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증시는 호조긴 한데, 모기지 터지면서 지금 시장 자체가 불안정해서 지금은 신규투자보다 기존 투자처 관리를 할 생각입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에릭은 아마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때때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늘 장난기를 거두고 정색했으니까.
“그래. GB가 연구한 투자는 줄이고 내가 말한 기업투자에만 집중해. CDS로 벌어들일 금액이 대충 예상 가지? 예산계획 미리 짜고.”
“당연하죠. 그런데 CDS 규모가 계속 커지니까 계획도 바뀌네요.”
“수익은 계속 불어날 거야. 지금보다 두 배 생각하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CDS(신용부도스왑)로 인한 수익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금액 면과 지역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수익은 예측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아직 이 사태가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최근 미국 정부 측은 다년간 이어온 3년 만기 재무부 채권 발행까지 중단할 정도였다.
“그보다 이번 대선도 주택 정책을 많이도 갖고 오던데요. 재건축규제니, 보유세 완화니 건드리고 서민들 피 빨겠다는 거잖아요.”
“한국에 집도 없는 사람들이 해외부동산 쪽으로 눈 돌리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모기지 사태 보고 느낀 게 많나 보지.”
“하… 맞다. 그리고 반도체 D램 가격이 폭락했다면서요. 태선전자 주가가 또 최저치 갱신했다는데,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대표님이 갖고 계신 전자 주식도 꽤 되잖아요.”
한국 증시는 종합지수 1700선을 돌파하며 급등세였지만, 태선전자 연일 하락세였다.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춰왔다면, 이건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로 언젠가 맞을 풍파였다.
D램 가격이 폭락한 게 이유라기보다, 그동안 과도하게 평가받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망해도 태선전자가 망할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가 괜히 나왔겠냐. 쓸데없는 걱정이야. 신제품 출시하고 기술개발 공개하면 60만 원 선은 그냥 뚫을 거다. 그보다 합병이 문제인 거지.”
“그러게요. 심지어 각종 언론에서도 주가 회복을 하려면 AA를 먹어야 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니….”
“그러려고 초아 씨랑 결혼시킨 거 아니겠냐. 함규명 그 양반, 생각보다 힘있는 인물이더라.”
전생에선 규명이 표면 위로 나선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은 태선을 등에 업고 활개치고 있었다.
최근에는 언론포럼이라는 단체까지 만들어 초대 회장을 해먹고 있을 정도였다.
“아무튼 나도 가만 있을 생각 없어. 합병 불합리한 증거들 계속 수집하고 있고.”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태선전자까지 먹으면 대표님이 그토록 바라시던 태선을 먹는 거잖아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라.
“그래.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
손가락을 두드리며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바라봤다.
지팡이 위에 손깍지를 한 채 진태가 망연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당신이 원하던 태선을 내가 보여줄게.
***
“사장님. 진짜 왜 그러십니까. 이러다 저 잘립니다. 아니, 잘리고 끝나면 다행이지 감빵 간다고요!”
“이 새끼가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지금 당장 보내줄까?”
“하… 사장님 저 진짜 곤란합니다. 지금도 회계팀 압박 들어오는 거 사장님 이름 대면서 겨우 버티고 있는 거 아시잖습니까.”
헬기 착륙장이 있는 태선전자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범준과, 태선전자 재무팀의 정경규 팀장이었다.
은밀한 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범준은 이곳으로 사람을 부르곤 했다.
그중 가장 많이 불려온 인물이 바로 경규였다.
둘의 인연은 태선식품에서 시작된다.
7년 전 태선식품의 경리부 직원이었던 경규는 소규모 횡령과 물품을 외부업체로 빼돌리다가 범준에게 걸렸고, 그걸 빌미로 완전히 범준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태선식품에선 수억, 수십억 단위로 빼돌리다가, 범준이 태선전자로 이직한 뒤에는 횡령하는 금액이 백억 원을 넘어섰다.
그리고 현재, 범준은 다시 한번 회삿돈을 빼돌리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팀이 냄새 맡으면 그대로 끝입니다… 예?”
범준이 경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목을 가볍게 압박했다.
“그동안 잘해왔으면서 이제 와서 손 떼겠다고?”
“으으…. 숨 막힙니다. 컥, 컥.”
범준이 어깨동무를 풀자 경규가 연거푸 헛기침을 토해냈다.
“헉, 허억. 태선식품이랑 태선전자랑 급이 다릅니다….”
“지금 네 이름으로 빼돌린 것만 천억 넘어가는 거 알지? 그거 다 뒤집어쓰기 싫으면 진행해야 될 텐데. 그때 가서 내 이름 팔아봤자 믿어줄 사람도 없을 테고. 흐흐.”
“제발….”
“대신 이번 건 성공하면 1억 정도는 네 계좌로 쏴 줄게. 그럼 됐지?”
“그걸 누구 코에 붙입니까….”
“싫음 그것도 받지 말던가. 아무튼 빨리 진행해. 나 인내심 없는 사람인 거 너도 알 거 아니냐.”
“...이번만 처리하면 저 이제 놔주시면 안 됩니까?”
범준이 경규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말했다.
“나 회장 자리 오를 때까지만 그 짓해. 그럼 혹시 아냐? 너도 어디 계열사 사장 올려줄지.”
