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진석과 함께 태선백화점의 부회장실을 찾았다.
태선호텔과 태선백화점의 협업이 결정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고, 일의 진척도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다.
지역 선정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공사도 빠르게 시작해서 지금쯤이면 뼈대는 갖췄을 것이다.
이 협업은 전생에 없던 일이기 때문에, 과정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본 남순은 밝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와. 고사장님은 자주 뵙네요.”
아무래도 두 사람이 기업들의 중진이다 보니 회동을 자주 가졌다.
둘다 성격이 워낙 활발해서 그런지 몰라도, 두 사람은 포옹까지 했다.
진석이 슬쩍 남순의 옆에 가서 말을 붙였다.
“저번엔 잘 들어가셨죠?”
“네. 저희 남편이 전에 주신 산삼주 너무 잘 마셨다고 전달해달라네요.”
“하하. 또 필요하시면 말씀하시죠. 제가 산을 사들이는 한이 있어도 구해오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후후.”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사업구상에만 참여하고 도통 신경을 못 써줬는데 이렇게 원만한 사이라면 그동안 일이 잘 진행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정오의 티타임을 가졌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먼저 일 얘기를 꺼냈다.
“가설공사까지는 한참 전에 끝냈고… 이후로는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골조공사 들어갔습니다. 아무래도 현지 시공사를 쓰고, 한국 지점들에 비해 소규모로 진행하다 보니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진석의 대답으로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한편 걱정도 들었다.
“부실 공사는 안 됩니다. 태선의 이름을 다는 거예요.”
“예. 그렇지 않아도 태선건설 측에 의뢰해서 안전감사 팀을 파견시켰습니다.”
“태선건설 안전 감사팀이면 꽤 까다로울 텐데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네요.”
“아무래도….”
진석이 말끝을 흐린 뒤 손으로 지폐를 세는 제스쳐를 하고는 말을 이었다.
“자본이 빵빵하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능청스러운 말투에 나와 남순이 작게 웃었다.
“백화점은 호텔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어. 네가 말한 대로 편의점도 냈는데 확실히 인기가 많더라. 현지 입맛에 맞는 인스턴트 음식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거든.”
“러시아 만류하면서까지 추천 드린 거라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네요.”
“뭐… 아직까지는 러시아 쪽 투자를 포기한 게 아쉽다는 임원들이 많긴 한데, 그래도 성과를 내고 있으니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진 않아.”
“두고 보세요. 그런 임원들도 곧 입 싹 닫을 겁니다.”
아마 조만간 있을 러시아의 외국계 기업 유통업 금지가 발표되면 불만은 아예 사라질 것이다.
벌써 2006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다들 올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만 부탁드릴게요.”
내 말에 갑자기 남순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세요?”
“네가 말하는 게 꼭 우리 아버지 같아서.”
“할아버지라면 올해도 만족하지 못할 성과를 내었구나. 내년은 두고 보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후후. 태선백화점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한테 고생이 많았다느니, 내년에도 올해처럼만 하라느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버지 말고 더 있었겠니?”
“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남순을 진석이나 채규처럼 위치는 높지만, 내 직속의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 모양이었다.
남순 입장에선 기분 나쁠지도 모르는 언사였다.
“미안하긴 무슨. 오랜만에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좋아서 그래. 너는 충분히 그런 말 할 자격도 있고.”
나는 괜히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너한텐 참 많은 도움을 받았어. 너는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를 도와줬고.”
“고모랑 같이 했던 사업에서 제가 얼마를 벌어들였는데요. 택배만 해도…”
“너랑 재만 오빠랑 회장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잖니. 재만 오빠는 하도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승을 부리는데 너는 한 번이라도 그런 적 없잖아. 사실 태선백화점을 키운 숨은 일등공신인데 말이야.”
“고모는 제가 아무것도 없을 때도 믿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순전히 고모의 능력이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괜히 겉치레로 한 말이 아니었다.
택배 사업을 할 때, 정순과 남순에게 비슷한 제안을 했지만 받아들인 건 남순뿐이었다.
망나니로 소문난 조카가 사업을 시작하는데 대뜸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선의라기보다는 수익성을 보고 수락한 것이겠지만, 그 말은 남순의 사업적인 시야가 밝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색하게 사이에 끼어 있던 진석이 양손으로 짝 소리를 내고는 목소리 톤을 높이며 말했다.
“제가 볼 때 두 분 다 능력이 출중하십니다. 물론 사이에 끼어 있는 저도 그렇겠고요. 하하.”
