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범준이 이혼장을 갖고 온 다음 날, 재만은 GBC방송국을 찾아갔다.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재만으로 인해 로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태선 전자의 부회장님이 직접…!”
“제가 모시겠습니다!”
프론트 안에 있던 안내원부터, 상황대기실에서 튀어나온 경비원들까지 재만의 곁에 붙었다.
아무런 말도 없는 재만 옆에서 방송국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했다.
방송국장인 규명과 재만이 사돈지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거니와 태선전자의 총수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다.
재만의 비서와 경호원 뒤로 방송국 사람들까지 붙어 행렬이 이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내 알아서 가겠네.”
“네. 살펴 들어가십시오!”
재만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방송국 사람들을 물렸다.
최상층에 당도하자,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마중을 나와야 할 규명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비서조차 보내지 않은 것을 보아 규명은 작금의 사태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국장실에서 저마다 서류를 든 사람들이 서둘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설마.’
범준이 미국에서 저질렀다는 외도를 터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고개를 저었다.
규명에게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뒷배도 없었고, 무엇보다 GBC 방송국은 보도국이 없었으니까.
재만은 다시 발걸음을 놀려 국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심비서는 여기서 대기해.”
“예. 부회장님.”
심비서가 재만에게 고개를 숙인 뒤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건넸다.
재만은 종이가방을 든 채 홀로 국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규명은 몸을 돌린 채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저희가 지금 볼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부회장님.”
늘 사돈어른이라며 알랑거리더니, 부회장님이라니.
완전히 선을 긋는 모습에 재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돈어른. 저희가 시기를 따질 관계입니까?”
“사돈어른이라니…. 불편하군요. 범준 군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다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
재만은 고작 방송국장 나부랭이한테 굽혀야 한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게다가 규명은 범준이 여자를 밝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딸을 시집보낸 인간 아니던가.
이번 일을 빌미로 뭐 하나 뽑아 먹겠다는 심보가 뻔히 보이는데, 딸을 걸고 넘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재만은 손을 쥐락펴락하며 규명이 앉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종이가방을 규명 앞에 있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작은 성의입니다….”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받아주시지요.”
“크흠.”
규명은 종이가방에 손은 안 댔지만 슬쩍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본 재만이 종이가방 안에 있던 상자를 꺼내어 열어젖혔다.
주먹만 한 금두꺼비가 옥구슬 같은 다이아몬드를 붉은 혓바닥에 올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금두꺼비의 혓바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불순물이 없는 최상품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 노여움을 푸실 거라 생각 안 합니다. 아들놈을 잘못 키운 사죄의 의미로 받아주시지요.”
규명은 한동안 금두꺼비에 시선을 머물렀다가 다시 재만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 딸, 초아가 저를 찾아와 얼마나 비통하게 울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신혼여행에서 외도라니요. 심지어 초아는 호텔에서 며칠씩이나 혼자 지내게 했다는군요.”
“모두 제 잘못이니 유구무언입니다.”
“하나뿐인… 제 하나뿐인 딸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규명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평소 규명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못했더라면 정말 딸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라 여겼을 것이다.
재만은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은 채 시선을 내렸다.
“범준이 녀석한테도 며늘아기에게 충분히 사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사장 자리도 내려놓으라고 말했어요.”
“하….”
“이혼만… 어떻게든 피할 수 없겠습니까? 집은 며늘아기 주고 범준이 보고 나오라고 하겠습니다.”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 괜히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규명이 언론계 쪽에서 이번 합병에 대한 비난을 막고 있는 역할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버릴 수 없는 패였다.
규명이 소매를 들어 제 눈가를 훔친 뒤 말을 이었다.
“지금 초아… 제 연락도 안 받습니다. 어찌나 상처가 깊으면 그렇게 따르던 저조차 피합니까?”
“....”
“저는 서 사위, 아니 범준 군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 수중에 있는 이백억 원도 쾌척했던 거고요. 그런데 범준 군은 뒤에서 그런 짓을 벌였으니…. 어떤 심정일지 짐작이나 가십니까?”
“사돈… 그 돈은 제가 금방 돌려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구어메이와 룽시 쪽에서도 압박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금리는 둘째치고 원금을 상환하기로 한 시기가 지나지 않았습니까.”
범준이 투자를 하겠다며 손을 댄 중국계 투자회사 구어메이와 룽시, 두 기업에 있는 부채가 무려 3000억 원이 넘었다.
금리도 낮은 편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그 금액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 딸이 받은 상처를 나불대다가 자연스럽게 돈 얘기로 넘어갔다.
떨리던 규명의 목소리는 어느새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것도 제가 조만간 해결하겠습니다. GBC방송국에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제가 가진 게 많아요.”
