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초아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 전체를 대관해 놓고도 구석에 앉아 있는 범준이 보였다.
게다가 왼쪽 얼굴은 짓무르다 못해 살갗이 터져 있었다.
“초, 초아야….”
범준은 고개를 들었다가 초아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다시 수그렸다.
“술 먹고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누구한테 맞기라도 했니?”
“....”
“어휴.”
초아는 범준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왜 만나자고 한 건데? 지금 너 상판 전국에 팔리고 있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냐. 너랑 결혼했다는 이유로 나까지 얼굴 팔려야 돼? 쪽팔려 죽을 것 같아.”
“그… 이혼했다는 거 두 달만 늦게 밝히면 안 되냐…? 너도 이번 주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아. 만약 나랑 너랑 이혼했다는 거 기사라도 터지면 괜히 말 만들어질 거 아니야.”
“그딴 소리 하려고 나한테 연락했니?”
범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아는 흠칫했다가 이어진 범준의 행동을 보고는 경악했다.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초아의 손을 잡은 것이다.
“우리 다시 시작해. 내가 여자는 많이 만나 봤지만…”
“너처럼 튕기는 여자는 처음이야. 이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지?”
“....”
“너 역겨워. 네가 외도했다는 걸 내가 몰랐어도 너는 나한테 똑같이 역겨운 사람이었어.”
“나한테 잘해줬잖아. 내가 바람 피운 게 원인이 아니라면 대체 이유가 뭔데?”
초아는 아직도 범준이 상견례에서 화장실에서 자신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킨 것이 잊혀지지 않았다.
평생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순간이 없었다.
그 외에도 범준의 만행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폭언은 예사에 별채를 따로 쓰며 본관에 다른 여자를 불러들이고는 자신을 ‘첩’이라고 소개하질 않나.
“네가 한 짓은 좀 스스로 알지 그래.”
“하.”
범준이 일어나고는 제 무릎을 털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치켜뜨고는 말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어? 잘못했다고. 내가 무릎까지 꿇었는데 여기서 뭘 더 해야 되는데?”
“뭐 하려고 하지 마.”
“뭐?”
“보나 마나 서재만 부회장이 너보고 이러라고 시켰지? 어떻게든 나 다시 붙잡으라고. 절대 그래줄 생각 없으니까 헛된 기대 품지 마.”
범준이 표정을 굳히고는 초아를 노려보았다.
“태선전자 상대로 이딴 일 벌이고도 너나, 네 아비는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냐?”
“해봐.”
“뭐?”
초아가 범준의 등 뒤로 걸어갈 때까지 범준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을 느낀 것도 잠시, 뒤에서 미는 힘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으….”
하필이면 재만에게 뺨을 얻어맞았던 부분이 땅에 닿아 더욱 쓰라렸다.
초아는 그 상태로 범준을 지나가려는데 범준이 발목을 낚아챘다.
“죽을라고…!”
그것도 잠시, 초아가 휴대폰을 만지자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뭐, 뭐야?”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을 입은 경호원 세 명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강빈이 초아에게 붙여준 경호원들이었다.
하나같이 우락부락해서 범준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
“....”
범준은 발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스르르 풀었다.
“부국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가시죠.”
초아는 엎어진 채 고개를 처박고 있는 범준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랑 이렇게 한 공간에 있는 것도 숨 막힐 정도로 기분 나빠. 앞으로 찾아올 생각도 하지 마.”
대답없는 범준을 남겨두고 초아는 그대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
2008년의 2월은 대통령이 바뀌며 10년 만에 다시 보수 세력이 집권하게 되는 시기다.
이번 달 안에만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인이 비공개 회담을 가졌고, 국보 1호인 숭례문의 2층 문루의 90프로, 1층 문루의 10프로가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러나 지금 세간을 달구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당선인도, 숭례문 방화의 범인이 아니라 명싱살부 한국 1위 기업, 태선전자의 장남이었다.
-분명 사주한 놈이 서범준 사장님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시기에 김태평 대표 건들 사람이 그놈 말고 더 있습니까?-
-예…. 서범준 사장님께 지시를 받은 게 맞습니다. 이제와서 왜 자백하냐고요? 그놈이 돈을 안 줬.-
일주일 전,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을 앞두고, 증권사 중 유일하게 반대를 표명했던 김태평 대표의 살인을 교사했다는 녹취록이 퍼졌다.
뉴스에서는 아직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고, 다만 입수한 녹취록을 풀었음에 불과하다고 언급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범준이 저지른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불과 일주일 전, 범준의 외도 사실이 전파를 타고 전 국민이 알게 된 사건이다.
신혼여행 중 공원에서 외간 여자와 그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무슨 짓이든 못 벌이겠는가, 하는 의견이 주류였다.
그렇다고 범준의 동정 여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김태평 대표는 이와 관련해 함구하고 있었고, 태선전자 측에서는 공고히 부인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녹취록 말고 확보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범준은 경찰소환도 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발….”
