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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21화 (221/249)

#221화

인제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

태평은 옆자리에 앉아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태평이 고개를 돌려 옅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강빈 씨가 아니었다면 오늘이 제 제삿날이었을 겁니다. 뭐라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대표님이 감사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딴 일을 벌인 놈이 잘못된 거지요.”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전생과 같이 이번에도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려 들었다.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허술함이 발목을 잡았다는 것.

“오늘 잡은 두 놈들은 차실장이 처리할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태평은 고민하는 듯 바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찰에 넘겨봤자, 살인 미수에 그치고 뒤에 누가 있는지는 절대 밝히지 않겠죠.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우선 며칠은 쉬세요. 몸이 많이 허해 보입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어도 괜찮겠지요. 내일은 집에서 잠이나 자야겠습니다.”

“예…. 그리고 분명 경호원도 붙였는데 어쩌다가 납치를 당하신 겁니까?”

“경호원들이 화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들어와서는 냅다 머리를 후리더군요. 그러고는 기억이 없습니다. 아, 저를 경호해주셨던 분들은 괜찮습니까?”

“네. 납치를 알린 것도 그들이니까요. 파견 업체 경호원들이어서 제 직속은 아닙니다만 징계를 받게 될 겁니다.”

태평이 무거운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경호인력도 더 차출할 생각이니, 대표님만 괜찮다면 제 직속 사람들로 붙이겠습니다. 오늘 같은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게.”

“...감사합니다.”

태연한 척 굴고 있긴 해도, 사람이 죽을 뻔한 기회를 겪기란 흔한 일이 아니다.

태평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

“표정이 안 좋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채규가 찻잔을 내려놓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김태평 대표가 서범준의 사주로 죽을 뻔했습니다.”

“예…?”

“범인들이 다 실토했고 증거자료로 남겨둔 상황입니다. 확실합니다.”

영균의 말에 따르면 ‘정중한 취조’ 끝에 범인들이 모두 실토했다.

의뢰인이 범준이라는 물증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범준이 범인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법적인 처벌까지 가긴 힘들겠지만, 서범준은 끌어내릴 때 도움이 될 겁니다.”

“...부회장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경호팀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경호팀 추가 차출까지 지시했습니다. 부회장님도 조심하셔야 될 겁니다.”

“저야 살 만큼 살았습니다. 아쉬울 것 없으니 심려 마십시오. 그리고….”

채규가 주름진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아는 것처럼, 무슨 말을 뱉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포근한 얼굴이었다.

“기현이가 직접 관리하지 못하는 유지들이나 명사들도 있을 겁니다. 기획재정부 차현섭 장관이 그런 사람이지요.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차마 거절은 못 하겠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비리 장부를 명목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목에다 칼을 들이대고 명령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런 협박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채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네가 마흔을 넘긴 지 두 해나 지났어. 언제까지 내가 네 뒤치다꺼리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범준은 감히 재만의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국 주택담보시장에서 손실을 본 것을 재만에게 직접 고한 것이다.

결국 걸릴 거라면 차라리 먼저 말하기로 한 이 결정은 초아의 설득이 컸다.

범준은 파리의 날갯짓 같은 목소리를 뱉었다.

“할 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4000억이다. 범준아. 이 중요한 시기에 4000억!”

함규명 국장 개인에게 200억 원, GBC방송국 명의로 600억 원, 중국의 두 투자회사에게 빌린 투자금이 3100억 원이 넘었다.

근 4000억 원에 가까운 돈.

안 그래도 합병 건으로 넣고 있는 로비금만 수천억 원인데 예상치도 못한 부채가 생긴 것이다.

“함국장한테는 뭐라고 했길래 그 돈을 융통해준 거냐?”

“...자신있다고 했습니다.”

재만은 현기증을 느끼며 머리를 짚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금리가 8프로라고 들었다. 지금까지 수백억은 냈을 텐데 그만한 돈은 어디서 난 게냐.”

“그동안 사업하고 투자하면서 모아둔 돈이 있었습니다.”

“...범준아.”

범준은 침을 꼴깍 삼키며 눈알을 굴렸다.

재만이 눈도 뜨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거짓말하면 그때는 나도 별수 없다. 네 이름을 호적에서 파는 수밖에.”

“....”

범준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동안 수없이 경멸 섞인 폭언을 들어왔으나 호적에서 판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게다가 재만의 성격이라면 그냥 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재만이 말을 이었다.

“그동안 네 멍청한 짓들을 다 받아준 건 네가 쓸모없는 새끼지만, 그래도 유일한 피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갉아먹고, 발목을 붙잡는다면 필요 없어. 경영권 승계를 철폐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한테는 안 물려줄 것이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그동안 범준은 태선전자의 정경규 재무팀장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 금리를 갚고 있었다.