“함 국장님. 지금 저한테 협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재만은 눈앞에 있는 규명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준도 안 맞는 인간에게 협박이나 듣고 있자니, 불쾌함이 온몸에 스며드는 듯했다.
규명은 목울대를 울렁이며 중얼거렸다.
“제 딸이 지금…!”
“좋습니다. 그깟 이혼 해주죠, 뭐.”
“...?”
재만이 규명과 시선을 맞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위자료도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리다. 그런데 지금 와서 등 돌리면. 내 등에 칼 꽂으면…! 그 자리는 물론, 한국에는 발도 못 붙일 겁니다.”
“...이제 보니 협박하는 건 제가 아니라 부회장님 같습니다?”
“저는 적어도 하지도 않을 짓을 공갈로 말하진 않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규명은 원래 이 정도로 대범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고작 범준의 외도를 물고 늘어져 이혼을 요구할 사람도 아니었고.
‘뒤에 누군가 있어.’
아까 국장실 밖으로 서둘러 빠져 나가던 사람들의 무리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가벼운 인사조차 없이 빠르게 계단 사이로 내려가던 무리들.
재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결정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설마 태선전자의 부회장님을 건들겠습니까? 제 돈만 잘 갚고 이혼 위자료만 두둑이 챙겨 주면 저도 할 말 없습니다.”
규명도 이제 제 연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대놓고 뻔뻔하게 나왔다.
“그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재만은 규명을 흘긴 뒤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태선전자의 부회장실로 돌아오자마자 재만은 심비서에게 지시했다.
“함규명 그 인간한테 사람 붙여서 뒤에 누가 있나, 누구와 접촉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지금 시점에 규명에게 붙을 사람이라면 합병에 반대하는 사람들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대외적으로 합병을 가장 크게 반대하는 두 사람이 떠올랐다.
성공투자증권사의 김태평 대표와 빌어먹을 조카, 서강빈.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그 둘은 아니야….”
태평은 규명의 뒤를 봐줄 만한 힘이 없었고, 쥐새끼 같은 규명이 한참은 어린 강빈을 믿고 움직였을 리가 없었다.
규명이 방송국 물을 마시며 만난 정재계 인사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중 최근에 자신의 손길을 완전히 뿌리친 인물이 생각났다.
국회의원 차현섭.
로비로 얼마를 퍼부으려고 해도 현섭 측에서 계속해서 거절했다.
기획재정부 장관 자리가 확정된 이후 수없이 그를 찾아갔으나, 한 번만 더 금품청탁을 하면 정식으로 문제를 삼겠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돈 싫어하는 정치인은 없다고, 재만은 확신했다.
그럼에도 강건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라면….
“차현섭 장관도 한 번 뒤를 밟아봐.”
“부, 부회장님. 지금 기획재정부 장관이신데 잘못 건드렸다가…”
“주변이라도 캐보든가! 상사가 까라는데 못 까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심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부회장실을 나갔다.
현섭에게 사람을 붙이라고 지시는 했지만 아직도 재만에겐 의문이 남아있었다.
‘차현섭이 왜…?’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을 막음으로써 현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늘 이렇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일에는 한 사람이 연관되어 있었다.
대통령도 아니면서 대동하는 경호원 수만 수십 명에 달해 뒤를 밟는 것조차 불가능한 가증스러운 인물이.
***
진석과 함께 서울에 있는 태선호텔 지점들에 시찰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규명에게 전화가 왔다.
“예. 무슨 일입니까.”
“바쁘십니까?”
“음.”
시찰이라고 해봤자 나는 미래의 지식을 토대로 제안한 것들이 반영되고 있나 살필 뿐, 디테일한 부분은 모두 진석 담당이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서재만 부회장이 왔다 갔습니다. YTT 쪽 사람들과 대본 맞추고 있는데 갑자기 프론트에서 서재만 부회장이 나타났다지 뭡니까. 식겁했습니다.”
“YTT사람들이 국장실을 갔다간 걸 알면 눈치챌 수도 있겠는데요.”
“사람들을 내보내는 과정에서 마주치긴 했습니다만…. 반응을 보면 알아채진 못한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보다 서재만이 규명을 찾아간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서범준이 저지른 잘못을 알게 됐나 보네요. 찾아온 이유는 외도입니까, 횡령입니까? 아님 둘 다?”
“외도입니다. 저희 쪽에서 서범준이 태선전자를 횡령한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모르고 있는 눈치였어요. ”
초아는 이미 범준의 방에 설치한 도청으로 알고 있었지만, 범준이 술을 먹고 자신이 태선전자에서 횡령했다고 떠벌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재만에게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술에 취해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넘어가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리고 서재만 부회장 말입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조심할 일을 안 만들면 되죠.”
“예?”
“일단 기사 터트립시다. 서범준이 외도한 것부터.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뉴스로 터트리세요.”
다음 주 첫 출근길에 온 국민이 서범준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