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초아와 범준의 신혼집은 한남동 안에서도 부촌에 속하는 곳이기 때문에 한적했다.
초아는 신혼집에서 나와 차를 타고 밤의 도로를 바라봤다.
차창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머리가 흩날렸다.
“시원해.”
집을 나서기 전 범준에게 마지막으로 뱉었던 말을 회상했다.
‘제도 시행되기 전에 서둘러서 진행해. 괜히 늦장 부리면 무조건 법정 싸움으로 갈 거야.’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이혼율을 감소시키기 위해 내년부터 ‘이혼숙려제도’가 시행된다.
자녀가 있는 경우 3개월, 초아처럼 없는 경우는 1개월 동안 법원의 이혼 의사를 확인받아야 된다.
한 달이라는 시간마저 범준과 부부의 관계에 있기 싫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붙인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범준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잠시 생각하던 초아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라도 그를 떠올리면 팔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생각을 돌리자, 아까 강빈과의 전화가 생각났다.
“아직 안 늦었으려나….”
손목시계를 쳐다보자 시간이 9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잠깐 시계를 바라보던 초아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집사님. 김포공항으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항공편이 남아있을까요?”
“상관없어요. 내일 아침 비행기라도 타려구요.”
“예. 차 돌리겠습니다.”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
범준은 눈앞에 놓인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
이미 서류는 초아의 날인을 포함해 모두 작성되어 있었고, 범준이 도장을 찍은 뒤에 법원에 제출만 하면 됐다.
범준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초아에게 전화해보았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전화가 된다 하더라도, 되돌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초아를 잃었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지금 범준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것은, 재만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불어올 후폭풍이었다.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을 위한 주주총회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규명을 잃게 된다는 건, 그동안 비리 합병을 막아왔던 언론의 벽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천억 원의 부채를 지는 바람에 비공식 근신 처분을 받은 상태였는데, 대형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이유가 재만이 그토록 혐오하는 한낮 유희 때문이라니….
“그렇게 조심했는데….”
한국도 아니고 미국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던 게 원흉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주의에 주의를 더했겠지만, 설마 미국까지 와서 사람을 붙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범준은 문득 초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더듬기 시작했다.
필시 간통을 저지른 자신에게 앙금을 품고 있을 터, 위험한 말을 하진 않았나 걱정이 든 것이다.
“전자에 있는 돈을 빼다가 부채를 갚았다고 말했던 것도 같은데….”
태선전자에서 투자금, 직원복지 명목의 돈을 횡령한 금액이 천억 원이 넘는다고 초아에게 말했던 것 같았다.
초아가 독한 술을 가져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러다가 딱, 하고 핑거스냅을 쳤다.
만약 초아에게 횡령한 사실을 터놓았다면, 이혼까지 하는 마당에 대가를 요구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협의이혼 하자며 건넨 자료들은 모두 범준이 바람을 피운 것뿐.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라고 범준은 되뇌었지만 심란한 마음은 더욱 가중되었다.
***
태선호텔 판교점으로 찾아온 규명은 일전과 비교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온순한 얼굴이었다.
“얼굴이 많이 피셨네요.”
“하하…. 부회장님께서 많이 배려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규명의 말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지금은 도쿄로 여행을 떠난 초아와의 전화 통화로 미루어 볼 때, 더 이상 나한테 밉보여봤자 좋을 것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괜히 딴마음 품고 있는 것보다는 이런 태도가 훨씬 낫지.
“보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각본은 국장님께서 직접 감수하신다고 들었는데.”
“예. 서범준, 그놈을 아주 죽일 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몇 사진은 인터넷에 모자이크 없이 풀 생각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아마 공원에서 그 짓… 한 건 공연음란죄로 문제가 불거질 텐데, 또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벌인 거라 꽤 크게 다뤄질 겁니다.”
한국의 공연음란죄는 처벌이 미약하고 애매한 점이 없잖아 있지만 미국은 다르다.
최근 텍사스주에서는 매장에서 성기를 노출한 남성이 6년 형을 선고받았다.
뭐, 범준은 고의성이 없다고 우길 테고 어떻게든 덮을 테니 처벌은 피하겠지만 언론의 뭇매는 감당해야 될 거다.
적어도 한국에서 상판 들고 다니긴 쪽팔려서 못하겠지.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규명이 고개를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그보다 태선전자 횡령 건은 정말 안 터트립니까? 제가 볼 때 이게 진짜인 것 같은데.”
“괜히 같이 터트렸다가 하나가 묻히는 건 싫거든요. 서범준의 외도로 뜨겁게 프라이팬을 달궈놓고 그 위에 태선전자 횡령을 맛있게 맛있게 요리해야죠. 국장님이 잘해주셔야 됩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 상놈의 새끼 제대로 조질 거니까. 하여튼 처음부터 눈꼴 시렸습니다. 언론인을 건드린 최후를 보여줘야죠. 하하. 물론 부회장님은 예외입니다?”
역시 방송 일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욕을 할 때의 말투가 구수하고 찰졌다.
