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정경규 팀장이 갖고 온 자료들입니다.”
영균이 건넨 서류에는 범준이 그동안 차명으로 써오던 계좌들의 목록과 횡령을 지시했다는 정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뽑아낼 수 있는 거 다 뽑아내. 돈은 처음부터 크게 주지 말고.”
“예. 어제 갖고 온 정보에 3억 원 지급했습니다. 남은 돈 가방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다음에는 더 큰 걸 물고 올 겁니다. 다 토해내고 해외로 도주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말은 했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애초에 횡령하다가 서범준한테 붙은 거라며. 정보 다 뽑아낸 다음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회삿돈을 빼먹는 놈한테 해외 도주까지 시켜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현재도 복역을 살고 있는 노정환처럼 죗값을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노크소리와 함께 윤비서가 들어왔다.
“함초아 양이 찾아왔습니다.”
“들여보내.”
간만에 본 초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유약했던 눈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두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냥 뵙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앉으시죠.”
그동안 초아는 범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토록 질색하던 범준이 별채에서 살고 있던 초아를 본관으로 불러들일 정도였다.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초아는 멍하니 찻잔을 바라보다가 홀짝이고는 말했다.
“아뇨. 제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조용히 요양이라도 다녀오시면 제가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태선전자와 태선AA의 주가조작을 고발하고 사건을 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애매하게 결말을 내면, 재만과 범준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그들을 확실하게 잡을 덫을 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초아가 유약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그 사람 제가 직접 끝장내고 싶어요. 세상 모든 걸 가진 것처럼 구는 서범준이 모든 걸 잃는 걸 제 눈으로 볼 거예요. …그리고 제가 주는 정보들 꽤 괜찮지 않았나요?”
“예. 충분히 도움 되었습니다.”
범준이 정경규 팀장을 통해 회삿돈을 횡령하려 든다거나, 옥상에서 밀회를 갖는다는 것은 초아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영균 휘하 경호원이 태선전자에 잠입해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건 영균의 인맥과 능력 덕분이겠지만.
초아가 아니었다면 시작도 못 할 일이었다.
“그 사람. 가까이서 보니 더 약하고 악한 사람이더군요. 그만큼 접근하기 쉬웠구요. 한 달 전만 해도 저를 무시하며 손찌검하던 사람이 이제는 저 없이 못 사는 것처럼 굴어요.”
“서범준이 단순한 놈이긴 하죠.”
“매일같이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서 참고 있어요.”
“....”
“강빈 씨.”
“말씀하세요.”
“그때 말하셨던 거… 다시 한번 말해주세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초아를 보며 천천히,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서범준을 끝내겠다고.”
이 약속은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
2007년의 상반기가 지나갔다.
지난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에서 제주 화산섬 및 용암동굴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애플이 드디어 1세대 아이폰을 미국에 출시했다.
그리고
-금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이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에 납치됐습니다. 버스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남부 칸다하르로 출발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아프간에 선교활동을 떠났던 23명의 한국인이 납치당했다.
나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정부 측에 천억 원 보내고 빠르게 협상 타결시키라고 전해. 시간 끌수록 사람만 죽어난다고.”
“알겠습니다. 청와대 쪽에 연락해 대테러센터에 지시 내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론에는 태선재단에서 기부한 거라고 하고. 괜히 내 이름 언급되게 하지 마.”
기현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돈은 보내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탈레반은 협상금을 받고 성공적인 납치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을 대놓고 호구 취급했었다.
지금은 돈으로 해결하지만, 용병이나 특수부대 측에 직접 의뢰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 여전히 넘쳐나는구나.”
한숨을 쉬고 TV를 껐다.
그때 에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응.”
“컨트리파이낸셜 부도처리 됐습니다. 그리고 STT랑 COB도 파산보호를 신청했고요. 그때 대표님이 말씀 안 하셨으면 수조 원이 날아갈 뻔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STT와 COB에 GB인베스트먼트의 자금이 수십억 달러는 들어 있었다.
둘 모두 모기지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곳이라 자금을 뺐던 기억이 났다.
“내가 아니더라도 네가 미리 손 썼겠지. 그 정도 눈치도 없이 GB를 키운 게 아니잖아?”
“하하. 듣기 좋네요. 그리고 월드제로와이드뱅크도 파산 위기래요.”
“모기지 주력으로 하는 곳 중엔 1등 은행 아니야?”
“네. 은행 예금 인출에도 문제 생긴 지 꽤 됐다고 하더라고요. 기업보험 회사들의 손실만 수백억 달러가 넘을 거라고 하던데…. 아마 다음 달에는 더 심각할 겁니다.”
미국은 세계 GDP의 20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경제시장이다.
그런 미국의 GDP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로 4퍼센트나 급락했으니, 한국 내 금융시장에도 후폭풍이 불어올 수밖에 없었다.
