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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13화 (213/249)

#213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개처럼 줄에 매달린 채 바다로 가라앉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전생의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렀다고 해서, 그날은 흐려지지는 않았다.

그 날 나를 죽이라고 지시했던 범준에게 분노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내 감정을 쓰기 아까울 정도로 한심한 놈이니까.

다만 안타까웠다.

하고 싶은 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았는데.

대단하신 태선그룹이 비리 합병을 진행하신다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를 했을까.

마지막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안타깝고 후회되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더 확실하게, 치밀하게 태선물산과 태선패션의 비리 합병을 막았을 것이다.

나를 엿 먹이려고 한 놈들에겐 그에 몇 배로 갚아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 기회가 찾아왔다.

“서재만 사장의 차명으로 추정되는 지분들 합하면 얼마나 돼?”

“30프로가 조금 안 됩니다. 서재만 부회장, 서범준 사장이 보유한 지분과 합치면 55프로 정도 될 겁니다.”

“나머지는 누가 들고 있어?”

“임원들이 5프로, 국민연금관리공단의 홍여환 이사장이 7프로 들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일반 투자자들로 추정되는데… 아직 파악되지 않은 서재만 부회장의 지분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잠시만. 기관이 아니라 이사장 개인이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야?”

“네. 홍여환 이사장 개인이 소유한 지분입니다.”

국민연금공단의 홍여환 이사장이라….

국보건복지부 산하의 국민연금공단은 준정부기관이다.

아직까지 이름이 ‘국민연금관리공단’이지만 올해 7월 ‘국민연금공단’으로 명칭을 바꾼 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미래까지는 이 이름을 계속 썼다.

주요 업무는 국민연금 수취와 지급이지만 수취액을 기관에서 직접 운용하기도 한다.

한국 주식시장은 물론, 외국 주식시장에도 대규모 주식투자를 하며 기업이 가질 수 있는 상한 지분율까지 꽉 채운 경우도 많았다.

전생에서 태선물산의 대주주이기도 했는데, 태선패션과의 인수합병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아님 그 이전부터 인지는 몰라도 내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국민연금공단은 단일기관으로 태선그룹의 전체 지분 9퍼센트가 넘는 지분을 들고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태선전자의 지분만 9프로, 태선물산의 지분을 8퍼센트 들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만약 국민연금공단이 태선 AA의 지분을 7프로를 갖고 있었다면 이렇게 싸한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사장 개인이 7프로를 소유하고 있다는 건 어딘가 꺼림칙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채규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는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기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홍여환이 태선AA의 주식을 매수한 게 언제야?”

“작년입니다.”

“그때도 이사장이었나?”

“예. 적십자사 총재 자리에서 내려온 뒤 이사장 자리를 달고 두달 쯤 지났을 때입니다. 작년 8월 말정도 되겠군요.”

이사장 자리에 오르고 고작 두 달뒤라….

“네 생각도 같겠지만 이거 꽤 구린 냄새가 난다. 홍여환이 AA 주식 사고 얼마나 올랐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현이 품에 있던 수첩을 뒤적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작년 6월 태선AA의 시가총액은 2조 5628억 원이었고 홍여환 이사장이 매수했던 8월 27일 기준 연 최저가인 2조 1092억 원이었습니다. 매수하는 과정 중에 주가가 상승하긴 했지만요. 그리고 마지막 시장 종가 기준으로 해서 현재 시가총액은 4조 4320억 원입니다.”

“주가가 오른 가장 큰 이유는 팔딱거리는 장어 몇 마리 때문이고?”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전생에서 태선AA와 태선전자가 합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태선AA가 이렇게 급작스러운 주가 상승을 일으킨 적도 없었고.

이번 생에서 내가 벌여놓은 일들이 워낙 많고, 주가변동도 꽤 있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었지만 이런 정보를 듣게 된 이상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재만이 지금 태선AA의 주가를 조작하고, 태선전자와 합병을 시도하려 한다고.

“홍여환과 서재만 관계에 대해서도 파봐.”

“예. 그렇지 않아도 구채보 실장한테 지시 내려둔 상태입니다.”

“빨라서 좋네.”

새해 첫날부터 꺼림칙한 소식을 들었지만 기분은 매우 상쾌했다.

전생에선 불가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

에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표님 시작됐습니다. HSBC가 CDO의 부실 가능성을 경고했어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영국의 거대은행이자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은행.

HSBC, 즉 홍콩상하이은행이 미국의 부동산담보대출의 부실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에 미국증시가 잠깐 주춤하긴 했으나 큰 타격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로 에릭이 분석한 경제 동향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주택경기는 상승세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조금씩 침체되었으나, 맨해튼과 브루클린 지역은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

한편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된 이후 땅 투자 없는 경영을 고수했는데, 경기가 호전되며 다시 토지 투자에 나서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일본의 대도시들은 반년 새 땅값이 8프로 이상 상승했다.

