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저는 국민의 저력을 믿습니다. 새해가 국가적으로도 더 큰 발전을 이루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TV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사가 흘러나왔다.
이제 곧 이명박 당선인을 비롯해 강 당대표들의 신년사도 줄줄이 흘러나올 것이다.
정치인들의 신년사를 들으면서도 벌써 2008년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서강빈의 삶을 살게 된 지도 15년이나 흐른 것이다.
새해 첫날, 나는 인천에 있는 선산을 찾았다.
금괴가 묻혀 있는 별장과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곳엔 진태가 묻혀 있다.
진태의 장례를 치르고 근 3년 만에 이곳을 찾은 것이다.
기일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찾아왔다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선산의 초입으로 걸어가자 영균이 뒤따라왔다.
“오늘은 혼자 가지.”
“부회장님…. 김태평 대표 건도 있고 조심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기에 데려온 경호원의 수가 너무 많지 않아?”
“....”
선산 앞에 있는 주차장에 도열해 있는 검은 세단만 8대가 넘었다.
김태평 사건 이후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나는 거의 대통령급 경호를 받았다.
“그럼 나머지 팀원들은 근처 계속 순찰 돌게 하고, 저는 중턱까지만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짐도 있지 않으십니까.”
“이게 얼마나 무겁다고… 하하. 알겠어. 부탁할게.”
영균에게 명주실로 짠 보따리를 넘겼다.
안에는 아까 미소식당에서 싸 온 굴비와 국, 쌀밥 등 진태가 생전 좋아했던 음식들이 잔뜩 있었다.
그렇게 영균과 함께 선산으로 가는 오르막길에 올랐다.
영균은 보따리를 한 손에 든 채 묵묵히 내 옆에서 걸어갔다.
“차실장. 이런 질문 해도 모르겠지만, 자네한테 선대회장님은 어떤 사람이었나.”
“엄한 분이셨습니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셨죠. 가끔은 작은 발소리에도 노성을 내셨습니다.”
진태가 수십년 동안 자신의 저택에서 일해온 집사를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잘라냈던 일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의 손자가 아니라 외부인으로 태어났다면 나라고 해도 진태의 눈 안에 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보는 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사람의 능력 하나만 보고 자리에 앉혔지요. 물론 저처럼 경호원을 쓸 때는 철저히 배경을 조사했습니다만.”
“하하. 변호해 줄 필요 없어. 할아버지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 아니, 많이 부족했다는 건 태선가 사람이면 다 알아.”
제 자식들에게도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겼던 게 진태였다.
심지어 남매들 사이에 도태된 준만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 명의 기업가로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으나, 한 명의 아버지로서, 누군가의 상사로서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
“그보다 차실장. 자네한테 올해 들은 사적인 대답 중 가장 길게 했네.”
“...필요하시면 더 말할 수 있습니다.”
“괜찮아.”
그토록 말이 없던 영균이 애쓰는 것이 눈에 보였다.
3년 만에 진태를 보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올라가지.”
“예.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출하십시오. 휴대폰 음향 버튼을 세 번 누르면…”
“차실장한테 바로 위치 전송되고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고?”
김태평 사건 이후 영균은 내 휴대폰을 잠시 빌려 가고는 이런 기능을 추가시켰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이 가끔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안전을 생각한다면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그래. 앉아서 쉬고 있어.”
영균에게 보따리를 넘겨받고 나 홀로 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 한 명의 무덤이라기에 동산은 지나치게 넓고 컸다.
처음 선산이라는 말에 진태의 조상들과 같이 묻혀 있다는 줄 알았는데, 진태 단 한 명의 무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선산은 진태가 죽기 전에 남순에게 증여되었다.
아마 제일 꼼꼼하고 관리를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 준 모양이었다.
진태가 죽고 한참이 지난 후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 같아도 남자 자식들이나 정순보다는 남순에게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죽을 때는 절대 이런 꼴값은 안 떨겠다고 다짐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치 왕릉을 연상시키는 진태의 무덤이 나타났다.
“다시 봐도 무슨 무덤이….”
무덤은 벙커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거대했다.
무덤을 감싸고 있는 반듯이 쌓아 올린 벽의 끝은 기와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벽 안에 넓이만 초등학교 운동장 크기는 되는 듯했는데, 이 넓은 공간을 잔뜩 메운 잔디는 한 곳도 모난 데 없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남순이 꽤나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었다.
무덤까지 이어진 돌길을 따라 걸었다.
무덤이 있는 곳까지 백 걸음쯤 걷고 나서야 도착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한겨울의 한기가 불어와 얼굴이 아렸지만, 다행히 보따리가 날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보따리를 풀어 무덤 앞에 깔고 그 위로 제사상을 차렸다.
