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규명에게 백 장이 넘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미국을 배경으로 범준이 다인종의 여자들을 품에 끌어안은 채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들을.
개중에는 공원에서 그 짓거리를 하는 사진도 있었다.
“....”
규명은 열 장도 안 되는 사진들만 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대체….”
나는 홍차를 홀짝 마시고는 대답했다.
“신혼여행에 간 동안 찍은 사진들입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초아 씨 부탁으로 찍은 사진들이니까.”
초아에겐 미리 사진이 있다고 말해두었기 때문에 걸릴 것은 없다.
“....”
“서범준이 이런 인간이라는 걸 모르고 계셨을 리 없을 텐데요. 서범준의 만행을 기사화시키는 걸 막은 게 국장님 아닙니까.”
GBC방송국은 예전부터 태선그룹의 치부를 막아왔다.
대놓고 여자를 밝히는 범준의 습성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재벌가 사람이면 흔한 일입니다. 지금 제 눈앞에 계신 서강빈 부회장님도 그런 부류 아니셨습니까.”
확실히 이전 서강빈은 지금 범준과 비슷하긴 했다.
더했을지도 모르고.
“나이가 사십 줄에 아내까지 있는 새끼랑 제 스무 살 시절을 비교하시는 겁니까? 국장님 따님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따님이요. 그놈의 집안이 뭐길래 이딴 놈한테 시집을 보낸 겁니까.”
규명이 떨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만 부회장님을 찾아갈 겁니다. 제가 한 횡령죄, 배임죄? 태선전자의 부회장이 그것도 해결 못 해주겠습니까.”
“그래요. 국장님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칩시다. 온갖 로펌과 법계에 줄을 대고 있는 제가 최선을 다한 법정싸움을, 서재만 부회장이 어떻게든 이겼다고 쳐요. 그럼 뭐가 남습니까? 국장님은 서재만 부회장에게 빚을 진 겁니다. 서재만 부회장은 어떻게든 그 빚을 받아낼 거고요.”
“그놈 아들 자식 때문에 일어난 건데 왜 제가 빚을 진 게 됩니까!”
규명은 서 있는 상태 그대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고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올려 말을 이었다.
“서재만 부회장도 원하지 않던 사업이니까요. 심지어 국장님은 서재만 부회장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셨지요. 중국 자본까지 끌어들이면서 말이죠. 수천억 원의 부채는 서재만 부회장에게도 부담되는 금액입니다. 당장에 합병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선 더더욱 말이죠. 결코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나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 카페에서 자체 블랜딩한 차라고 들었는데, 장미 향과 함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규명이 말했다.
“그래도 서 사위는 사돈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초아는 하나뿐인 며느리고요.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저는 서재만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만한 자본도, 그의 발목을 자를 자료들도 충분히 있고요.”
“...쉽지 않을 텐데요.”
“차실장.”
“예.”
영균이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라디오에 테이프를 넣었다.
-분명 사주한 놈이 서범준 사장님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리고 지금 시기에 김태평 대표 건들 사람이 그놈 말고 더 있습니까?-
“....”
“살인 교사에 대한 녹취록입니다.”
“...살인 교사는 확실한 증거는 없나 보군요.”
“조사 중이긴 합니다만, 예. 맞습니다. 확증은 없어요. 생각보단 치밀하더군요. 그래도 태선전자에서 횡령한 증거는 확실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할 거고요. 다음.”
딸칵이는 소리와 함께 라디오에서 다른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어… 저는 태선전자 재무팀 정경규 팀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뒷부분으로 넘겨.”
-...서범준 사장의 지시를 받고 회사 자금… 예. 정확히 하라고요? 흠흠. 태선전자의 투자금 및 직원복지로 쓰일 자금을 차명의 건물, 차량 금괴로 바꾸어 횡령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세탁한 돈들은 서범준 사장의 차명으로 바로 들어갔고요. 장부로 다 기록해서-
내가 주먹을 올리자 영균이 재생을 멈췄다.
“태선전자 정도 되는 기업에서 사장이란 놈이 횡령을 저질렀습니다. 그 사장이란 놈은 부회장의 하나뿐인 아들 녀석이고요. 이게 다 터지면 제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가 위태로울 겁니다.”
“후….”
규명은 인상을 찡그리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서재만 부회장의 태선전자 지분 확보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비리 합병. 정보들 계속 모으고 있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터트릴 겁니다. 그럼 지금 부회장 자리는 물론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태선AA와 태선전자의 합병 과정에서 서재만은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지를 것이고, 지금도 구채보 실장을 비롯한 밑의 경호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국장님께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태선가에 편입했다는 명예? 엄청난 자산?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국장님께 진 빚을 다 갚기나 하면 다행이겠죠.”
규명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다시 소파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저는 당신같은 족속을 혐오합니다. 혐오하다 못해 염증이 일어날 것만 같아요. 제 앞날을 위해 딸까지 팔아넘기다니요.”
“....”
“하지만 저는 초아 씨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예…?”
“같잖은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사람으로 좋은 감정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 모를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규명의 얼굴이 다시 죽었다.
이런 놈을 아비라고 두고 있는 초아에게 다시 한번 동정심이 일었다.