한국에서 가장 이슈가 된 것은 태선전자의 주가가 61만 원대로 8개월 만에 최저치를 경신했다는 것이다.

이틀 전 2프로가 하락한 데 이어 전날도 1.7프로가 하락하면서 결국 56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단기간에 급락하진 않았고, 등락을 반복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저점에 이른 것이다.

주가 하락 원인으로는 전 세계 유동성이 저하되면서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흠….”

여기까지 들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서 태선전자가 지금 시점의 주가와 비슷하긴 하지만, 같아선 안 됐다.

나로 인해 켈러를 영입하며 태선반도체는 급성장을 이루었고, 중국의 이동통신사업권까지 따오면서 태선전자는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태선전자가 장기간에 걸친 끝에 다시 주저앉은 적은 있어도, 그건 1년 뒤의 일이었다.

태선AA의 주가는 연일 상승해가는 데 비해 태선전자는 주저앉고 있다.

합병비율을 높여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려는 뻔한 속셈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현이 매일같이 조사를 하고 있으니 일단은 지켜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한국의 원화 가치는 많이 회복되어 울산 근로자의 평균연봉이 4200만 원대에 달할 정도였다.

코스피 지수도 미국증시 강세와 외국인 매수세로 1410선을 돌파했으나, 곧 국제 원자재 가격하락으로 인해 중국, 미국에 걸쳐 한국 경제도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분석하느라 고생 많았다.”

“뭐, 자료들은 직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주니까요. 이제 GB인베스트먼트도 직원 수가 천 명이 넘어요.”

각국에 정보조사를 위해 파견한 직원들까지 합치면 벌써 GB인베스트먼트의 직원수는 약 1200명에 달했다.

그건 그거대로 대단하지만, 모든 정보를 취합해 간소화해서 보고할 수 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네가 밤새가면서 정리했을 게 뻔히 보이는데 뭘.”

“하하…. 그래도 대표님한테 보고하는 건데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거보다 제가 직접 하는 게 낫죠. 하면서 세계 시장흐름도 공부하고요.”

에릭이 아니었으면, 내가 미래의 정보를 갖고 있다 한들 이 정도로 잘 써먹지 못했을 것이다.

“저는 이제 자러 가보겠습니다….”

“시애틀은 지금 밤 11시쯤 됐으려나?”

“네. 어젯밤부터 날밤을 새웠더니 피곤하네요.”

“그래. 웬만하면 내일까지 푹 쉬어.”

“하하.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일단 상황 보고요. 대표님은 이제 뭐 하세요?”

“나는 미팅 있어. 너는 이제 푹 쉬어라.”

진태가 나를 위해 준만에게 준 비리 장부.

거기에 적혀 있는 사람 중 한 명을 오늘 만날 것이다.

장부에 적힌 인물 중 상단에 별표가 그려진 인물들이 있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명단 중 열 명도 채 안 되던가.

별표가 그려져 있는 이유에 대해선 채규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 모두 정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은퇴 이후에도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우선적으로 만나야 될 사람들인 건 틀림없었다.

경호팀도 동원하지 않고 기현과 단 둘이 향한 곳은 서대문구 북동쪽에 위치한 폐 건설 사무실이었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자태가 낱낱이 드러났다.

창문에 녹색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오랫동안 관리가 안 된 건지 담쟁이덩굴이 3층 건물을 뒤덮고 있었다.

기현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직도 이 건물을 정리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상징같은 걸 겁니다. A는 여기서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A는 불법적인 로비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우리가 정한 지칭이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다, 별표가 그려진 사람들 중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정했다.

그보다 상징이라.

이런 건물에 목멜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 의외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은 쩍쩍 갈라져 있어 이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열려 있는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빛 사이로 희뿌연 먼지가 흩날렸다.

기현이 그 사이로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부회장님이 직접 나오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이런 곳에 오갔다는 찌라시라도 돌면 곤란해질 겁니다.”

“유사장 혼자 나서서 해결된다면 안 나왔지. 이후로는 자네가 관리하더라도 처음은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어.”

“....”

“뭘 걱정하는지 알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 오늘 이후로 아무런 흔적도 안 남길 거니까.”

“예. 그건 제가 책임지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일도 구채보 실장한테 말해서 근처 CCTV 모두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한 게 좋네.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A가 있다는 3층 끝 방에 도착했다.

방에 문도 따로 없어서 복도와 그대로 이어졌다.

A는 페도라를 눌러 쓴 채 방 가운데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A가 모자를 벗었다.

머리는 하얗게 희었지만 얼굴에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고,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이런 낡은 건설 사무실에서 시작해 한때나마 한국 건설업계에 정상에 있었고, 정계에 진출한 이후 지금도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인물.

10년 전, 재정경제부의 차관이었으며 이제 이명박 정부가 정권을 잡게 되면 기획재정부의 장관이 될 인물이었다.

“서재만이 연락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습니다.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분이 앞으로 제가 모셔야 할 태선의 주인이겠죠?”

탁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직한 목소리.

“...그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차현섭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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