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태선전자의 주가가 다시 한번 떨어지며 59만 9750원으로 9개월 만에 60만 원 선이 무너졌습니다. 국민주식으로 알려져 있던 태선전자는…”
범준이 눈알을 굴리다가 리모콘을 들어 TV를 껐다.
“제깟 놈들이 뭘 안다고 설쳐대? 걱정하지 마십쇼. 아버지. 이번에 터치스크린 핸드폰만 출시하면 보란 듯이…”
“내가 원하던 방향대로 가고 있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예…?”
범준은 벙찐 표정으로 재만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떨어진 게 아버지가 원하던 거라뇨?”
“내가 늘 말하지 않았냐. 생각 좀 하라고. 터치스크린 폰이 출시일을 미룬 게 정말 기술개발 미흡 때문 같더냐?”
“그, 그럼….”
“쯧.”
재만은 범준의 손에 있던 리모콘을 빼앗아 다시 TV를 틀었다.
범준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괜히 재만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보다 요새 함국장은 왜 만나고 다니는 게냐?”
재만은 사석에서도 규명을 장인이 아닌 함국장이라 불렀다.
출신부터 다른 그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 하하. 사위가 장인 만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다.”
“....”
재만이 잠시 뜸을 들이는 동안 범준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눈에 띄게 번졌다.
“너 전에 말했던 그 사업. 함국장 찾아가서 진행한 건 아니지?”
“제가 설마 아버지 말씀을 어기고 일을 진행했겠습니까. 언론 쪽 인사들 어떻게 다루는지 배우려고 찾아간 거니 오해 말아주십시오.”
“그래. 잘하고 있구나. 함국장한테 배울 거라곤 그거밖에 없으니 확실하게 배워 둬.”
“예.”
범준은 긴장되는 몸을 숨기려는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재만이 말을 이었다.
“태선전자랑 태선AA를 합칠 게다.”
“설마 태선전자 주식 낮췄던 이유가….”
“그래. 거기까지는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
“태선AA에 우리가 들고 있는 지분이 60프로가 넘어간다.”
“그리고 홍여환 이사장도 확실하게 저희 편으로 넘어오겠네요. 쉽지 않은 양반이라 생각했는데.”
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전자의 지분을 9프로나 들고 있는 국민연금관리금단.
그곳의 향방을 쥐고 있는 홍여환과 교류하고 있었다.
태선AA의 주가를 올린 이유 중 하나도 일종의 금품청탁이나 마찬가지.
태선전자와 태선AA의 합병으로 지분을 늘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홍여환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계획인 것이다.
“대부분 태선그룹과 관계없는 사람 이름으로 갖고 있긴 하지만, 너와 내 명의로 된 지분만 꽤 되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언론 틀어막아도 비리 합병이니 뭐니, 말들이 많을 게다. 그러니까 평소 행실부터 조심하고 다녀. 괜한 말 나오게 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재만이 다소곳이 서 있는 범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원래 이 합병은 네 회장 자리를 넘길 때 쓰려고 준비했던 거다.”
“아버지…?”
범준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 재만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엄해 보였지만, 가끔 보이는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
“내가 너말고 자식이 더 있기라도 하냐? 나 다음 회장은 무조건 너야. 이건 여지없는 사실이다.”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쯧. 그래도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르지 못하면 다 무슨 소용이겠냐. 급한 대로 당겨 써야지. 너를 위한 자리는 따로 또 마련하니 너도 이번 일만 집중해.”
“예. 더 신경 써서 관리하고 언론 쪽 흔들겠습니다.”
“그래. 잘하고 있다. 나가봐.”
범준이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부회장실을 나섰다.
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범준은 담배를 꼬나물고 나지막이 말했다.
“X발….”
담배가 타들어 가며 제 속도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중국 자본까지 끌어들여 미국의 주택저당증권에 투자했는데 거품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 금액이 규명과 그의 방송국으로 받은 것까지 합치면 3000억 원이 넘어갔다.
재만이 자신을 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무리수까지 둔 것이었는데, 결과가 안 좋았다.
방 안에 연기를 내뿜으며 혼잣말을 뱉었다.
“미리 말하든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HSBC의 발언을 시작으로 주택담보대출의 부실 우려가 확산되고 있었다.
한 달 이상 연체된 대출이 무려 20퍼에 가까웠고, 금융기관 연쇄 부실까지 예상되는 실정이었다.
아직까지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손해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잉.
범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불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야속하게도 발신자는 규명이었다.
“하…. 지랄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받지 않을까도 고민했지만, 거금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규명이 어떤 일을 할지 몰랐다.
혹시라도 재만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결국 범준은 전화를 들었다.
“예. 장인어른.”
“그… 서 사위 오늘 뉴스를 봤는데 말이야.”
“저도 봤습니다. 근데 왜요?”
“응? 허허. 왜겠나. 자네가 투자했다던 사업이 조금 난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 말이지.”
