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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16화 (216/249)

#216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던가.

지금이 딱 그랬다.

초아와의 전화가 끝나고 에어컨도 틀지 않았는데, 몸이 으스스 떨린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고 이혼을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초아는 조금 더 범준 곁에 남아서 나를 돕겠다고 밝혔다.

범준을 불행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고 말이다.

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짧게 대화를 나눴음에도 초아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쯤되면 재만이 범준을 찾아가거나 호출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안 보였다.

응대용 소파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기현에게 말했다.

“서범준이 중국자본까지 손댔는데 서재만 부회장이 가만있을 리가 없어. 뭔가 있는 거 같지?”

“예. GBC방송국도 그렇고 중국자본에 돈을 빌린 건 서범준 사장의 명의인 것 같은데, 아마 투자할 때 가명을 쓴 것 같습니다.”

“차명계좌 뒤져봐. 그리고 태선AA에도 서범준 차명주식도 있을지 모르니까 더 조사해보고.”

“예. 알겠습니다.”

태선AA는 연일 우상향하고 있는 가운데, 재만의 차명으로 밝혀진 계좌들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차명계좌는 확실했지만 아직 소속이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발견되었는데, 범준과 연계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언론 쪽에도 흘릴까요? 꽤 타격이 클 겁니다.”

“일단 보류. 지시한 것만 진행해.”

“알겠습니다.”

범준이 방송국 및 중국 자본에 큰 부채를 떠안았다는 사실이 언론을 타면 태선전자 주가에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서재만 좋은 꼴밖에 안 되지.’

지금도 태선전자의 주가를 내리기 위해 혈안인 마당에 내가 나서서 도울 생각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태선전자 주식도 꽤 되고 말이다.

***

“내가 자네를 왜 부른지는 잘 알고 있겠지.”

규명은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범준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범준이 규명을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고 싶은 사람한테 이렇게 재까지 뿌려야겠습니까?”

“뭐, 뭐…? 그걸 말이라고….”

“저기 장인어른? 제가 돈을 안 갚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8프로나 받아 처먹는 이자를 안 낸다고 했습니까? 이번 달도 깔끔하게 금리 정산했는데 이러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

“3000억 빌려준 중국 놈들도 가만있는데 왜 장인어른이 난리냐 이 말입니다.”

수천억의 돈이 종이 쪼가리가 되었는데도 범준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규명은 울컥 화를 토해낼까 하다가 결국 타이르듯 말했다.

“200억 원이면 내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돈일세. 거기에 방송국 돈도 600이나 끌어쓰지 않았나. 그리고 중국투자처에서 갈구는 것도 자네가 아니라 나란 말일세.”

“어휴.”

범준은 혀를 한 번 차고는 규명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장인어른. 여차하면 아버지께 말씀드릴 테니까 너무 심려치 마세요. 그리고…. 정보 안 새어 나가게 조심하시구요.”

아직 범준의 명의로 수천억 원의 부채가 있다는 건 재만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차용증에는 범준의 이름으로 썼지만, 컨트리파이낸셜에 투자할 때는 수십 개의 차명계좌로 분산해서 투자했기 때문이다.

만약 범준의 이름 그대로 투자했다면, 컨트리파이낸셜이 부도를 내기 전에 이미 재만이 알아차렸으리라.

“뭐… 이자만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면.”

규명은 말을 한번 끊고는 이어서 말했다.

“장인께도, 언론에도 흘릴 일 없을 걸세.”

범준은 이를 한 번 갈고는 대답했다.

“그 말 명심하지요.”

***

“김대표님…! 지금 제정신이십니까?”

성공투자증권의 실장, 장필준의 성난 목소리로 대표실에 쳐들어왔다.

필준은 성공그룹 회장의 조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젊은 나이에 벌써 낙하산을 타고 실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런 반면 출신 하나 없이 제 능력만으로 대표 자리에 오른 중년의 남자, 김태평은 여유롭게 난을 닦고 있었다.

“대답 좀 해보십쇼. 대체 왜 그러냐는 겁니다.”

그 말에 남자는 그의 이름처럼 세상 태평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필준이 갖고 온 서류 더미를 거의 던지다시피 태평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윗선에 물어보지도 않고 합병 반대라니요. 본사에서 지금 얼마나 난리치고 있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성공투자증권의 본사가 여기 말고 더 있나?”

“그, 그건… 아무튼 그룹 전략기획실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아무리 저희 증권사가 독립 계열사라 해도 결국 그룹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된다는 거 알지 않습니까.”

필준은 얼마나 열성적인지 반쯤 울먹이기까지 했다.

태평은 종이를 힐끗 살펴보더니 난을 닦던 일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언제부터 우리 회사가 그룹 따라 움직였어? 주주 절반이 개미들인데. 날 대표로 만든 것도 주주들이지 윗대가리가 아니야.”

“위, 윗대가리… 미쳤어. 당신 미쳤다고! 회장님이 직접 움직이면 당신 자리 물러나게 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

“그렇지. 자네처럼 회장한테 이쁨받는 사람을 왜 곁에 두지 않고 여기 두나 했네. 그동안 기업정보 윗선에 일러 바쳐서 흔들어 온 사람이 너구나? 장필준 실장.”

“….”

