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준희는 뒤늦게 GB타워에 도착했다.
에릭과 함께 오고 싶긴 했지만, 부모님을 뵌 지 근 3년은 되었기 때문에 본가에 먼저 다녀오는 길이었다.
“캬!”
겨울이어서 해가 일찍 저물었는데, GB타워는 노란빛을 머금고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다.
“여기가 이제 내 직장이란 말이지.”
천억 달러, 한화로 따지면 백조 원이 넘는 자금을 움직이는 GB인베스트였지만, 준희가 근무하고 있는 건물은 고작 5층짜리 건물이었다.
세계 곳곳에 지사를 내고, 미국에서도 많은 지사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본사 자체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GB인베스트먼트의 본사가 이제 65층에 달하는, 이런 예술적인 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준희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쉽게도 꼭 참여하고 싶었던 준공식은 정오가 조금 지난 뒤 끝났다고 했다.
투자를 마무리 짓느라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게 아쉬웠다.
그래도 강빈과 에릭은 GB타워의 상부에 있는 GB인베스트먼트의 본사를 둘러보고 있다고 하니 아쉬움을 달랠 수는 있었다.
“응?”
입구를 지나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대표님을, 서강빈 대표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대표님이라면 분명 저희 기술의 가치를 알아봐 주실 겁니다!”
장발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성이 경비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경비원은 곤란한 기색으로 남자를 타이르고 있었고.
준희가 경비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 여준희 전무이사님!”
경비원은 GB인베스트먼트의 임원에 대한 정보를 미리 받았는지, 준희를 알아보고 황급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전무이사’라는 말에 준희를 힐끔 보고는 경비원의 팔을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경비원이 그런 남자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 하, 자신이 기업 대표인데 서강빈 대표님을 뵙게 해달라고 5분이나 이러고 있습니다.”
준희는 남자를 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회사에 투자를 바라신다면 절차를 먼저 밟으세요. 이렇게 찾아와서 매달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공식 이메일로 메일을 수십 통을 보내봤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하다못해 대표님이라도 직접 뵙고 거절당하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준희는 한숨을 불어 넣었다.
수십 번이나 거절 메일을 받고도 당당하게 GB타워까지 찾아와서 강빈을 찾는 이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윤길 대표님 맞으시죠? 기업 이름이 신광마그넷이었던가, 하는.”
“어, 알고 계십니까? 예! 제가 신광마그넷의 대표 김윤길입니다!”
“하…. 3년 전 김윤길 대표님께 처음 메일 받은 사람이 저입니다.”
3년 전, 윤길은 자신의 회사에 투자를 해달라는 명목으로 GB인베스트먼트에 메일을 보냈다.
신광마그넷에서 서류가방 크기의 초강력 자석을 만들고 있다면서 말이다.
윤길은 이 자석을 만드는 기술을 ‘차세대 워크홀딩’이라 이름 붙였다.
그 당시, 차세대 워크홀딩은 1초 미만의 순간 전류만 흘려도 수십 톤의 물체를 끌어당길 수 있는 자석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해제 후에는 자력이 전혀 남지 않고, 크기도 서류 가방 정도로 휴대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말이다.
처음에 그 투자계획서를 받았을 때, 준희도 관심을 보였었다.
이 기업의 직원이 세 명밖에 안 되는 데다가, 기술을 시연할 샘플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그 뒤로 3년이 지났고, 윤길은 GB인베스트먼트로 꾸준히 메일을 보내왔다.
그래서 윤길에게 붙은 별명이 자석좌였다.
준희는 관심을 끊은 지 오래였고, 투자 관련 응대 직원도 늘었기 때문에 더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윤길은 자신을 알고 있다는 말에 반쯤 기대감을 품은 눈빛으로 준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희가 말했다.
“저는 충분히 답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표님을 직접 뵈려고 하다니요. 서강빈 대표님은 GB관련 투자 뿐만 아니라 태선계열사들 경영하시면서 누구보다 바쁘신 분입니다.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어요.”
“....”
윤길이 시선을 잠깐 내렸다가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
“그럼 저기 의자에 앉아만 있는 건 괜찮겠습니까?”
윤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건물에서 50미터쯤 떨어진 나무 밑에 벤치였다.
“하… 마음대로 하세요.”
윤길의 고집에 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구로 들어갔다.
***
윤길이 GB타워로 찾아간 날로부터 반년 전.
윤길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과 동고동락하며 함께해 온 동료, 세련과 부둥켜안았다.
“됐다! 됐다고!”
“아 왜 이래! 뭔데?”
세련은 인상을 찌푸리며 윤길을 밀쳐 내다가 멈칫했다.
“설마….”
윤길이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밀었다.
“관수가 방금 찍은 따끈따끈한 동영상. 퀵으로 보냈더라. 한 번 봐.”
관수, 6년 전 합류한 동료이자, 월급마저 거절하고 중국집 배달로 겨우 생활을 이어온 우직한 직원이었다.
오늘 오전, 경기도 성남시에 연구 결과를 실험한다고 나갔는데, 그 결과를 보낸 것이다.
평소라면 직접 들고 왔을 텐데 퀵으로 보낼 정도면….
세련이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받고는 동영상을 재생했다.
흐릿한 화면 속 관수는 폐차장에 서 있었다.
