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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19화 (219/249)

#219화

기현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두달 뒤에 태선전자 임시 주주총회가 잡혔습니다. 주요 안건은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이라고 합니다.”

“기사는 떴어?”

“뜨긴 떴습니다만… 워낙 작게 나온 기사들이라 이슈몰이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처리하려는 겁니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가 보지.”

결국 재만은 이 비리합병을 성사시키려 하고 있었다.

전생의 태선물산과 태선패션의 합병에서 이름만 바꿔서 말이다.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잡힌 거 보니까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 찬성을 받아냈나 보네.”

“예. 공문으로 합병 찬성한다고 내려왔습니다.”

“김태평 대표는?”

“성공투자증권사는 아직도 반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사진들은 전부 찬성하는데, 대표 본인과 주주들 의견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후….”

예나 지금이나 태평은 고집 하나는 끝장나는 인간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뜻을 안 굽히는 인간이 태평 말고 또 있을까.

폐암에 걸려 죽지 않았더라면 범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태평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과박스는 계속 돌리고 있지?”

“예.”

진태에게 받은 별장 안에는 금괴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꾸준히 사과박스에 담겨 명단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언젠가 확실히 써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일단 명단에 있는 태선전자 주주들한테는 확실하게 압박 넣어.”

“이미 압박 넣고 있습니다. 명단에 있는 주주들은 저희 뜻대로 움직일 겁니다.”

“잘했어.”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이는 이런 점이 기현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채규 밑에서 일을 배워서 그런지 몰라도 무슨 일을 시키든 확실하게 일했다.

재만은 합병 안건이 통과 될 거라고 확신을 했으니까 주총을 열었을 것이다.

명단에 있는 태선전자 주주들 중 지금은 합병에 찬성을 표방하고 있는 인물들도 있으니 큰 변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재정경재부가 기획재정부로 신설할 거라고 합니다. 차기 장관은 차현섭 의원으로 결정됐구요.”

“드디어….”

일주일 전, 12월 19일에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에 따라 현섭이 기획재정부의 초대 장관으로 추대된 것이다.

정부조직법상 기획재정부는 행정 각부의 서열 1순위이고, 기획재정부장관은 모든 장관들 사이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갖는다.

진태가 장부 속 명단에 별표를 친 인물들 사이에서도 가장 상단에 있었던 차현섭.

이제 그를 이용할 때가 왔다.

***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만날 사이입니까.”

태평의 날 선 목소리를 듣자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말단 사원 시절 그렇게도 얼어붙었었는데.

이제는 태평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도 오히려 반가웠다.

“당당한 사람들끼리 뭐가 두려워서 몰래 만납니까?”

내 말에 태평은 난을 닦던 손을 멈췄다.

“그 말은 강빈 씨가 태선전자 합병과 무관한 이유로 저를 찾아왔다는 걸로 들리는데 맞습니까?”

이전에 진태의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는 ‘부회장님’이라더니, 어지간히 태선에 정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뭐, 무관하진 않지만 반대되는 입장도 아닙니다. 저도 태선전자와 태선AA의 비리 합병이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비, 비리 합병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구나.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태평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합병보고 비리 합병이라고 한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말입니다. 하하. 설마 태선가 사람한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태평이 호방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강빈 씨에게 악감정은 없습니다. 심지어 제 생명의 은인이지 않습니까.”

장례식장 이후 태평을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태선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게 했었다.

태평은 그 건강검진에서 폐암을 조기 발견하고 별 탈 없이 수술까지 끝낸 상태고.

“제 성격상 강빈 씨 아니었으면 건강검진 받을 일도 없었을 거고 폐암도 크게 번졌을 겁니다. 그럼에도 태선그룹에 대한 반감 때문에 날 서 있었던 점은 크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저 또한 태선그룹의 중추에 서 있지만 서재만 부회장의 과도한 경영 방침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니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런….”

태평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를 좁혔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얼굴은 그가 가장 기분 좋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제가 감히 이런 분을 오해했던 겁니까? 우선 앉으시죠. 거기 장실장! 문 뒤에서 엿듣고 있지 말고 여기 차 좀 갖고와!”

그때 살짝 열려 있던 문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여, 엿듣고 있던 게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하하! 차 타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필준이 허둥대며 문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생에서 나에게 태선물산과 태선패션의 합병에 찬성 의견을 표하라며 욕지기를 내뱉었던 인물이다.