미리 준비해온 제기 위로 굴비를 비롯해 음식들과 과일들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수정식당에서 가져온 겁니다.”
그러고는 술병을 들었다.
마치 달팽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병이었는데, 등껍질에는 4kg의 백금이 쓰였고, 껍질 안에 점점이 박혀있는 것들은 모두 다이아몬드였다.
생산된 지 100년이 넘은 코냑이라던가.
보통 제사를 지낼 때 맑은 술을 사용한다지만, 진태가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음식은 싸구려를 먹어도 진태가 싸구려 술을 먹는 것은 전혀 상상이 안 가서 구해온 가장 비싼 술이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술을 드셨든 이것보다 비싸진 않을 겁니다. 이게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술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병값이 절반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겨울 햇빛에 다이아몬드들이 빛을 머금어 반짝였다.
그야말로 돈칠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이었다.
“제가 제사상을 차려본 적이 없어서 예절을 모릅니다. 뭐 제사를 가가례(家家禮)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전생에서는 아주 어릴 때 외에는 제사를 치른 적이 없었고, 서강빈의 삶은 누군가의 제사를 치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죽은 누군가의 넋을 달래기 위한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들은 것은 있어 두 번을 먼저 절한 뒤에 무덤가 주변에 술을 뿌렸다.
“한 잔에 1억 원은 넘을 겁니다. 지금 들이부은 양으로는… 10억 원은 넘겼겠네요. 맛 좋습니까?”
술을 붓는 것을 멈췄다.
“그때 당시에 환청인가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할아버지는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다고.
강현재의 삶을 더 오래 살았노라고 고백했을 때 진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구든, 내 삶을 살라고.
“그 말이 꽤 도움이 됐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꽤 혼란스러웠거든요.”
처음 서강빈의 몸에 들어왔을 때는 반드시 서범준에게 복수하겠노라고 결심했다.
그 뒤로 지속된 서강빈의 삶에서는 진태의 뜻을 이어 태선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기업체로 이끌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생각이 들며 범준에 대한 복수심이 희미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전생에서 나를 죽였다고 하나, 그럴 가치도 없는 한심한 새끼라는 것을 알게되었으니까.
태선그룹을 차지하게 되면, 그것이 복수라고 스스로 합리화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서강빈이 나를 이루었듯, 강현재로 살아온 삶이 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범준은 나를 한 번 죽인 천하의 개새끼였다.
그가 모든 것을 잃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제가 누구든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네가 누구든, 이라는 말이 어떤 말보다 지금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를 이해한다는 말이니까.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찾아올 때는 어쩌면 제 직함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덤가를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렸다.
***
범준이 쭈뼛거리며 서재에 있던 재만 앞에 나타났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그… 아버지.”
재만은 그사이에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하면 되지. 사내새끼가 뭘 그리 망설여?”
“우선….”
범준이 재만에게 빳빳한 이혼장을 내밀었다.
재만은 그 종이를 냅다 구겨서 바닥에 던지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범준의 뺨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이 일련의 행동들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범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뺨에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멍청한 새끼, 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은 있어도, 재만이 안면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아, 아버지….”
재만은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멍하니 범준을 바라봤다.
그 기괴한 모습이 아마 범준이 살아오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일 것이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만이 범준의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갈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아버, 악. 아버, 아, 아악!”
범준은 단어 하나를 완성하지 못할 만큼 얻어터졌다.
손을 들어 막거나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재만이 어떤 폭력을 행사할지 몰라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맞고 있을 수밖에.
여섯, 일곱, 여덟 대….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의 무차별적인 귀싸대기 폭행이 이어졌다.
재만이 들어 올린 손을 멈출 때는 이미 범준의 고막이 터져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범준의 뺨은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고운 살갗이 찢어졌다.
재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을 뜨고 있었다.
손에서는 범준의 뺨에서 묻은 피인지, 손이 찢어져서 흐르는 것인지 모를 피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왼쪽 뺨만 맞았기 때문에 오른쪽 귀는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재만이 평소와 같은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합병을 안건으로 올린 주총이 다음 달이다. 한 달. 한 달만 네놈이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입 닥치고 있었으면 끝나는 문제였어. 그런데 갑자기 이혼장을 가져온다고…? 지금도 합병에 말이 많은데 함규명 국장이 등 돌리고 여론이 뭇매질 시작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냐.”
“....”
재만이 의자에 털썩 앉고는 말을 이었다.
“들어볼 필요도 없지. 네가 잠자코 이혼을 받아들였을 리도 없고, 이딴 거나 받아 온 걸 보면.”
“그… 맞습니다.”
초아가 이혼을 요구하며 갖고 온 자료들은 빼도 박도 하지 못할 증거들이었다.
“사장 자리 내려놔라. 그리고 자숙한다는 스탠스로 집 안에 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마.”
범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