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태평은 매캐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으읍…!”
냄새가 심해 입으로나마 숨을 쉬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다.
무언가가 입 안 가득 차 있는 모양이었다.
뒷짐을 쥐고 있는 손도 움직이지 않았고, 다리도 강한 조임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기억은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던 태선병원의 화장실이었다.
소변을 보고 있는 와중에, 어떤 거구의 남자가 말을 걸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덜컹, 차의 트렁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밝디밝은 빛이 쏟아졌다.
눈이 녹아내릴 것 같은 통증에 신음을 내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일어나시죠.”
“우읍…? 읍!”
정중한 말투와 달리 목소리의 주인은 난폭하게 태평을 집어던졌다.
얼굴이 무언가에 부딪쳐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장기간 경직되어있던 근육이 무리한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황 속에 태평이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수면 위로 숲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가 당신 묫자리입니다.”
남자가 태평 앞에 툭, 하고 서류철 하나를 던졌다.
“어떻게 죽을지는 당신 하는 거에 따라 달렸고.”
***
태선백화점 대회의실에서는 세계시장 진출에 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예. 이번에 베트남에서 시작한 위탁운영 방식이 직접 투자보다 높은 수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객실마다 현지…”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영균이 대회의실로 들어왔다.
아무리 영균이 경호실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긴 하지만 무례한 행동이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내 옆에 앉아 있던 진석이 질책했다.
영균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내 곁으로 걸어왔다.
나는 진석에게 타이르듯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한 일인가 봅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뚱한 표정으로 영균을 바라보고 있는 진석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일어섰다.
그 사이에 영균은 내 앞까지 당도했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대고 걸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태평 대표가 납치당했습니다.”
“뭐?”
내 소리가 커서인지, 앉아 있던 임원들의 시선들이 단숨에 쏠렸다.
이런 자리에서 떠들만한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차 대기시켜. 일단 나가서 얘기하지.”
“예. 입구에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같이 움직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진석을 보며 말했다.
“고사장님. 오늘 회의는 보류하겠습니다.”
“예?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안건만 잘 마무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꼭 말씀해주십시오.”
그렇게 대회의실에서 나와 자켓만 대충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는 다섯 대가 넘는 검은 세단이 늘어서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던 경호원 수십 명이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나는 손을 한 번 내젓고 영균이 서 있는 차에 올라탔다.
영균도 반대편으로 달려와 차에 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백미러로 슬쩍 보니 검은색 차들이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위치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있고 지금은 용인이랍니다.”
“우리도 바로 출발하지. 지금 그쪽과 가장 가까운 경호팀은 어디야?
“휴가를 냈던 구실장이 안산에 있답니다. 아까 회의실 찾아가기 전에 연락했으니, 지금쯤 영동고속도로 진입했을 겁니다.”
내가 지시를 내리기 전에도 영균은 이미 모든 상황을 고려해 대처하고 있었다.
영균의 딱딱한 말투가 오히려 별거 아닌 일처럼 느끼게 만들어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자 사소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보다 위치는 어떻게 안 거야?”
“김태평 대표 핸드폰에 위치추적기를 심어두었습니다.”
“...허락은 받고 한 거지?”
“...안전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나친 경호 인력은 삼가달라는 말을 듣고 취한 조치였습니다.”
“혹시 내 핸드폰에도 심었나?”
“부회장님은 24시간 밀착 보호를 받고 계시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확실한 건 좋네. 그 화면으로 보는 건가? 나도 보지.”
영균이 한 손에 쥐고 있는 기계의 화면에는 지도와 함께 푸른 점 하나가 점멸하고 있었다.
이 푸른 점이 태평의 위치이리라.
“다행히 멀지 않군.”
멀지 않은 곳에 태평이 있었다.
***
태평은 자신보다 얼굴 하나는 더 클 법한 남자 둘을 바라보았다.
이미 증인이 될 자신을 죽이기로 결정했다는 듯,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남자 한 명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입 안에 가득 차 있던 것을 빼냈다.
막혀 있던 기도가 단숨에 뚫리는 것 같은 이질적인 쾌감이 들었다.
“헉… 헉….”
단단하다 생각했는데, 입 안에 있던 것은 막상 꺼내어보니 하얀 천이었다.
천에서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우, 드러.”
천을 빼낸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천을 던지며 말했다.
“통 안에다가 넣어.”
“예. 형님.”
나시티만 입고 있어 팔뚝에 온갖 문신을 내보이는 남자가 천을 덥석 잡고는 앞에 있는 드럼통 안에다가 던졌다.
태평은 몸 전체가 쓰라린 와중에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서재만이 시킨 거냐?”
수분이 다 빠져 퍼석하고 힘없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한 손으로 태평의 볼을 움켜쥐고는 말했다.
“알아서 뭐 하게. 당신 이제 뒤질 텐데.”
“나 죽이면 그다음은? 대표자리 다른 놈 앉혀다가 찬성표 넣겠다?”
“거참, 말이 많으시네.”
태평이 흐흐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라이 망할 새끼들아. 세상이 알고 서재만이 알고 내가 알아. 나 하나 죽는다고 끝날 것 같아?”
“그건 나 같은 사람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하긴 배운 거 없는 무식한 새끼들이 뭘 알겠냐.”
