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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29화 (229/249)

#229화

범준의 외도, 살인 교사, 초아와의 이혼에 이어 횡령 사실까지 모조리 터트렸다.

범준 한 명을 끝내기에 충분할 뿐더러, 자신의 회사에서 횡령까지 했으니 태선전자의 이미지는 완전히 밑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태선전자의 주가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재만이 합병을 위해 이미 낮출 대로 낮춰 놓은 태선전자의 주가는 다시 한번 하락을 거듭하며 이제는 53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시가총액도 이제 태선물산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기현이 들어왔다.

“이제 나갈 때 됐지?”

오늘은 드디어 GB타워의 완공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공사를 발주하고 2년이 조금 넘은 시간 만에 높이 65층에 달하는 복합시설물이 완공된 것이다.

까다롭다는 정부 허가나 정치적인 문제는 채규가 처리한데다가 빠른 시공을 위해 돈을 쏟아부어서 가능한 미친 일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100층에 달하는 건물을 짓고 싶었지만, 현재 건축기술로 100층을 짓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됐고 효율도 나빴다.

마침 에릭도 공항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나가려던 참에 기현이 들어온 것이다.

“예. 그리고… 주주총회 안건에서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이 철회되었답니다. 방금 공문 날아왔습니다.”

“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네. 서범준은 어떻게 한다는 소리 있어? 다른 건 몰라도 횡령은 빼도 박도 못할 텐데.”

“아무런 대답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침묵이 현명한 판단은 아닐 텐데.”

범준이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금액만 천억 원이 넘어간다.

곧 구속수사가 진행될 텐데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버티면 버틸수록 부러뜨리는 맛이 있긴 하지.”

결정적으로 범준과 재만을 무너뜨릴 수 있는 태선전자와 태선AA의 비리 합병에 관한 증거는 아직 터트리지도 않았다.

조금 더 자료를 모은 뒤에 주주총회 전날에 드라마틱하게 터트릴 계획이었는데, 합병이 철회되었다니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출발하지.”

스탠드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겨울 코트를 걸치고 방을 빠져나왔다.

***

65층에 달하는 GB타워를 눈앞에서 목도하자 실로 경이로웠다.

GB타워는 팔각뿔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위로 갈수록 경사도가 커져서 1층과 65층의 면적이 약 10배 차이가 났다.

건물 외관은 9천9백 장의 특수 유리 패널과 금속 외장재로 마감했다.

건물에 경사도를 주고, 외관은 색다르게 마감한 이유는 건물이 하늘빛을 머금게 하기 위해서다.

하늘이 푸르면 건물 전체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해가 저물면 붉은 기를 머금고 따스한 빛을 내었다.

햇빛이 강렬할 때는 자체적으로 차단이 되므로 주변 아파트에 피해를 줄 일은 없었다.

GB는 세상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연출이었다.

GB타워의 준공식은 타워 내부 1층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2층부터 10층까지는 내일부터 일반인을 포함해 전체 공개를 할 생각이었는데, 일주일 동안 각각의 테마를 맞추어 축제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이었다.

2층에는 한옥마을, 3층에는 빛 축제, 4층에는 얼음 축제 같은 형식이었다.

상부에는 GB인베스트먼트가 들어설 예정이지만, 하부에는 상가를 비롯해 복합시설물로 활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금 무리하더라도 인지도를 쌓기 위함이었다.

“대표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입구에 도착하자 에릭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까 공항이라더니 벌써 도착했던 거야? 전화라도 하지.”

“여기서 구경하고 있었죠. 저거 보세요. 건물이 푸른빛으로 막! 캬.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죠?”

아직 지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GB타워와 매우 흡사한 건물이 2012년에 런던에 지어질 것이다.

예전에 런던으로 출장을 가며 인상 깊었던 기억을 토대로 건축을 의뢰했었다.

“내가 대단한 건 아니고. 생각을 현실로 옮겨준 태선건설이 대단한 거지.”

“그래도요.”

나와 에릭은 시선을 잠깐 맞추다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야. 에릭.”

“진짜…. 보고 싶었다고요. 대표님.”

“낯간지러운 소리는 하지 말고. 닭살 돋는다.”

“흐흐.”

에릭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들어 올려 보였고 나도 주먹을 쥐고 맞대었다.

“짐은 다 옮겼어?”

“센터에 맡겨서 아마 다음 주까지는 다 올 거예요.”

“그래. 이제 이곳이 네 평생직장이 될 거다.”

“어제 뉴스 못 보셨어요? 평생직장은 이제 옛말이라던데. 작년에만 직장인 10명 중 한 명이 직장을 옮겼대요.”

“이만한 복지랑 연봉 주는 곳 있으면 떠나보든가.”

“흐흐. 농담이고 평생 떠날 생각 없습니다.”

에릭은 장난처럼 말했지만 앞으로 실업률과 이직률은 계속해서 올라갈 것이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장기휴가네요. 두 번째이기도 하고요.”

“이제 좀 널널하게 가자고. 신용파산스왑 전부 정리되고 넘치는 게 돈 아니냐.”

“돈이 넘치니까 바쁘게 움직여야죠.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젊다, 젊어.”

