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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27화 (227/249)

#227화

재만이 찾아간 곳은 현재 범준의 신혼집이 있는 동네인 한남동이었다.

얼굴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을 범준에게 병문안을 온 것은 당연히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었다.

범준의 신혼집이 있는 부촌보다 저지대에 위치했고, 그래서 땅값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곳에 지어진 저택에 당도했다.

저택 앞에 나와 있는 중년과 노년의 중간 사이에 있을 법하게 생긴 남자는 작년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이사장이었고, 현재 ‘국민연금공단’의 이사장이었다.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가 지닌 권력은 한 톨도 바뀌지 않았다.

“여기까지 찾아오시고…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겸손도 하셔라. 수백조 원을 움직이는 기관의 수장께서 말입니다.”

“흐흐. 우선 들어오시죠. 날이 춥습니다. 비서분도 거기 서 계시지 말고 들어오세요.”

“인정도 많으시지.”

심비서가 재만의 눈치를 살피다가, 재만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여환의 저택은 화려하진 않지만 모던한 단층 건물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연못까지 있었는데, 금붕어 몇 마리가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택은 전체적으로 화이트톤으로 칠해져 있었고, 푸른 지붕이 시선을 끌었다.

“감각이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부회장님의 시선에 그렇게 비췄다면 천만다행이군요. 건축설계비가 만만치 않았거든요.”

여환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건물까지 이어지는 길이 짧아 금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환의 아내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서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재만도 고개를 살짝 숙이자 여환이 여자의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희 집사람입니다.”

“상당한 미인이시네요. 이사장님께서 늘 웃음꽃이 피우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한 모양이었지만, 소싯적에 미인이었을 관상이었다.

여자는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고 여환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런 얘기 자주 듣긴 합니다.”

상당한 애처가라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재만은 잠시 집에서 배를 긁으며 누워 있을 제 아내, 강숙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늘렸다.

여환의 아내는 심비서를 거실로, 재만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말씀들 나누시고 계세요. 과일이랑 차 좀 내어 드릴게요.”

여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어이쿠, 사모님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네요.”

“집사람이 손님 대접하는 걸 좋아하니 편하게 계세요. 허허.”

재만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대화를 이었다.

“아드님은 미국에서 승마를 하신다고요?”

“예. 폴로 선수입니다. 아, 한국에는 생소해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하하. 미국 유학 시절에 본 적은 있습니다.”

폴로는 페르시아에서 발원한 승마 스포츠로, 말을 타고 하키를 하는 것과 비슷했다.

한국에는 아직 공식적인 경기가 한 번도 치러지지 않았지만, 구미권에서는 꽤 유명한 상류층 스포츠였다.

“상당히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되지요. 당연히 됩니다만, 아들 녀석이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어쩔 수 있나요. 그저 좋은 말 구해다 주고, 장비나 단단한 거 사줘야죠.”

“제가 미국에도 제법 연줄이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부회장님 연줄이라면 참 든든하겠습니다. 허허. 그보다 부회장님 아드님은 한창 좋을 때일 텐데 어때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순간 재만의 얼굴이 뒤틀렸다가 이내 풀고는 힘없이 말했다.

“아뇨. 조만간 이혼할 겁니다.”

“아니, 이제 막 신혼 아닙니까?”

“예…. 그런데 며늘아기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시집을 온 모양이더군요. 범준이가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합니다.”

어차피 범준의 이혼은 이제 막을 수 없으니 재만은 최대한 동정 여론이라도 살 생각이었다.

규명에게는 그걸 빌미로 위자료를 더 얹어줄 생각이었고.

“이런…. 그래도 얼굴 맞대고 살면서 정이 붙을 수도 있을 거 아닙니까. 결혼식을 그렇게 성대하게 하셨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요즘 애들 생각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저희 때랑 워낙에 달라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여환의 아내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계절과일이랑 대추차 좀 내왔어요.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시구요.”

재만이 벌떡 일어나 쟁반을 넘겨받았다.

“사모님. 다음에 태선백화점에 한 번 놀러 오시죠. 제가 그날 제대로 카드 긁겠습니다.”

“어머, 여보. 그래도 될까요?”

“그럼. 하하. 부회장님과 내가 어떤 사인데.”

“당신이 그런 말 함부로 할 사람은 아닌데 부회장님께 신뢰가 엄청난가 봐요.”

재만이 한쪽 입꼬리를 보며 여환을 쳐다봤다.

여환도 재만을 바라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그럼 두 분이서 마저 말씀 나누세요.”

“네. 감사합니다.”

재만은 쟁반을 접견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앉았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자면, 제 아들 녀석이 곧 이혼을 하게 생긴 바람에….”

“시간이 없겠군요. 주총 일정을 조금 더 앞당기시죠.”

