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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23화 (223/249)

#223화

“초아야. 서강빈 부회장 만나고 왔어. 얘기는 다 들었다.”

“....”

초아는 의자에 앉아 방문 앞에 서 있는 규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규명은 죽은 눈을 하고서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 얘기 좀 할까?

“아뇨. 강빈 씨 만나고 오셨다면서요. 그럼 다 들으셨을 텐데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아빠랑 얘기 좀 하자.”

초아가 대답하지 않자, 규명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흠흠. 오늘은 집에서 자고 가는 거니?”

평소에 듣지 못했던 부드러운 목소리에 초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뇨.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신혼집에 들어가야죠.”

비꼬아서 말한 걸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규명이 초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거길 다시 들어간다고…? 그래! 아직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놈 상판만 봐도 속이 썩어 문드러져요. 그래도 평생 안 보려면 정리는 해야죠.”

“초아야…!”

규명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잡고 있는 초아의 손에 이마를 갖다 대었다.

“이혼은… 이혼은 그렇다 치자. 이 아비가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 만든 결혼이지만 포기하마. 그래도, 그래도 GBC 방송국은 안 된다.”

“왜요?”

“뭐?”

“왜 안 되냐구요. 아버지가 방송 쪽 센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영 능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시잖아요. 망해가던 저희 방송국이 되살아난 계기였던 중국 자본을 끌어들인 것도 저였구요.”

“너… 내가 어떻게 GBC 키워왔는데 그렇게 말할 수가 있냐.”

“물론 아버지가 쌓아온 인맥, 그거 하나만으로 그런 단점을 다 뒤덮고도 남는다는 걸 알아요. 적어도 방송계에선 그게 전부니까. 그러니까 그 인맥, 나한테 주고 그만두세요. 저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키울 자신 있어요.”

심지어 초아가 국장을 맡게 되면 강빈이 지속적인 투자를 해주기로 약속했으니, GBC방송국은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다.

규명의 낡은 경영 방침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규명은 한층 더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 아비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소개시켜 주마. 네가 내 딸이라는 건 다 알고 있을 테고, 관계하고 관리하는 법도 모두 알려줄게. 일단 부국장 자리 올려줄 테니까 한 3년만….”

“와. 강빈 씨 대박이네.”

“...?”

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직한 웃음 소리를 냈다.

“방금 아버지가 하신 말씀 똑같이 할 거라고 경고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맞힐 수가 있지? 괜히 실패하지 않는 사업가라고 불리는 게 아닌가 봐요.”

“....”

“인맥이고, 노하우고 제가 국장 자리에 있을 때 의미 있는 거지. 아버지가 그 자리 꿰차고 있는데 누가 저한테 손을 뻗겠어요? 강빈 씨 일 끝나면 바로 제가 국장 달 거예요.”

“너 지금 나한테 통보라도 하는 거냐?”

“네. 아버지가 헤어지라고 하면 연인과 헤어지고, 결혼하라고 하면 쓰레기 같은 자식과 결혼했던 딸은 이제 없어요. 이제 제가 원하는 대로 살 거예요.”

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던 도중 뒤돌아서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국장실에서 담배 좀 그만 피우세요. 이제 제 방이 될 텐데 냄새 배겠어요.”

“너….”

쾅!

규명이 말을 잇기도 전에 거세게 문을 닫았다.

***

규명을 보낸 뒤 초아에게 전화를 걸고서 두 시간쯤 지났을까.

초아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얘기가 빨리 끝난 걸 보니 잘 끝내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잘 끝났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요.”

밝은 목소리에 조금의 가식도 섞여 있지 않은 듯했다.

“저는 투자자이자 사업가인 거 잘 아시잖아요. 초아 씨는 그저 GBC방송국을 잘 이끌어주시면 됩니다.”

“후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동안 아버지 경영하시는 거 보고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야 속 시원하게 밀어붙이겠네요. 그동안 아버지 꼰대 기질 때문에 엎어진 드라마가 얼마나 많았는데요.”

“국장이 직접 컷도 합니까?”

“네. 친구에게 남편을 뺏기고, 남편에게 죽임까지 당했던 아내가 복수한다는 내용의 드라마는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고 컷하지 않나…”

‘어?’

“독설 마에스트로 지휘자가 조금씩 모자란 단원들을 데리고 연주하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클래식이란 소재는 먹히지 않는다고 잘라냈다니까요. 두 작가님들 다른 방송사랑 아직 계약 전인데 어떻게든 다시 데려와야죠.”

“....”

방금 초아가 말한 두 작품 모두 초대박을 칠 드라마들이었다.

전생에는 GBC방송국에 먼저 작품이 간 뒤에 다른 방송국으로 갔던 모양이다.

대본집이나 간단한 시놉시스만 봤을 텐데, 두 작품만 콕 집어 발견해낸 초아의 안목도 보통이 아니다.

“두 작품 모두 꼭 잡으세요. 초아 씨가 국장 달면 걱정할 일은 없겠네요.”

“네. 이제 강빈 씨라는 든든한 자금줄도 있겠다. 작가님들 꼭 데리고 올 거예요. 정신없이 바쁘겠네요.”