“계약기간 꽤 남은 걸로 아는데 이런 식으로 독촉하시면 저 불쾌합니다.”
“도, 독촉이라니. 말 그대로 걱정되어서 전화했을 뿐이네. 불쾌했다면 내 사과하지.”
규명이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신뢰가 깨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장인어른 개인 돈만 200억 원이 들어갔으니 걱정되실 만하겠네요. 뭐 일시적인 거고 곧 올라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응. 그럼그럼. 자네가 하는 말이 맞겠지.”
“그리고 일이 잘못되더라도 제가 그깟 푼돈 드릴 돈이 없겠습니까? 어떻게든 돌려드릴 테니 이런 식으로 사람 애간장 태우지 마세요.”
“알겠네. 앞으로는 더 조심하도록 하지.”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나오자 규명이 잘못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범준은 휴대폰 폴더를 닫고 담배를 하나 더 물었다.
한 달 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부동산 시장은 폭락을 거듭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주 사업으로 삼았던 수많은 은행들이 도산되었다.
뿐만 아니라 범준이 투자했던 컨트리파이낸셜도 도산 위기라며 오늘 아침 보도되었다.
범준은 그간 잠도 제때 들지 못해 수면제까지 손을 대었고, 피부는 푸석해질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아는 여전히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오히려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어, 나다.”
“버, 범준아…. 부재중 전화가 와 있길래.”
“전화는 왜 안 받냐? 네가 그럴 처지야?”
“감사실 끌려갔다 왔어. 기업은 물론 집에서 내친단다. 이제 어떡하냐….”
발신자는 범준에게 사업을 소개해주었던 호광그룹의 장남, 원호였다.
범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욕지기라도 뱉으려 했다.
그러나 원호의 처지는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나아 보이진 않았다.
“너 때문에…. 아니다. 하여튼 그 새끼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떻게 사람 이름이 조까터냐고.”
“....”
“그 새끼한테 연락은 했냐?”
“그… 전화는 해봤는데…”
“됐다. 내가 직접 할게. 끊는다.”
범준은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가 다시 펴고는 곧장 카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컨트리파이낸셜의 존 카터입니다.”
“예예. 컨트리파이낸셜의 조까터씨. 저 서범준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카터에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상황 다 알고 계실 텐데 평온해 보입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당신 누구 피 말려 죽이려는 거야? 사태가 여기까지 치달았으면 투자자인 나한테 먼저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나?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겠어!”
“이렇게까지 신뢰가 없어서야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컨트리파이낸셜이 어떤 은행인지 범준 씨도 잘 아실 텐데요.”
컨트리파이낸셜이 미국 은행 사이에서 자산규모로 따지면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큰 은행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범준이 투자한 상품이 매년 수십조의 순이익을 내왔다는 것도.
그러나.
“오늘 아침 부도 위기라고 보도된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채권 회수는 개뿔, 집값이 개판 나서 원금도 회수 못할 텐데 어떻게 할 거냐고. 어?”
“컨트리파이낸셜이 도산되는 날은 미국 경제가 망하고 세계 경제가 무너지는 날입니다. 믿고 기다리세요.”
범준은 전화를 접고 거칠게 바닥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휴대폰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퍽 유, 퍽 유다. 이 새끼야.”
***
본관에서 열 걸음은 떨어져 있는 별채.
-퍽 유, 퍽유다. 이 새끼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초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두 달 전 범준이 출근한 틈을 타 설치했던 도청 장치는 그의 사업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낱낱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살던 놈이 최근에는 수면제까지 손댄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자리에서 탭댄스를 추었다.
게다가 강빈의 예고했던 대로 범준의 벌였던 사업은 완전히 종친 모양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릴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강빈 씨가 말했던 대로예요. 그 사람. 방 안에서 영어로 욕까지 하더라고요.”
“저도 오늘 컨트리파이낸셜이 부도 위기 판정받은 거 기사 봤습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투자도 그렇게 족족 대박을 터트리시더니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거예요?”
“비결이야 있죠.”
“알려주시면 안 되겠죠?”
“하하. 당연하게도 사업상 비밀입니다.”
뉴스에서 듣기로 미국의 주택 담보 시장의 붕괴가 시작되면 세계 금융시장 전체에 영향을 끼칠 거라고 했다.
그런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예상한 걸지, 초아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시니까 그 위치까지 가신 거겠죠. 저는 한결같이 강빈 씨만 믿을게요.”
“그러셔도 됩니다.”
강빈과 대화할 때면 늘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소한 한마디, 한마디에서 배려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혹시 전생에 저한테 빚지신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왜 뜸을 들여요? 수상하게.”
“그….”
“후후. 재미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농담도 잘 받아치시고 센스까지 있네요?”
수화기 너머 멋쩍은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초아도 입꼬리를 늘렸다.
“그보다 서범준이 투자했다던 사업이 망하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곧 결과가 나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