반년간 해먹은 돈만 오백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이 순간에도 어디까지 말해야 될지, 고민이 들었지만 범준은 토해내듯 다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재만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도 내 회사 안에서 그딴 짓을 벌였구나.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거라.”

“제 개인 자산까지 모두 끌어다 쓴 사업입니다. 여기서 본 수익으로 아버지에게 힘이 되고 싶었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어요.”

“한심한 놈. 더 말할 가치도 없구나.”

범준이 이를 악문 채 몸을 떨었다.

“재무팀 정경규라고 했지? 일 커지기 전에 그놈한테 일은 다 뒤집어씌우마. 너는… 그냥 그 자리만 유지하고 입닥치고 있어.”

“...알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라. 범준아. 너는 그게 나를 돕는 거다.”

“....”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출근 도장만 찍고 회사 업무에도 손대지 마. 네가 일 처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날로 네 사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될 거다.”

“...예.”

범준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몸을 돌렸다.

***

초아에게 부탁해 규명을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한 카페로 불러냈다.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 있는 카페였다.

오늘 하루 전체를 대관했기 때문에 구석에 앉아 있는 영균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단둘이 본다는 소식이 재만이나 범준에게 들어가면 골치 아플 게 뻔했기 때문에 이곳을 택했다.

규명은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카페에 들어왔다.

“앉으시죠.”

규명은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영균을 보고 몸을 움찔했다.

“제 경호원입니다. 밖에서도 경호원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오늘 회동이 밖에 알려질 일은 없을 겁니다.”

“흠흠. 이렇게 대면하는 건 처음이죠?”

“예. 결혼식 때도 간단한 인사만 했으니까요.”

규명이 모자를 벗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흰 머리가 모자에 짓눌리고 땀에 엉켜 있었다.

얼굴에서 대놓고 불쾌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보다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게 궁금하신 걸 보니 국장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나 봅니다.”

“예?”

“쯧.”

혀를 차는 내 모습에 규명은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치켜떴다.

“지금 서범준 사장이 어떤 처지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게 무슨…”

“미국 주택담보시장에 손댔다가 수천억 원을 공중분해 시킨 건 알고 계시겠죠. 돈을 융통해준 장본인이시니까요.”

“무, 무슨 말입니까! 저랑 서 사위는 그런 관계가….”

규명의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정경규 팀장에게 받은 범준의 차명계좌 목록들이었다.

“이거 다 익숙한 이름들 아닙니까?”

“....”

“서범준은 중국 투자회사 구어메이와 룽시에게 자금을 융통받고 차명 계좌를 통해 컨트리파이낸셜에 투자했습니다. 이 계좌들을 통해서요. 틀렸습니까?”

내가 계좌목록이 적힌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규명은 말없이 그 서류를 노려보았다.

“국장님 명의로도 서범준한테 제법 큰 돈을 빌려주셨더군요. 뭐 이것까지도 국장님 죄는 없다 칩시다. 그런데 GBC방송국 돈은 왜 건드린 겁니까?”

나는 서류를 옆으로 넘겨 다음 장을 규명에게 보여줬다.

GBC방송국의 돈이 서범준에게 융통되고, 그 돈이 다시 서범준의 차명계좌로, 컨트리파이낸셜에 투자까지 이어진 정황을.

“국장님 마음대로 방송국이 움직인다고 해서, 그 돈이 국장님 돈은 아니잖습니까. 이거 꽤 큰 횡령죄 아닙니까? 횡령죄, 배임죄로 실형은 무조건 사실 텐데 괜찮은 거예요?”

“적법한 절차로 서 사위에게 대출해 준 돈입니다만….”

“그거야 조사해보면 알게 되겠죠. 아, 혹시나 윗선에 돈 먹일 생각이라면 접어두세요. 제가 줄 대고 있는 곳들이 꽤 크거든요. 물론 국장님 말처럼 적법한 절차로 대출해준 돈이라면 문제 생길 일 없을 겁니다.”

규명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며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할 말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적어도 오늘은 법원이 아니니까요. 억울한 게 있다면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이익…!”

규명은 화를 낼 것 같다가도, 울상을 지었다가도,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내가 갖고 온 증거만으로도 그가 죄를 지었다는 건 틀림없었으니까.

이윽고 규명이 꺼낸 말은 뻔하디뻔한 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안 겁니까. 사돈어른도 모르는 일일 텐데….”

“제 곁엔 유능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영균을 흘깃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생각에 미친 것을 행동으로 직접 움직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태선전자의 정경규 팀장을 포섭하는 일도 영균이 아니었다면 힘들었겠지.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같은 집안 사람이잖아요.”

“같은 집안 사람이요?”

나는 순수하게 궁금증을 표했다.

분명 범준과 지금 이 몸에는 같은 진태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같은 집안은 맞지만.

“저는 짐승만도 못한 놈한테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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