“그 전에 휴가나 한번 갔다 오시죠.”

“휴가요?”

“일본 도쿄에 있는 팰리스 호텔을 한 달간 머무를 수 있게 예약했습니다. 거기서 아무 걱정 없이 푹 쉬다 오세요.“

“패, 팰리스호텔이면 도쿄에서 제일 유명한 그 호텔이죠? 하루 숙박비만 수백만 원이라는….”

팰리스 호텔 도쿄는 일반 객실만 한화로 이백만 원 넘었고, 내가 잡은 곳은 스위트룸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이런 돈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초아와 전화를 하고 있는 이 순간에 번 돈이 한 달 숙박비보다 클 텐데.

“네. 더 머무르고 싶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으면 제 비서한테 연락 주시고요.”

“정말 제대로 놀다 올 거예요. 지금까지 못 논 거 다 쏟아내야죠.”

“하하. 그러시죠. 날짜는 오늘부터니 바로 떠나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할 일이 있어요. 후후. 강빈 씨.”

“네?”

“저 지금 서범준한테 이혼장 던지러 가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붙여준 경호원 데리고…”

“괜찮아요.”

초아의 목소리가 워낙 강직해서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강빈 씨 도움을 받을 수는 없죠.”

“....”

“다 해결되고, 나중에 다시 연락해도 되죠?”

“언제든지요.”

“그럼 나중에 봬요.”

그 말을 끝으로 초아는 전화를 끊었다.

***

범준은 최근 들어 자꾸 초아에게 시선을 가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별채에서 지내던 초아를 아예 본관으로 불러들이고 잠자리까지 같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초아는 그녀에게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초아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한 이유는 재만으로부터 비롯됐다.

강빈이 유력한 회장 승계자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범준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범준은 하루라도 여자를 품에 안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렸는데, 사생활 간섭이 시작되자 미칠 노릇이었다.

거기에 더해 컨트리파이낸셜의 부도로 수천억 원의 돈을 잃었을 때, 초아의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초아는 애인으로는 영 부족한 여자일지라도, 아내로서는 꽤 괜찮은 여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안 와?”

범준은 신혼집 본관의 2층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아가 잠깐 규명을 보고 온다며 본가로 떠났기 때문이다.

친구들도 맘 편히 만나지 못하는 지금, 초아는 그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애인이나 다름없었다.

영화관, 놀이동산을 통째로 대관해서 데이트하기도 했다.

모두 초아의 제안이었다.

범준은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점점 초아와 갖게 될 데이트에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호화여객선에서 불꽃놀이를 볼 때는, 처음으로 초아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미쳤지.’

범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녹색 세단 한 대가 주차장 입구에 들어섰다.

최근에 범준이 초아에게 주었던 BMW사의 제품이었다.

범준은 창문을 벌컥 열고 소리 질렀다.

“초아야!”

차에서 내린 초아는 서류철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며 범준을 향해 손을 들었다.

“무슨 좋은 일 있나?”

은은한 미소는 자주 비췄지만, 저렇게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범준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현관이 있는 1층까지 종종걸음으로 내려갔다.

집사가 열어준 현관문 밖에서 초아가 걸어 들어왔다.

초아의 한 손에는 위에서 못 봤던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보라색이었는데, 마치 복실복실한 털뭉치처럼 생겨 생화처럼 안 보였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이야? 무슨 꽃까지 받아 왔어.”

초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응. 특별한 날이지. 그리고 꽃은 당신한테 주려고 사 온 거야.”

“아, 내 거야?”

“오늘을 특별히 기념하고 싶어서. 처음에는 나한테 줄까 하다가, 꽃말을 보는데 어쩜. 당신이랑 딱 어울리는 꽃말을 가진 꽃이 있지 뭐야?”

“그래? 꽃 이름이 뭔데? 나도 아는 건가.”

“알리움.”

“처음 듣네. 생긴 건 조금 거북해도 이름은 이쁘네. 당신처럼 말이야. 흐흐. 뭐, 지금은 봐줄 만하지만 말이야.”

범준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뱉었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어느새 정색한 초아의 얼굴을 확인하기 전까지.

“꽃말이 끝없는 고독이래. 당신이 평생, 죽을 때까지 고독했으면 좋겠어. 그런 염원을 가진 선물이야.”

“...?”

이해가 되지 않아 초아의 말을 되새김질 하려는지, 범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아는 그런 범준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혼장. 합의로 할래, 아니면 법정까지 끌고 갈래?”

“뭐…? 초아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이상한 말이라도 듣고 왔나 본데 우리 얘기 좀 하자.”

“일단 봐. 보면 알아.”

범준이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단 얘기 먼저…”

“보라고!”

초아의 호통에 범준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열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사진들이었다.

두 명의 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부터,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여성들의 사진들, 개중에는 심야에 공원에서 히피 머리를 한 여자와 농밀한 행각을 하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더한 것도 있는데 더러워서 거기까지만 갖고 왔어.”

“...초아야.”

“다시 물어볼게. 이거 다 터트려서 네가 불리한 법정 싸움할래, 아니면 합의로 끝낼래?”

범준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사진에도 시선을 둘 수 없어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합의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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