“하하. 이렇게 제 사정을 봐주시니 제가 어찌 이사장님을 안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어떻게 부회장님만의 사정입니까. 제가 가진 지분이 얼만데요.”

여환이 갖고 있는 태선AA의 지분 7프로는 재만이 여환에게 이번 일을 부탁하며 차명으로 건넨 것이었다.

태선AA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는 와중에 7프로면 4천억 원이 넘는 거금.

여환이 국민연금공단의 이사장 자리를 내걸 만한 돈이었다.

“저나, 저희 공단이나 늘 부회장님 편이니 편하게 일정 잡으시지요.”

“예. 그럼… 뭐야!”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심비서가 들어왔다.

재만은 가뜩이나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산통을 깬 심비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부, 부회장님. 지금 뉴스를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그때 열려 있던 문 사이로 여환의 아내까지 질겁한 얼굴을 하고서 나타났다.

“여보! 부회장님 아드님이….”

여환의 아내는 재만의 얼굴을 보고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심비서가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서범준 사장이 외도했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공원에서…”

작게 말했음에도 옆에 앉아 있던 여환도 다 들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정을 앞당기는 건 힘들 것 같군요.”

***

YTT를 시작으로 보도국들이 연달아 범준의 외도 사실을 터트렸다.

뉴스가 터질 걸 알고 있던 초아가 태선호텔로 찾아왔다.

“조금 더 쉬다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재밌는 걸 타지에서 보라구요?”

“...하긴. 그렇긴 하죠.”

초아는 내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TV에서는 아직도 속보로 범준의 외도 행각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왔던 한국에서의 망나니짓들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저 자식, 이제 재혼은 못 하겠군요.”

“호호.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어요? 비록 제도상이지만, 제 남편이었다는 게 부끄러워서 제가 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지경인데.”

방금 TV에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는 사진은 곧 인터넷에 올라올 것이다.

이미 본 적이 있던 나는 모자이크가 되어 있다고 해도 어떤 사진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뉴스에 박제된 사진은 공원을 배경으로 벌거벗고 있는 범준의 뒷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썩을 것 같아 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혼 절차는 잘 되고 있습니까?”

“네. 아마 이번 달 안으로 정리될 것 같아요.”

“기사가 터지고 나면 위자료로 거하게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는 않습니까.”

“뛰어난 투자가라고 여자 마음까지 아는 건 아니네요?”

초아는 말을 뱉고서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저런 쓰레기랑 잠시라도 부부의 관계를 더 맺고 있는 게 싫어서요. 협의이혼 아니면 위자료나 재산분할로 얼마나 시간을 끌지 모르는데 빠르게 정리하는 게 낫죠.”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나한테 서범준 같은 배우자가 있었다면 없는 위자료까지 물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초아 씨 국장 취임식은 언제 하기로 했습니까? 저도 그날은 일정 비워두도록 하죠.”

“바쁘신 거 다 아는데 괜찮아요!”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제 더 이상 숨 가쁘게 달려갈 필요 없었다.

미국에서 신용파산스왑으로 벌어들인 돈만 해도 세계에서 내 재력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니까.

거기에 서범준이 망가지는 걸 천천히 지켜볼 테니, 이제 조금은 짐을 내려놓을 때도 됐다.

내가 찾아간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초아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은 임시로 부국장을 맡고 있어요. 그동안 공석이었거든요. 이제 막 한국 돌아왔으니 아버지 인맥들 소개받고 경영수업만 받고 나면 바로 달 예정이에요. 날짜는 아직 미정이지만 올해 안에는 취임하려구요. 강빈 씨한테 가장 먼저 알려 드릴게요.”

“네. 앞으로 초아 씨한테 부탁드릴 게 많을 겁니다. 잘 부탁드려요.”

나는 초아에게 손을 내밀었고, 초아는 그 손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오늘은 서범준의 외도를 알렸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서범준이 태선전자의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사실과 사람을 사주해 살인을 교사한 것부터 시작해 모든 범죄행각을 밝힐 것이다.

그것만으로 감옥에서 몇 년은 썩게 될 것이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를 반기는 이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만들 생각이었다.

초아에게도 이런 내 생각을 밝혔고 초아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돕겠다고 말했다.

“일주일 뒤에는 서범준이 사람을 시켜 김태평 대표를 죽이려 했다는 녹취록을 터트리죠.”

“네. 사실관계는 상관없는 거죠? 확증은 없다면서요.”

“일단 의혹이 불거지기만 하면 됩니다.”

김태평 대표를 호수에 매장하려고 했던 두 범인은 현재 영균이 데리고 있다.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인들은 경찰서에 가서 모든 것을 자백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가 터진 이후에 범준이나 재만이 경찰에게 압박을 넣고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들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 기현과 채규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검경 고위관계자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기사를 터트릴지 얘기하고 있는데 초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초아가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서범준 전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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