“늘 느끼는 건데 대표님 말하는 것만 보면 정년을 앞둔 사람 같다니까요.”

나도 에릭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뜨끔했지만 그냥 웃어넘겼다.

“그보다 준희는 왜 안 왔어? 저번에 같이 온다더니.”

“부모님 먼저 뵙고 조금 늦게 온대요.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볼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 시간은 괜찮아요?”

“준공식만 해도 오전은 지나갈 거고, 그 뒤로는 너희랑 보내야지. 준희도 저녁에나 온다며? 시간 널널하니까 괜히 눈치 볼 필요 없어.”

나도 이제 시간을 널널하게 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에릭과 준희와의 재회를 위해 하루 일정을 통째로 비웠다.

오늘 밀린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는 말을 떠오르며.

“많이 변하셨네요.”

“응?”

“회장님 돌아가시고 대표님 몸도 안 챙기면서 일만 하셨잖아요. 안부 전화도 거의 안 하실 정도로요. 그런데 지금은 표정이 편해 보여요.”

“내가 그랬나.”

“네.”

나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서범준이 여러가지 파문에 휩싸이며 입지를 잃어갈수록 내 마음은 평온해져 갔다.

수 년간이나 막혀 있던 수로가 뚫린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서강빈으로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여유를 느꼈다.

준공식에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이 찾아왔다.

검경의 고위관료부터 시작해 지난 정권의 장관, 차관들과 태선그룹의 계열사 오너들은 물론 일면식이 없는 재벌 그룹의 사람들까지.

그 넓은 면적을 사람들로 다 채울 지경이었다.

나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다가왔지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야 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박현욱 사장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간 고생이 꽤 컸는지 안 그래도 짙었던 다크서클이 더 내려와 있었다.

“하하. 고생은 밑의 직원들이 다 했죠.”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예상 준공이 아무리 빨라야 3년은 잡았던 시공 아니었습니까. 그걸 2년 만에 해치우셨으니 그 노고를 제가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묵은 때가 벗겨지는 느낌입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현욱이 대뜸 허리를 숙이며 소리쳐 인사하자 주변의 시선이 몰렸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야 뻔해서 실웃음이 나왔다.

“이번에 태선건설에 성과급 명목으로 200억 원 들어갈 겁니다. 박 사장님이 알아서 잘 분배해주세요.”

성과급 액수를 들은 현욱이 몸을 한층 떨고는 말했다.

“부회장님 배포에는 항상 놀랍니다. 공명정대하게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박사장님한테는 따로 지급할 테니 전부 직원들한테 써주세요.”

“...!”

현욱이 다크서클 위로 토끼 눈을 뜨자 꼭 팬더처럼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리를 옮겼다.

사석에서 만나기 힘들어, 이런 자리를 빌려서 만나야 되는 사람이 있었다.

“에릭. 다른 사람들과 얘기 나누고 있어.”

“알겠습니다. 일 보고 오세요.”

에릭 또한 GB인베스트먼트의 총괄이자 간판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에릭은 재미교포로서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타임즈 같은 대형 잡지에 인터뷰가 실리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안에서도 인지도가 상당했다.

오히려 나와 떨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에릭에게 다가갔다.

현섭은 깔끔하게 차려입고서 구석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서 여전히 나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직접 뵙는 건 두 번째네요. 그때는 의원님이셨는데.”

“예. 이런 명분이라도 있어야 뵐 수 있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허허.”

정부에서 대통령을 제외하곤 가장 큰 힘을 쥔 인물과 재계에서 가장 큰 자본을 쥐고 있는 내가 한자리에 있다 보니 시선이 단숨에 쏠렸다.

겨우 만났다 해도, 별다른 얘기는 할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굳이 하자면 말을 돌려서 해야 했다, 이를테면.

“개편된 기획재정부의 초대 장관으로서 아쉬운 것은 없으십니까?”

내가 채규를 통해서 주는 금품청탁에 아쉬움은 없느냐는 뜻이었다.

이에 현섭은.

“아쉽다니요. 현재 직급에 막중함을 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족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저 또한 재벌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같은 집안 사람인 서범준 사장의 행보에 아쉬울 따름이지요.”

위기에 몰린 재만이 현섭을 찾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현섭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만 하겠습니까. 그만한 금액의 횡령이 정부개입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냐, 다른 정경유착은 없냐는 말이 들끓고 있습니다. 출범한 지 한 달도 안 된 정부에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들… 쯧. 이번 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출범과 동시에 각하의 지지율이 바닥을 칠 겁니다. 서범준 사장은 운이 없었지요.”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 말들 가운데 내가 원하는 바가 있었다.

‘서범준은 정부에서도 완전히 처낼 생각이군.’

남은 것은 재만.

“한국 제일기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총수가 벌인 일이 아니긴 하지만.”

“결국 자식을 잘못 키운 아비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태선전자는 이번에 대대적인 검찰수사를 받아야 될 겁니다.”

방금 현섭의 말은 정부의 의견이라기보다, 현섭 개인의 생각일 확률이 높았다.

아직 출범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정부에서 재만의 안위를 벌써부터 결정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건 현섭은 재만의 편에 서지 않으리란 것.

기획재정부의 장관이 내 뒷배가 되었으니 이것보다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장관님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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