더 속여봤자 무엇 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헐.”
창혁이 입을 크게 벌렸다가 다물며 말을 이었다.
“저라면 당장 개발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리 컴퓨터 기능을 갖췄다지만 휴대폰이 기존 컴퓨터만큼의 성능을 내긴 힘들겠죠. 그에 맞춰서 저용량으로도 시동 가능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돼요. 지금 PC보다 기능 면에선 떨어지더라도, 배터리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실 수는 있고요?”
천재라 할지라도 애는 애다.
약간의 도발만으로도 창혁은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예. 무조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장비와 인력만 갖춰지면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200억 원과 건물 한 채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 한도에 맞춰서 장비와 인력을 갖추세요.”
다카오챗이 출시되기까지 100억 원의 초기 투자금이 들었다고 한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초기 투자 비용으로는 이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창혁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투자 진행하실 때 망설임이 없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사실이네요. 그 돈이면 가능합니다. 적어도 그런 휴대폰이 출시되고 한 달 내로는 시장에 내놓을 수 있을 거예요.”
자신감이 꼭 젊은 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오창혁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