“됐다. 내가 잘릴만한 건덕지야 깃털 하나만큼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모를까. 나 쉽게는 안 뒤진다.”

필준은 입을 꾹 다물고는 딱 한 걸음만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뭐라 말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장실장아. 우리가 갖고 있는 태선전자 주식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

“...1프로입니다.”

“1.12프로. 소수점 단위가 몇백, 몇천억 원인데 그걸 빼먹어? 그래. 네 말대로 1프로라고 쳐도 1조 원이 넘는 규모야. 그게 성공그룹 자본만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

“개미 돈 다 끌어모아서 만든 돈으로 산 게 1.12프로야. 그런데 태선전자 주가 박살 나 있는 상태로 주가 포장된 태선AA 끌어들이는 걸 찬성한다고? 우리 믿어준 개미들 싹 다 밟아 죽이자는 거랑 뭐가 다르냐?”

필준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더미를 모두 구기더니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뭘 멀뚱히 서 있어? 더 할 말 남았으면 하고 아니면 나가 봐.”

필준은 뻘쭘하게 서 있다가 눈알을 살짝 굴려대며 말했다.

“저희 빼고 태선전자 주식 보유한 투자사, 증권사 심지어 국민연금관리공단까지 찬성한 상황입니다. 태선 눈 밖에 나서 좋을 거 없다는 거 알고 계시잖슴까.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면…”

“그놈의 한 번만은…. 꼭 너 같은 새끼들이 사고치고 여자 붙잡더라? 한 번만, 한 번만. 에휴 X발 놈들.”

“....”

태평이 서랍을 덜컹 열어젖히고는 담배를 찾았다.

“불 있냐?”

“예? 예….”

필준이 쪼르르 달려와 태평의 입가에 라이터를 대었다.

태평은 몇 년 전 강빈의 제안으로 태선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뒤, 폐암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을 통해 제거했지만 아직 완치 판정은 되지 않은 상황.

“후… 내가 이놈의 회사 때문에 담배를 못 끊네. 장실장아. 너도 처먹었냐?”

“...?”

필준은 동태눈깔을 하고선 눈을 끔뻑였다.

“아니다. 먹었든 안 먹었든 무슨 상관이겠냐.”

태평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내를 기억했다.

태선전자의 전무이사라던가.

합병 찬성에 승인하는 조건으로 평생 벌어온 돈보다 더 큰 금액을 주려 했었다.

“아무튼 윗대가리들한테 전해. 내가 대표 자리 있는 동안 성공투자증권이 이딴 비리 합병에 찬성할 일 없을 거라고.”

“그걸 전하면 위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죽기밖에 더하겠냐?”

태평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다시 난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

“국민연금관리공단과 외국인 투자기업들도 모두 찬성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선 유일하게 성공투자증권사만 반대하고 있고요. 합병을 막긴 힘들어 보입니다.”

기현의 보고를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성공투자증권사의 현재 대표는 김태평.

출신 하나 없이 실력만으로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전생에서 내가 내로라하는 증권사들의 입사제안을 거절하고 성공투자증권사로 가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기도 했고.

다른 건 몰라도 소신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켜내는 사람이 이번에도 한 건 한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전생에선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은 이루어지긴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시기에 이미 태선물산도 재만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였고, 굳이 회장 자리를 놓고 무리수를 펼칠 이유가 없었으니까.

태선물산과 태선패션의 합병도 범준의 회장 승계를 위해서 벌어진 것이었지, 재만이 회장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지분은 충분했다.

결국 나로 인해 미래에 있을 비리 합병이 변모해서 앞당겨졌고, 내가 처할 위기가 김태평 대표한테 이전된 것이다.

전생대로라면 폐암에 걸려 지금은 죽은 사람이겠지만, 어찌 됐든 내가 살린 사람을 허무하게 죽도록 만들 수는 없다.

초아와 같은 맥락으로 태평에겐 일말의 의무감을 갖고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은 나도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번에도 그 개새끼가 사람 죽이게 둘 수는 없지.”

“예? 서재만 부회장이 사람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서재만 말고 서범준. 서재만 부회장은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 이번 합병 절차에 서범준도 끼어 있으니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

“....”

말이 좀 거칠어서일까, 기현은 말없이 서 있었다.

“김태평 대표 한 명만 반대한다고 합병이 엎질러지진 않을 거야. 그래도 한 차례 격랑은 겪겠지. 그럼 압박이 갈 테니까 일단 경호 붙여둬.”

“알겠습니다. 파견 업체 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남는 경호인력 있지 않아? 나 한 명 경호하겠다고 서른 명은 넘는 것 같던데.”

“경호 팀이긴 하지만 부회장님 지시 따라서 음지에서 움직이는 인력이 꽤 됩니다. 부회장님 직속 경호팀보다는 못하겠지만, 인력손실보다는 파견 업체에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지.”

솔직히 파견 업체는 믿기 힘들었다.

전생에서 성공투자증권에도 분명 파견 업체에서 보낸 경호팀이 있었지만, 정작 내가 위험할 때 도움이 되진 않았으니까.

당장 일이 벌이진 않을 테니 곧 경호팀 충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김태평 대표랑 미팅 잡아. 나도 태선가 사람이니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으니 최대한 정중하게 요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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