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폴더를 덮고 휴대폰을 차 시트 위에 놓았다.
초아의 전생에서 빚진 거 아니냐는 말에 잠깐 식겁했다.
굳이 따지자면 전생이 아니라 현생에서 빚진 거겠지만.
나로 인해 범준의 결혼상대가 초아로 바뀌었으니 일말의 죄책감은 갖고 있었다.
지금 차를 타고 향하고 있는 곳은 진태에게 받은 인천 별장이다.
임기사가 운전하는 차에는 나와 기현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경호차에는 영균이 타고 있었다.
한 편에는 산맥이, 반대편에는 바다가 펼쳐지는 도로를 달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람개비들이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 진태에게 명의를 넘겨받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도로를 따라 올라간 끝에 등장한 별장은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전에도 봤었던 남자 한 명이 달려왔다.
“연락받았습니다.”
“그간 고생 많았어. 한 번을 못 찾아왔네.”
“아닙니다.”
윤혁의 어깨를 두드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하나 없이 막혀 있는 반대편과 달리 눈앞에는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저 멀리 석양이 지는 것이 보였다.
“별장으로도 괜찮은 곳이야.”
“오늘 일 끝내고 원복해놓겠습니다.”
“티 안 나게 작업해줘.”
“알겠습니다.”
윤혁의 뒤로 다섯 명의 경호원이 한 손에 삽을 들고 있었다.
영균이 별장 안을 돌아다니며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뭉툭한 소리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퉁, 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영균이 고개를 돌려 경호원 무리를 보며 말했다.
“파 봐.”
달려나온 경호원 중 한 명이 잘 마감되어 있던 나무판자를 삽으로 들어올렸다.
바닥에는 콘크리트나 여타 다른 혼합물이 아닌 흙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삽으로 흙을 퍼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가장 안쪽에서 흙을 파내던 윤혁이 소리쳤다.
“찾은 것 같습니다!”
“깔끔하게 다 파내.”
흙을 전부 치워내자 철문이 드러났다.
경호팀들은 철문 근처에 있는 흙까지 모두 퍼 올리고 나서야 지상으로 올라왔다.
철문에 따로 잠금장치가 있진 않았고, 낙폭은 어림잡아 2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아마 별장에서 이곳을 찾아낼 정도라면 잠금장치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겠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치밀했다.
영균이 나를 슬쩍 봤다가 시선을 돌려 말했다.
“채 팀장은 애들 데리고 나가봐.”
“예. 알겠습니다.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경호팀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영균이 먼저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 커다란 몸이 가볍게 점프해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왔다.
“제 어깨를 밟으십시오.”
영균이 벽면에 가깝게 섰는데 워낙 키가 크기 때문에 계단 한두 개 정도의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영균의 어깨를 밟자 영균이 손으로 내 종아리 쪽으로 잡더니 천천히 내려왔다.
이후 기현도 똑같은 방식으로 내려왔다.
“그럼… 열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균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철의 두께도 상당했는데, 영균은 혼자서 문을 완전히 들어 올리고는 옆으로 넘겼다.
다행히 사다리가 있었는데, 사다리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영균이 미리 가지고 온 손전등을 밑을 향해 비췄다.
“그렇게 깊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내려가 시야를 확보하겠습니다.”
영균이 손전등을 입에 문 채 먼저 내려갔고 그다음 기현, 그리고 나 순서대로 내려갔다.
나까지 내려가자 영균이 손전등을 안쪽으로 비췄다.
깔끔하게 마감된 직사각형 형태의 방에 쌓여있는 것들은 모두…
“미친.”
“허….”
표정 변화 없는 영균과 기현조차 이 전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벽돌 모양의 금괴들이 쌓이고 쌓여 금빛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잘은 몰라도 이 정도면 가정집 하나를 세우는 데 전혀 무리가 없으리라.
아무래도 지폐나 채권과 달리 가치변동이 없는 금괴가 금품청탁에 가장 선호 받다 보니 이 정도로 쌓아둔 것이겠지만, 이 정도 양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 금 시세가 얼마야?”
“순금이 지난달 공시가 기준 한 돈에 8만 원 중반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략 얼마나 될까.”
영균이 앞으로 걸어 나가 금괴 하나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무게는 국제규격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0kg 안팎일 것 같은데 이게 개수가….”
“어림잡아 세어 봤는데 5천 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한 건 천억 원은 넘겠네요.”
10kg짜리가 5천 개라면 50톤이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한국 금 보유량이 100톤 정도로 세계 30위권이라던가.
내가 봤을 때 이 금괴를 모두 더한다면 20위권도 가능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피해 이만한 금을 모은 진태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이전에 차명으로 모은 집문서와 땅문서까지 합치면 대체 비자금으로 얼마를 모아둔 건지….
“유사장. 정리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겠어….”
***
강빈과 영균이 떠나고 기현은 혼자 남아 금괴를 정리했다.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플라스틱 박스를 가져와 차곡차곡 정리했다.
금괴의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에, 내부는 플라스틱 박스로 했지만 사과 박스로 한 번 더 포장했다.
“후….”