지금도 대표방을 엿듣고 있는 걸 보니 벌써부터 윗선과 결탁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뒤뚱거리며 나가는 것을 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 새끼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네.”

“예?”

“아, 혼잣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태평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응대용 소파에 앉았다.

“그보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만약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라고 말씀하시려는 거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는 대표직 유지하는 한 이 의견을 철회할 생각 없거든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입니까?”

“예…?”

“말 그대로입니다. 누가 목에 칼을 대고 찬성하라고 해도 반대 찍을 겁니까?”

“그게 무슨… 제 목숨이 위험하다는 겁니까?”

태평을 보며 어떻게 말해야 될지 고민했다.

서범준이 당신을 죽일 거라고 말해도 쉽게 믿을 것 같지 않았고, 혹시 믿더라도 태평 성격상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윗선에선 압박하고 밑에서는 깔보는데 대표 자리를 유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다른 이유야 있겠습니까. 제가 있고 싶어서지요. 그리고 저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요.”

필준이나, 성공그룹 임원진들에겐 몰라도 태평은 인망이 두터웠다.

직급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며, 윗선에 할 말은 한다는 성격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나도 태평을 따르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부모와 연을 끊고 혼자 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태평은 유독 나를 챙겼다.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나를 불러 둘이서 술자리를 가질 때도 많았다.

어쩌면 내가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합병에 반대했던 것도, 태평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고 태평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서재만 부회장… 대표님 생각보다 훨씬 잔인한 사람입니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요.”

“저에게 책임질 가족이라곤 노모 한 명밖에 없습니다. 처자식도 없고, 독자여서 형제도 없지요.”

이전에도 들었던 얘기를 다시 듣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태평이 시선을 올리고 묽은 미소를 머금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만큼 저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희 기업한테 맡긴 개미들은 다를 겁니다. 한 가정의 가장일 수도 있고, 자식이 다섯이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이 외환위기 여파로 모두 일자리를 잃고 집안의 기둥이 된 사람도 있을 거고요. 저는 그 사람들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

“강빈 씨가 보기에도 저라는 놈, 참 멋지지 않습니까? 제 자랑을 더 해보자면, 저를 믿고 성공투자증권사에 투자한 사람들이 꽤나 됩니다. 저는 법 테두리 안에서 그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전생보다 더 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태평은 변함없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호 팀을… 붙여줘도 되겠습니까?”

사실 파견 업체를 통해 태평이 눈치채지 못하게 경비를 붙이고 있긴 했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태평의 출퇴근 길에 몰래 따라붙는 게 다였으니까.

“강빈 씨 표정을 보니까 장난 같지는 않네요. 저 정말 위험한 겁니까?”

“확실한 건 없습니다만…. 예. 위험해 보입니다.”

“흠… 저한테 바라는 게 있습니까?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제가 김태평 대표님의 아주 오래된 팬이거든요.”

태평을 알게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고, 그 시간 동안 태평은 늘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태평은 내 의중을 가늠해보려는 듯 눈을 좁게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강빈 씨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인데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앞으로는 더 자주 뵙도록 하죠.”

그때 태평이 고개를 문 쪽으로 홱 돌렸다.

“장실장! 또 쥐새끼처럼 엿듣고 있어?”

그러고 보니 차를 타러 간다고 나갔던 필준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필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하하…. 제가 차를 타는 방법을 잘 몰라서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별 같잖은 변명도 다 있구만.”

필준은 갖고 온 컵에는 녹차티백이 두 개가 잠겨 있었는데, 이미 식어있는 데다가 색깔이 진한 것으로 보아 이미 마시기는 글러 먹었다.

“어휴…. 됐다. 실장한테 차를 시킨 내가 못난 놈이지. 그대로 들고 다시 나가.”

“예, 예… 죄송합니다.”

필준이 눈알을 굴리며 나와 태평을 번갈아 보고는 차반을 들고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이거 미안합니다. 제가 나가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하죠.”

“제가 곧 회의가 잡혀 있습니다. 차 말고 다음 주 중에 식사를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태평과 꼭 다시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

한국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삼겹살집.

에릭과 자주 가는 단골집이기도 하지만, 태평이 나에게 처음 술을 사준 곳이기도 하다.

전생에서 태평이 요절하는 바람에 자주 가지 못했던 한을 이번에 풀 생각이었다.

“비싼 건 아니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저는 싸구려 맛을 즐깁니다. 기대해보죠.”

농담을 끝으로 태평의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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