관수의 뒤에 차 수백 대가 압착된 채 빼곡히 쌓여있었다.
보나 마나 정상적인 실험할 여건이 되지 않아 또 폐차장에서 실험한 모양이었다.
“아, 위험하다니까. 애가 이런 짓 하면 말려야 될 거 아니야.”
“일단 보라고.”
윤길이 재촉하자 세련은 다시 카메라로 시선을 돌렸다.
동영상 속 관수가 말했다.
“36회차 실험 시작하겠습니다.”
평소처럼 기대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관수는 서류가방처럼 생긴 손잡이가 달린 자석을 폐차장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으아아악!”
“꺄아악!”
동영상 속 관수가 소리를 질렀고, 세련도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내었다.
위에 쌓여있던 폐차부터, 수십대의 차들이 굉음을 퍼부으며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차들이 자석으로 향하는 와중에 먼지바람이 일어 자욱한 연기가 동영상을 가득 채웠다.
“뭐야! 왜 이러는데? 관수는?”
“관수 괜찮으니까 계속 봐. 흐흐.”
세련은 불안한 눈빛으로 동영상을 지켜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먼지바람이 걷히며 관수의 얼굴이 동영상에 나타났다.
“콜록, 실험, 콜록, 성공입니다….”
그러고는 자석의 손잡이를 잡고 올려보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얼굴이었지만 표정만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세련이 중얼거렸다.
“실험이… 성공한 거야…?”
“그래! 세련아, 이제 우리 고생길 끝난 거야! 이제 너 주말마다 가는 카페 알바도 그만두고, 관수도 중국집 배달 일 관두라고 하고… 우리 이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 그동안 퇴짜 놓던 GB도 이제 우리한테 투자해달라고 빌걸?”
윤길, 세련, 관수.
이 세 사람이 대학생 시절부터 같이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연구해낸 차세대 워크홀딩 기술이 개발 시작 11년 만에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꺄아아! 미쳤어! 진짜. 김윤길, 당신 천재야!”
세련이 윤길을 부둥켜안으며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진짜. 집에서는 그 나이 먹고 언제까지 아르바이트할 거냐면서 쪼아대지, 월급도 안 주는 회사 다닌다고 말할 수도 없고. 나 진짜 너무 힘들었어. 죽을 만큼 괴로웠어.”
윤길이 세련을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알지. 너랑 관수 그 고생한 거 내가 다 알아. 이제 다 보상받으면서 살게 해줄 거야. 나만 믿어.”
“응….”
세련은 윤길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런데 관수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으응. 동영상에서 봤잖아.”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보내놓고 왜 안 와? 생전 쓰지도 않던 퀵으로 카메라만 보내고.”
“그… 거기 폐차장 쪽이랑 피해보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나 봐.”
“....”
“어차피 폐차를 건드린 거니까 괜찮을 거야. 하하. 걸리는 건 무단침입이랑 배상 문제이긴 한데….”
“이, 이제 우리도 돈 잘 벌 거니까 괜찮겠지?”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윤길은 차세대 워크홀딩 기술의 특허를 국제출원했다.
해당 기술이 가장 각광 받을 수 있는 분야는 우주산업이었다.
우주산업의 핵심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우주도킹과 다단계 로켓 분리, 뿐만 아니라 우주선의 잠금장치에도 활용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주선을 도킹할 때, 사람이 직접 운전해서 우주선을 맞춘 후에 나사를 조여야 했지만, 이 기술이 도입된다면 자력을 통해 자동으로 쉽게 도킹할 수 있었다.
아직 한국은 우주산업 시장을 모두 합쳐도 천억 원도 넘지 못할 정도로 척박했기 때문에, 투자를 받거나 기술을 팔기 위해선 해외 업체를 찾아야 했다.
그중 가장 먼저 찾았던 기업이 바로 GB인베스트먼트였다.
대표인 강빈이 한국인인 데다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투자하는 곳이기 때문에, 해외와 교류해야 하는 산업특성상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다른 업체와 연결점을 만들어 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기대감을 품고 메일을 보낸 뒤 기다렸지만 GB인베스트먼트에서 돌아온 답변은 거절이었다.
세련이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메일 좀 작작 보내라고 했지! 그렇게 지독하게 보내더니, 이제 확인도 안 하는 거 아니야?”
“....”
“어쩔 거야. 폐차장에서는 관수한테 피해보상으로 이천만 원을 달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만한 돈이 지금 어디에 있어. 관수 이대로 감옥에 보낼 생각은 아니지?”
“절대 아니지. 그건 내가 사채라도 써서 막을 거야. 그보다 세련아. GB를 포기하면 어디로 가야 되냐….”
“NASA에서는 아직 답변 안 왔지?”
“응. 거기는 검토하는 데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 길면 몇 년 걸릴 수도 있다고 하던데.”
“흠….”
세련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지금도 관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는,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막노동을 하러 나간 상황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것도 서러울 텐데 기술개발에 성공까지 해놓고 기뻐할 틈도 없었다.
“시간 더 끌기는 힘들어. 일단 미국, 중국, 러시아 이 세 나라 기업에 연락 넣어볼게. 그중 가장 조건이 좋은 곳이랑 계약하자.”
“그래.”
그 뒤로 한 달 뒤, 신광마그넷의 위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