기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박스 하나에 금괴 4개씩 총 100박스를 만들어내고서야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그렇게 십 분쯤 쉬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무리 작업이 남아 있었다.
유성매직을 들어 박스 귀퉁이에 선명히 적었다.
[유기현 드림.]
이제 이 사과박스가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확신할 것이다.
진태가 인정한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였는지.
***
쨍그랑!
뉴스가 흘러나오던 TV 가운데에 금이 가며 지지직 소리를 내었다.
“미… 낸셜 은행이 금일 파산 신청하며 그동… 대두되었던…”
노이즈가 끼며 소리는 끊겼지만 내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전달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컨트리파이낸셜이 파산 신청을 냈다는 것.
범준은 떨리는 손으로 침대맡을 더듬거려 담배를 찾았다.
담배 한 개비를 꺼냈는데 이상하게 늘 같이 놓던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이불을 들어 허우적대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초아의 목소리였다.
“...지금 기분 더러우니까 꺼져.”
“무슨 일인데 그래. 얘기해봐요.”
초아가 천천히 걸어오는데도 범준은 이불을 뒤져가며 라이터를 찾았다.
“이거 찾아요?”
뒤돌아보니 초아가 한 손에 라이터를 든 채 서 있었다.
“침대 바로 아래 떨어져 있던데.”
범준은 라이터를 낚아챈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한 채 초아를 올려다보았다.
“후…. 본관에 들어오지 말라니까 왜 온 거야?”
“밖에서 깨지는 소리가 자꾸 들리던데 어떻게 안 와요.”
“우리가 그런 사인가?”
“범준 씨. 저희 법적으로 부부예요. 제가 아니면 누가 챙겨 주겠어요.”
초아가 범준의 옆에 살포시 앉았다.
그러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범준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피 나는 것도 모르고.”
“....”
아까 리모콘 말고도 화분도 여럿 깨부쉈는데 파편이 머리에 튄 모양이었다.
멍하니 보던 범준은 돌연 초아의 손을 쳐내고는 말했다.
“너 무슨 꿍꿍이냐.”
“꿍꿍이는 무슨. 가만 있어 봐요.”
범준은 정성스레 자신의 피를 닦아내는 초아를 보며 말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당신이 투자했다던 컨트리파이낸셜이 파산 신청했다면서요.”
“알면서 이런다고…? 당신 아버지랑 방송국 돈으로 한 투자인 거 몰라?”
초아가 싱긋 웃는데, 범준은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몰라요. 제가 등신도 아니고.”
“...?”
초아가 피가 묻은 손수건을 범준의 손에 쥐여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치지 마요. 고작 이런 일로 절망하지도 말고.”
“고작이라고 했냐?”
“당신이 어디 보통 사람이에요? 그 태선전자의 후계자잖아.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시아버지가 아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냥 잘못했다 한 번 빌면 대신 갚아주시겠죠.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초아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3000억 원 정도를 날려 먹긴 했지만, 그렇게 큰 사고를 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초아의 말대로 재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무릎이라도 꿇으면 뭘 어쩌겠는가?
재만의 피붙이라고는 자신밖에 없는데.
범준은 묘한 눈길로 초아를 훑었다.
날이 좀 풀리긴 했지만 속이 비치는 하얀 가디건 안에 몸에 달라붙는 티를 입고 있었다.
그동안 추녀라고 생각하며 괄시했는데 자세히 보니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짙은 속눈썹 아래 눈이 반짝였고, 콧잔등에 점점이 박혀있는 주근깨도 그녀만의 개성처럼 보였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도톰한 입술에는 립스틱을 살짝 칠했는지 붉은기가 옅게 돌아서 더 시선이 갔다.
천천히 다가가 얼굴을 맞대려는 순간.
“이러지 마요.”
“...?”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너도 원하는 게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그딴 취급을 했는데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초아가 뼈가 도드라지는 손이 범준의 팔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
그녀가 범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번 일 제대로 정리되면 그때 다시 얘기해.”
범준이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몸을 움츠렸다.
***
“역겨운 새끼.”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에 얼굴을 갖다 댔다.
“발정 난 개새끼.”
초아는 범준의 방에서 나온 뒤 그대로 샤워실로 들어왔다.
옷을 벗을 틈도 없어서 물에 젖은 천이 그대로 몸에 엉겨 붙었다.
얼굴에 연거푸 거품칠을 해 범준의 숨결이 닿았던 모든 곳을 씻어냈다.
범준의 방을 도청하며 컨트리파이낸셜의 파산 신청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비웃음을 날려줄 생각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했던 온갖 모멸적인 말들을 그대로 돌려주면서 말이다.
곧장 범준에게 가려는 찰나, 생각을 바꿨다.
범준에게도 말했듯, 재만이 도와준다면 3000억 따위야 쉽게 해결될 돈이니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혼은 할 수 있을지언정 범준을 완전히 망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 립스틱을 들어 옅게 칠했다.
그 이상의 화장도, 치장도 필요 없었다.
비감에 빠진 사람을 사로잡는 건 화려함보다 은은한 포근함이니까.
“기다려. 서범준.”
입술을 쓸어내리자 붉은 립스틱 자국이 그대로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내가 너 밑바닥에 처박아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