남자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형씨. 죽는 건 매한가지지만 어떻게 죽는지는 내 손에 달렸어. 나도 괜히 손에 피 묻히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가지?”
“...원하는 게 따로 있는 거야?”
“유서 한 장만 써. 세상이 질려서 먼저 간다고.”
“퍽이나 믿겠네.”
“...쓰라면 써. 당신 노모라도 건사하고 싶으면.”
“영화 속 삼류 악당이야? 아무리 봐도 말하는 게 푼수인데…. 너 이 일한 지는 얼마나 됐냐? 설마 이게 처음은 아니지?”
남자가 거칠게 태평의 뺨을 올려붙였다.
“이런 시건방진 놈이…. 그래서 안 쓰겠다는 거냐?”
“응. 안 써. 내가 너처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줄 아냐? 유서 쓰면, 세상에 미련 없어서 노모랑 동반자살 했다고 몰아갈 거 아니냐. 유서를 안 쓰면, 나는 그냥 실종 처리될 테니 어머니까지 건드리긴 힘들 거고.”
“....”
남자는 말 없이 태평을 보며 고갯짓을 했고, 문신남이 태평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드럼통 안에 태평을 넣었다.
“어이쿠, 아파라.”
문신남이 남자를 보며 말했다.
“형님, 유서는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새끼 성격에 실종 처리했다고 하면 지랄할 게 뻔한데….”
“안 쓰겠다는데 어쩌겠냐. 시멘트 개라.”
“...알겠습니다.”
문신남이 바닥에 시멘트 가루를 붓고는 개기 시작했다.
태평은 몸이 다 묶여 있는 통에도 몸을 꿈틀대며 드럼통 밖으로 머리를 꺼냈다.
“설마 영화처럼 드럼통에 공구리 부어서 생매장하게?”
“...죽인 다음에 부어줄까?”
“하이고… 조폭 짓 할 때도 머리가 좋아야 된다더니. 호수에다가 공구리 쳐서 묻으면 안 들킬 것 같냐?”
“...?”
태평이 쯧쯧 혀를 차며 이어서 말했다.
“생각을 좀 해 봐. 생각을. 사람이 죽으면 몸이 줄어드냐, 마냐?
“줄지…?”
“그럼 공구리 내부에서 빈 공간이 생겨, 안 생겨?”
“…?”
“빈 공간에 썩은 시체에서 막, 응? 가스가 팽창하면 어떻게 되겠어? 드럼통 깨지고 내 시체는 호수 위에 둥둥 떠오르고 경찰 조사 들어가겠지. 그럼 누가 죽였냐, 말 나올 거고 근처 CCTV 다 뒤질 거고. 생각도 안 했지?”
“...더 얘기해봐.”
그 뒤로 태평의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
영균이 위치추적기를 확인하며 말했다.
“인제에서 십분 째 멈췄습니다.”
“여기서 거리는?”
앞에 있던 임기사가 더욱 속도를 높이며 대답했다.
“최대한 밟으면 이십 분 안에 갈 수 있습니다!”
“계속 밟아줘.”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1차선 도로에 진입했다.
도로 양옆으로는 숲이 늘어서 있었다.
뒤따라오는 경호팀 세단들을 제외하고는 인적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거의 다 와 갑니다. 걸어서 3분…. 차 배기음 때문에 여기서는 걸어서 움직이죠. 괜찮겠습니까?”
“그러지.”
갓길에 차 일곱 대가 정차했고, 차에서 나온 경호원들의 수만 대략 스무 명이 넘었다.
종종걸음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숲길을 움직였다.
그많은 인원들임에도 많은 훈련을 거쳐서인지, 벌레가 스치는 듯한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가장 앞서 나가던 영균이 주먹을 움켜쥐고는 팔을 들자 전부 멈춰 섰다.
영균이 뒤를 돌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김태평 대표가 드럼통 안에서 범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바로 덮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균은 익숙한 손짓으로 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도주로를 막으려는 의도인 듯, 열댓 명이 좌우로 흩어져 범인들을 크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균의 뒤에 네 명이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두 명의 범인을 제압하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영균이 기함 소리와 함께 범인의 시선을 끌며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 틈을 타 나머지 경호원들이 옆에서 권총형 테이저건을 범인들에게 쏘았다.
범인들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아주 잠깐 지르더니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
기껏해야 몸싸움으로 제압할 줄 알았던 나는 묘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균은 경호원들에게 드럼통 안에 있던 태평을 풀어주라 지시한 뒤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수십 명이나 끌고 온 게 무색하네.”
“범인들이 몇이나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더 있을지 모르니 주변 수사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그런데 차실장.”
“예. 부회장님.”
“사람이 전기충격에 곧장 기절할 정도면…. 민간 경호업체에선 못 쓰는 테이저건 아니야?”
“예. 그래서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이 있습니다.”
“그래.”
진태의 경호실장이었던 영균에게 무슨 말을 더하랴.
듬직한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범인 두 명은 완전히 기절한 상태로 경호원들에 의해 포박되었다.
그리고 경호원들이 태평을 드럼통 안에서 꺼낸 뒤에 묶었던 줄을 모두 잘라냈다.
태평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