***
태선전자 최상층의 이사회실에서는 긴급 임원 회의가 열렸다.
모여든 사람들은 태선전자의 임원진과 태선AA의 임원진.
구성으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두 기업의 합병이 이번 임원 회의의 안건이었다.
어디에도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안건이기 때문에 비서들은 물론, 경호팀마저 문 앞에서 대기할 뿐 이사회실로 들어오지 못했다.
재만이 자리에 앉은 임원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공식적으로 임시 주총을 열까 하는데 어떻게들 생각하나.”
임원진 모두 눈치를 보고 있는 와중에 태선전자의 전무이사, 지완수가 말을 꺼냈다.
“국민연금관리공단까지 저희 쪽에 손을 드는데 막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국민 정서도 합병하는 게 옳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시만 내리시면 바로 절차 밟겠습니다.”
그때 태선AA의 부사장이 반박하며 말했다.
“언론 쪽을 장악해서 반대하는 여론을 죽이긴 했습니다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저희 회사 앞에서 진을 치고 시위하고 있고요. 지금도 소액주주들과 시민단체들이 합병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임원도 말했다.
“소액주주들이야 밟을 필요도 없이 그냥 무시하면 됩니다. 문제는 성공투자증권 아니겠습니까. 어제도 그쪽 대표가 기자회견 열어서 비리 합병에 찬성표 던지지 않겠다고 떠드는 거 막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성공투자증권을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뭉치면 꽤 성가실 겁니다.”
“성가신 정도가 아닙니다. 합병에는 성공한다 한들 신용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태선전자를 신뢰하겠습니까?”
“저희 쪽에서 로비하려는 정황도 수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태평 대표 조만간 크게 한 번 사고 칠 겁니다.”
“성공그룹에서 압박넣겠다 한 건 어떻게 된 겁니까? 태선전자 재무팀에서 진행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만은 임원들의 말을 들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투자증권사가 1프로가 조금 넘는 지분을 들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의 지분으로는 합병을 막아설 수는 없다.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대표, 김태평.
그를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뭉치고 있다고 하니, 태평만 사라진다면 반대 세력은 와해되고 합병은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만.”
“....”
재만의 한 마디에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던 이사회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언론을 건들던, 비자금 횡령을 만들어내건 어떻게 해서든 김태평이만 대표 자리에서 내려. 그럼 다 해결된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임원진들은 마치 재만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장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있고, 권력 있는데 쓸데없이 힘싸움할 필요 없지. 끌어내리기만 하면 끝나.’
재만 옆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범준이 씨익 웃었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재만의 비서가 들어왔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니까 저가 직접 쳐들어와?”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쯧. 무슨 일이야?”
“홍여환 이사장님이 찾아왔습니다.”
“뭐? 잠깐만 내 방에서 기다리라고 전해. 금방 가지.”
“알겠습니다!”
재만의 비서가 고개만 살짝 숙였다가 다시 달려 나갔다.
“먼저 가볼 테니… 서범준 사장이 마무리 해.”
“예. 부회장님. 끝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재만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부회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재환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재만은 거친 숨을 한 번 내뱉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언질 주셨으면 제대로 안내 드렸을 텐데요.”
“제가 참 서프라이즈를 좋아합니다. 허허.”
“서프라이즈라니… 설마 통과시킨 겁니까?”
전에 여환은 공식 전문위원회가 아니라, 자신이 지휘하고 감동하는 투자위원회를 동원해 재만의 의도대로 합병 찬성을 결정시키겠다고 말했다.
재만 입장에야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공식 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은 찬성 결론이 나오기 어렵다고 밝혀 반신반의하던 참이었다.
“예. 현 정부도 끝물이라 그런지 일이 쉬웠습니다. 운이 좋았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재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환에게 걸어갔다.
여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재만과 포옹하고는 떨어졌다.
“아마 이번 합병으로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입을 피해만 최소 5천억 원입니다. 아시죠?”
재만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갖고계신 AA지분만 해도 삼천억 원이 넘게 뛸 텐데 더 원하신다는 겁니까?”
“하하. 아뇨. 그 돈만으로 충분합니다. 제 말은 나중에 필시 징역을 살게 될 텐데… 이때 힘 좀 써달라는 겁니다. 이제 회장 자리 오르실 텐데 그 정도 힘이야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에야 주먹구구식으로 합병을 진행하려 하지만, 결국 이 정도 규모의 합병은 반드시 문제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불공정한 합병을 진행하는데 찬성한 여환은 나중에 받게 될 처벌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장님이 징역을 오래 살게 되면 저희도 비리 합병을 인정하는 꼴인데 그렇게 만들겠습니까? 약속드리겠습니다. 길어야 2년. 아니면 집행유예로 끝내드리겠습니다.”
고의가 아닌 과실(過失).
그것이 재만의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