경규는 범준이 회장이 될 리도, 설사 된다 한들 자신에게 계열사 사장을 줄 리는 결코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내력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간다. 한 십분 있다가 내려와.”
범준은 경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텅 빈 옥상에서 경규는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절망에 빠진 그를 놀리기라도 하는지, 하늘은 몹시 맑고 쾌청했다.
“서범준 이 개 같은 새끼…. 물고기 밥으로 줘도 아깝지 않을 놈, 다시 태어나면…”
시작된 욕지거리는 장장 5분에 걸쳐 진행되었다.
경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욕을 뱉고 나서야 발걸음을 뗐다.
천천히 걸어가 밑으로 내려가는 문을 열려는 순간.
“정경규 실장님.”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경규는 식은땀이 겨드랑이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누구…?”
옥상 문 옆에서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특색 하나 없이 지극히 평범했다.
괴리감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오늘 퇴근하시고 봉천동에 있는 송영국밥집으로 가십시오. 부탁은 아니고 지시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내일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당신이 한 일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누구시길래…?”
“국밥집에 가시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질문은 안 받겠습니다.”
“....”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방금 전까지 같이 있었다는 게 안 믿겨질 정도로 짧고 기이한 대화였다.
저녁이 되고 경규는 곧장 봉천동으로 향했다.
아까의 대화는 꿈인가 싶었지만 틀림없이 현실이었고, 남자가 자신의 횡령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범준만으로 벅찬데 새로이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송영국밥은 봉천동 내에 있는 달동네 초입에 있었다.
허름한 간판 앞에는 아까 보았던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
다시봐도 남자의 얼굴은 길거리에서 흔하게 보이는 얼굴이었다.
경규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고는 곧장 입을 막았다.
적어도 그가 마주했던 사람들 중에선 가장 거대한 사람이 식당 가운데에 앉아서 국밥을 먹고 있었다.
앉은키만 해도 경규의 키와 비슷했는데 서 있기라도 하면 한참 올려다보아야 하리라.
게다가 인상도 험악한 것이 조직폭력배의 두목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비주얼이었다.
이 넓은 식당에 주인도 보이지 않고, 남자 한 명만 덩그러니 앉아 있으니 더 공포스러웠다.
남자가 둔탁한 소리로 말했다.
“앞에 앉아.”
“...예! 알겠습니다.”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곧장 대답하며 쪼르르 달려갔다.
앞에 앉은 남자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숟가락에 후 불고는 국밥을 떠먹었다.
“처자식도 있는 양반이 많이도 해먹었더라.”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쾅!
“....”
남자가 한 번 쳤을 뿐인데 책상이 주저앉았고 국밥을 품고 있던 뚝배기가 엎어졌다.
“한가한 사람 아니다. 다 알고 온 거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알겠어?”
경규는 겁에 질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이제부터 서범준이 저지른 횡령, 차명계좌, 비자금에 대한 정보들을 갖고 와.”
“저보고 서범준 사장님을 배신하라는 겁니까…? 그랬다간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지, 뒷감당 못 합니다.”
남자가 옆에 있던 알루미늄 가방 두 개를 한 손으로 들어 무너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수금 2억 원이다. 정보의 가치에 따라 100억 원까지도 지급해주지. 그 정도면 가족 데리고 한국 떠나기 충분하지 않나? 그리고 이 제안을 거절하면 너는 어차피 인생 커리어 끝나. 잘 생각해봐.”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남자가 딸깍 소리를 내며 알루미늄 가방을 열었다.
녹색 지폐가 깔끔하게 정리된 채 가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방 하나당 1억 원씩, 총 2억 원이었다.
범준은 잘해야 1억 원 던지고 말겠다는데 선수금부터 그의 두 배인 것이다.
게다가 정보의 가치에 따라 값을 쳐주겠다고 하니 금액적인 부분은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좋습니다. 저도 하고 싶어요. 그런데 한국 뜬다 한들 서범준, 그 사람이 반드시 보복할 겁니다. 후환이 두렵습니다.”
“사람 흔적 지우는 건 일도 아니야. 그건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지.”
남자는 말을 하고는 일어섰는데, 천장에 머리가 닿아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남자가 경규의 옆자리에 앉고는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도 서범준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아. 그동안 옆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 자네가 횡령한 돈은 서범준이 다 가로채지, 그러면서 푼돈을 던지고는 생색을 내질 않나, 자신을 위해 헌신한 사람에게 협박까지? 그건 아니지.”
“....”
“나도 정경규 팀장처럼 힘든 시절 있어서 다 알아. 그리고 자네랑 비슷했던 사람들 내가 준 돈으로 싹 다 해외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어. 사람이 그래도 발은 뻗고 자야 될 거 아니야. 지금 사는 게 사는 거야?”
“맞습니다.”
경규는 알루미늄 가방을 닫고는 제 품에 안았다.
“...내일부터 서범준 관련 정보 갖고 오겠습니다. 돈은 미리 준비해주십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친구네. 좋아. 내일 우선 십억 원을 갖고 오지. 다 준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하루 만에 십억…. 예. 꼭 가치 있는 정보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내일도 퇴근하고 이곳으로 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이름도 몰라서….”
남자가 두터운 팔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편하게 차실장이라고 불러.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