규명에게는 횡령죄를 더 크게 키우기 위해 하나씩 터트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의도는 따로 있었다.
나는 서범준, 그 새끼를 절대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나씩, 하나씩 기사들을 풀어 그의 목을 옥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감옥에 들어가는 서사를 짤 것이다.
서범준의 외도를 보도하는 것은 그 시발점에 불과했다.
규명이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그리고 전해드려야 될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차현섭 의원님이 보도 전문 방송국들에 연락을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들은 것만 세 군데가 넘어요. 그중 하나가 이번에 서범준 외도를 터트릴 YTT구요.”
“무슨 연락을 말하는 겁니까?”
현 국회의원이자 차기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된 현섭과는 지난번에 독대한 적이 있다.
비리 장부에 별표가 그어진 첫 번째 인물.
음습한 폐건물에서 나를 진태의 후계로 인정하고 같이 걸어갈 것을 약속했다.
그 뒤로 나와 직접 만나는 것은 세간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피했다.
지금은 채규가 꾸준히 로비를 하며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형식적인 말들이었답니다. 뭐 정치인들이 어떻게 돌려 말하는지 부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잘 부탁하겠다, 힘든 건 없냐. 그런데 이후로 이어지는 말들이… 부회장 님에 대한 긍정적인 말들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그만한 돈을 기부한 재벌이 있었냐느니, 선대회장님보다 더 큰 부를 축적한 게 대단하다, 세금 관련 싹 다 털어봤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 끝이 없었다네요.”
“그저 칭찬 몇 마디 한 게 의미가 있는 겁니까?”
“뭐 내년부터 기획재정부지만, 아직은 재정경제부 아닙니까. 거기 심기 거슬렀다가 심의 폭탄 맞고, 과도한 광고로 정지 처분 받고 방송국 사라질 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저희 GBC야 워낙 줄타기를 잘하니 그동안 잘 넘겨 온 거고요.”
“이번에 기획예산처까지 흡수할 테니 그 힘은 더 막강해질 거고요.”
“맞습니다. 괜히 심기 거스르지 말고 부회장님께 유리한 방향으로 기사 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거 거스를 방송국, 거의 없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분이 직접 신경 쓰게 만드신 겁니까?”
일차적인 이유야 비리 장부에 당당하게 제 이름 석 자를 박았기 때문이지만,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아마 채규가 더 달콤한 보상을 약속했겠지.
기획재정부 장관 이후에 정치활동 혹은 태선그룹의 임원자리를 약속했을 것이다.
적어도 현섭이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하고 있는 동안은 정계와 관련해 대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 정도도 싸게 먹혔다.
그보다 규명이 처음부터 저자세로 나온 이유가 따로 있었다.
현섭 같은 인물이 내 뒤를 봐주고 있으니 재만을 완전히 버리고 나라는 줄을 잡은 것이다.
이런 박쥐 같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차피 곧 초아에게 그 자리를 넘길 것이니 앞으로 마주할 일은 거의 없다.
“알면 달라집니까?”
“예?”
“장관님과 어떤 관계인지 국장님이 아신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게 아니고….”
“알려고 하지 마세요. 국장님은 그냥 제가 지시한 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규명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재만에게 붙었다가 내 쪽으로 넘어왔는데, 다시 재만 쪽으로 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나는 방금 규명에게 괜히 내 뒤를 캘 생각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럼 가보세요. 시나리오 짜느라 바쁘실 텐데.”
“예. 그럼 이만.”
규명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도망치듯 부회장실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싫은 사람이라지만 이렇게 쫓아내듯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내 화면 위에 떠오른 한 통의 메일 때문이었다.
서둘러 휴대폰을 들어 메일의 발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발신자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응. 에릭.”
“메일 확인 하셨나요?”
“그러니까 전화한 거 아니겠냐.”
“억…! 256억 달러라구요! 대표님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실감이 안 나세요? 저희가 지금…”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서 잠시 스피커를 손으로 눌러 막았다.
에릭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수익이었다.
90억 달러가 조금 안 되게 투자했는데, 2년도 안 돼서 160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봤으니까.
160억 달러면 현재 미국 경제시장의 붕괴로 환율이 많이 내려갔다고 해도, 15조 원은 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상품 회수가 아직 다 진행된 것도 아니었다.
에릭은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하, 하하! 이제 세계에서 대표님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없을걸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요. 아까 저희가 CDS를…”
“에릭. 그만.”
“넵! 대표님 말씀이라면 뭐든 들어야죠.”
에릭은 여전히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지금 얼마나 회수한 거야?”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를 포함한 거대은행의 총 회수율은 71프로구요. 지역으로 나누자면, 시카고, 워싱턴처럼 큰 타격이 없는 곳들은 전부 회수했고, 뉴욕이나 LA의 회수율은 60프로가 조금 안되네요.”
“상품 돌려가면서 회수한다고 했지?”
“네.”
“전부 회수하면 어느 정도 되겠어? 계산했을 거 아냐.”
“아까 제가 말씀드린 거에 148억 달러 추가로 계산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총 수익금이 무려…”
300억 달러를 넘게 벌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