“회사 명의의 서범준 채권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GBC방송국에 500억 원을 투자하겠습니다. 이후에도 성과에 따라 추가 투자를 한다고 약속드리죠. 중국 자본 개입으로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GBC방송국은 현재 좋은 퀄리티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과도한 중국제품 PPL이나 역사왜곡 논란이 일고 있었다.
내 투자를 받게 되면 그런 부분은 없애고, 제작 프로그램의 질은 그대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진출에 차질을 빚겠지만, 방송국의 앞날을 봤을 때 무엇이 나은 결정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처, 천억 원이 넘는 투자를… 그럼 바라시는 대가가 뭡니까?”
“국장님이 벌인 일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규명이 목울대를 꿀렁이며 이어질 내 말을 기다렸다.
“YTT도 국장님의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YTT는 24시간 보도전문채널로 개국하자마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최초 속보로 내보이며 인지도를 쌓기 시작한 뉴스채널이었다.
지상파 방송사를 제외하면 지금 가장 신뢰도 있는 뉴스채널로 각광 받고 있었다.
그리고 영균의 조사에 따르면 규명의 손길이 미치는 곳이기도 했다.
규명은 불안한 눈초리를 하고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YTT에 제가 제출하는 증거들을 속보로 내보내 주세요. 서범준의 불륜 행각 같은 사소한 일부터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이 비리로 얼룩졌다는 것까지 전부 다.”
“그런 일을 벌였다가 서재만 부회장이 가만있겠어요? 내가 허가 낸 거 다 알 텐데, 명예훼손부터 무고죄까지 온갖 죄를 뒤집어쓸 겁니다.”
“고소까지 가면 세간이 더 떠들썩할 텐데 섣부르게 움직이진 않겠죠. 태선가의 장손자가 세기의 불륜남이라는 오명을 쓸 테고, 그와 동시에 수면 아래 있던 비리 합병이 터지는데 국장님에게 신경 쓸 여유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를 위해 한국에 지사까지 낸 미국 최고의 로펌 ‘앤 무어’부터 비리 장부로 손에 얻은 법조계, 정계 인맥까지.
적어도 내게 유리한 조건이라면 한국 안에서 그 누구도 법정 싸움에서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후…. 알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해보도록 하죠. 일단 채권부터 인수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속보까진 내고 인수하는 걸로 하죠. 벌써부터 괜히 시선 끌 필요가 없습니다.”
GBC방송국이 갖고 있는 600억 원에 달하는 범준의 채권을 내가 인수하면, 범준이 알게 될 테고 준비할 시간을 주게 된다.
거기에 더해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선금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채권을 매각하고 투자를 받을 사람은 규명이 아니다.
“속보까지 내고 자리에서 물러나십시오. 거기까지가 제 조건입니다.”
“예, 예? 저보고 국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겁니까…?”
“이제 제 투자로 움직일 회사 아닙니까. 그런 회사에 죄가 많은 사람이 수장으로 있는 꼴은 못 봅니다.”
“...그럼 저는 모든 걸 잃는데 뭐하러 강빈 씨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초아 씨한테 넘기세요.”
“....”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 딸에게 넘기겠다는 말에도 규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초아에게 들었던 그대로, 욕심이 옹골찼다.
“그래도 자식 복은 있으시더군요. GBC방송국에서 초아 씨 실적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중국 쪽 바이어들과 통한 것도 초아 씨 덕분이죠?”
“...그렇습니다만.”
“마무리만 제대로 하고 초아 씨에게 자리 넘기세요. 당신이 쌓아온 인맥, 노하우 다 동원해서 제대로 키워보세요. 그럼 저는 GBC방송국에 투자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 마지막 제안은 초아가 나에게 부탁했던 일이기도 했다.
모든 사정을 알면서 범준과의 결혼을 강행했던 규명에 대한 복수기도 하다고.
초아에게 듣기로 규명은 영만과 몹시 닮아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안되지만, 어떻게든 주변을 끌어들이고 범법행위를 저질러서까지 제 위치를 지키려고 한다.
그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그녀만의 복수라고 생각한 듯했다.
규명이 뻐끔거리던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뱉었다.
“초아에게 국장 자리를 넘기겠습니다. 부회장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방송국, 신문사 인맥들 전부 소개하고 영업능력을 키워준 뒤에요.”
“제가 호구로 보이십니까?”
“자,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요. 시간 질질 끌면서 몇 년은 더 해먹을 생각 아닙니까. 이렇게 속이 보여서야 어떻게 국장 자리를 유지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
“제가 원하는 시점에 속보를 내고 바로 그 자리 내려놓으세요. 괜히 버티다가 따님과 법정 싸움 벌이지 마시고요.”
초아와의 법정 싸움이라는 말을 듣자 규명의 표정을 순식간에 일그러뜨리며 노성을 냈다.
“초아가 시켰던 겁니까? 내 이년을…!”
“초아 씨에게 경호팀 붙였습니다. 그 경호가 서범준한테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국장님에게 지키기 위한 게 되어 버린다면. 제가 했던 말은 없던 일로 하고 제대로 죗값 치르게 될 겁니다.”
“....”
“아니면 초아 씨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보든가요. 혹시 압니까, 불쌍해서 부국장 자리 정도는 남겨줄지.”
초아는 어떤 대답을 할까.
기대되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