범준은 평소에 즐겨보던 인터넷을 켤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동정하는 여론이라고 해봤자 극소수, 그런 의견조차 태선전자가 심은 알바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곤 했다.
네티즌들이 남기는 댓글은 범준의 사임과 처벌을 촉구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진 것이었지만 증거가 없으니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자위했다.
재만의 지시로 집에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지 벌써 이주가 지났다.
친구를 시켜 여자라도 몇 불러들일까 고민했지만 행여나 재만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지금도 뺨에 난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귀 아래에 작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다행히 살인 교사에 대한 의혹으로는 재만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이 정도는 수습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침대에 누워 담배를 입에 물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재만의 심복인 심비서였다.
“전화는 왜 안 받으십니까! 부회장님 호출입니다! 빨리 준비하고 나오세요.”
호출이라는 말에 손에 들린 담배가 툭, 떨어졌다.
“뭔데. 아 또 왜 그러는데!”
심비서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정장을 탈탈 털고는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감히 이딴 태도로…”
“지금 부회장님 많이 화나셨습니다. 적어도 저는 부회장님이 그렇게까지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태선물산을 서준만 전 부회장님께 뺏기셨을 때도요.”
“....”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재만과 함께해온 심비서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화가 났다는 말인가.
범준은 자신 앞에 던져진 정장을 서둘러 입기 시작했다.
심비서가 직접 모는 세단은 신호도 지키지 않고 빠르게 재만의 집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30분은 걸렸을 길이 근 10분 만에 도착할 정도였다.
범준은 불안감에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졸였다.
집으로 들어가 재만의 방 앞에 당도했을 때는 차마 문을 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심비서가 옆에서 얄궂게 노크를 했다.
“들어와.”
안에서 재만의 목소리가 들리자 범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듣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많이 화나셨다며. 아버지는 화날 때 톤이 올라가는 거 몰라?”
“...들어가십쇼.”
“하여튼. 비서라는 인간이 겁만 많아서.”
범준은 조소를 한껏 흘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이어 흙을 흩뿌리며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병을 목도해야 했다.
쨍그랑!
화병이 범준을 넘어 맞은편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황급히 목을 숙여서 망정이지, 화병은 분명 범준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얼굴을 노릴 거리라면….
“서범준.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재만이 다섯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 녹취록은 증거 안 되니까 시간만 지나면 묻힐 거라면서요.”
범준은 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바라보는 재만의 눈빛이 흉흉했다.
“그 새끼 붙잡고 내 앞으로 끌고 와.”
재만은 대답도 하지 않고 범준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두 명의 경호원이 범준의 한 팔씩 붙잡고 재만의 앞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 이러시는 이유는 알려주셔야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일을…”
“방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했더니 TV도 안 틀고 사는 거냐? 전화도 꺼놓고?”
“...또 뭔가 터진 겁니까?”
“안 되겠다. 오늘 내가 너를 죽여 패야 속이 풀리겠어.”
재만이 방구석에 있던 골프가방 안에서 드라이버를 꺼냈다.
“움직이지 마라. 더 크게 다친다.”
“아버지…. 드라이버 채로 맞았다가 사람 죽어요. 진짜 왜 이러세요…!”
재만은 두 손으로 드라이버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내려찍었다.
“으아아악! 악…?”
범준은 세상 날아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가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슬며시 눈을 떴다.
재만이 휘두른 채는 범준의 두 다리 사이에 카펫과 맞닿아 있었다.
주말이면 늘 골프를 즐기는 재만이 실수했을 리 없고, 일부러 비껴친 것이다.
“...네가 태선전자의 회삿돈을 빼돌려 미국 주택저당증권에 투자했다는 게 밝혀졌다.”
“예? 아버지! 그거 허위 정보입니다. 태선전자의 돈으로 투자한 게 아닙니다.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돈은 빌린 돈의 금리를 갚는데 썼다구요! 기사 쓴 새끼 제대로 된 정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데 네 차명계좌랑 정경규 팀장까지 포섭했다는 말이냐?”
“정경규… 이 새끼를…!”
“하….”
문제를 듣고도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는 것보다, 보복을 먼저 생각하는 한심한 아들놈이 재만의 눈앞에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일주일 간격으로 계속해서 하나씩 풀고 있어. 다음 주에는 또 어떤 네 치부가 밝혀질지 나도 심히 궁금하구나.”
“아버지….”
범준은 그래도 지난번처럼 뺨부터 갈기고 보지는 않은 재만을 보며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합병을 미루기로 했다. 아니, 미룰 수밖에 없겠지. 지금 이 사달이 났는데 합병까지 진행하다간 무슨 초상을 치를지 모르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복직해서 두 배는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아니. 너는 따로 해야 될 일이 있다.”
“예?”
재만은 한숨을 크게 내쉰 뒤에 범준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네가 감옥에 갔다 와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