“고사장님 너무 유쾌하시다니까. 호호.”
그렇게 웃고 떠들며 날이 저물 때까지 사업 얘기를 이어갔다.
***
2017, 정해년(丁亥年)이 찾아왔다.
세간에서는 60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황금돼지해라며 떠들어댈 것이다.
속설에 불과하겠지만, 그 여파로 출산율이 크게 늘었던 해로 기억한다.
집에서 홀로 새해를 맞이하고 있었는데 에릭에게 전화가 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받으소서.”
준희도 옆에 있는지 에릭의 말투를 흉내 내며 따라 말했다.
“한잔했구나.”
“예. 연말에 제일 바쁜 거 아시잖아요. 어제도 밤까지 준희랑 일하다가 한잔하고 있슴다.”
“혀 꼬인 거 봐라. 재밌게 놀고 있나 보네.”
“흐흐. 대표님 없는 거 빼곤 만족스럽네요. 그래도 내년… 은 힘들겠고 후년에는 같이 GB타워에서 보내지 않을까요?”
“그럼 좋지.”
GB타워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후년에 시공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아참. 테슬라가 이번에 또 추가 투자를 요청했어요. 올해… 아니 작년에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GB가 남는 게 돈 말고 더 있어? 해달라는 대로 해줘. 대신 감사팀한테도 철저하게 일 진행하라고 지시 내리고.”
“옙. 그럼 이번 달 내로 1억 달러 추가 수혈하겠습니다.”
이제 1억 달러 정도는 에릭도 부담 없이 투자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테슬라의 성공을 아는 나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투자할 수 있었다.
내가 늘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쉬고 싶을 땐 언제든지 쉬어. 몸도 좀 챙기고.”
“저희야 즐거워서 일하는 거지, 억지로 일하겠습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표님도 쉬시고 싶을 때 언제든지 미국 오세요. 풀코스로 대접할게요.”
"하하. 그래. 새해 잘… 그러고 보니 거기는 지금 아침 아니야? 너희 지금까지 술 마신 거야?”
“...또 연락드릴게요.”
에릭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1월 1일 아침.
나는 태선물산으로 출근했다.
월요일이지만 신정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공휴일이었다.
건물 안에서도 경비원을 비롯한 몇몇 상주 직원들만 있을 뿐, 휑했다.
“새해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부회장님이 오늘 어쩐 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경비원들과 짧은 인사를 하며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부회장실에는 채규와 기현이 먼저 도착해 응접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기현은 물론 채규까지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채규 부회장님까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 부담됩니다.”
“익숙해지셔야지요. 태선의 회장이라는 자리는 그런 자립니다.”
“하하….”
채규의 표정이 워낙 확고해 별말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채규와 기현은 내가 앉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출근하신 이유가 뭡니까?”
채규와 기현 모두 평소에도 늘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새해 첫날부터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채규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기현이가 재밌는 걸 찾아내서 말입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부회장님이 아니라 제게 먼저 보고한 건 확신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대체 어떤 일이기에 채규에게 먼저 검증을 받은 걸까.
궁금증을 안고 기현을 바라봤다.
기현은 내게 서류뭉치를 조심스럽게 건네며 말했다.
“며칠 전에 서재만 사장이 주주들과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 외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고 보고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 보고를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준비한 게 큽니다. 여기 적힌 사람들.”
서류는 각 장마다 사진과 이름, 그 사람이 보유한 주식 현황이 적혀 있었다.
“아직 추측이긴 하지만… 모두 서재만 사장 사람들일 겁니다. 생각보다 차명으로 보유한 지분이 꽤 됩니다.”
“그럴리가 없을 텐데. 그럼 지난 주주총회에서 회장을 선출할 때 이 지분들은 쓰지 않았다는… 잠깐만 이거?”
“예. 모두 태선그룹에 속한 기업들이 아닙니다.”
재만의 차명으로 보유한 지분들은 태선그룹과 전혀 상관없는 기업들이거나, 태선의 이름을 달고 있긴 하나 태선그룹에는 속하지 않은 기업들이었다.
그리고 그 서류들에 적힌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기업이 있었다.
“태선AA라면 4년 전에 상장하면서 태선전자에서 독립한 회사지?”
“예. 지금은 태선그룹에 속하지 않고 독립기업으로 존재합니다. 제가 조사한 이유는 최근 들어 태선AA의 주가가 폭등하고 있는데, 이게 소수의 사람들이 대량 매수를 하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겁니다. 서범준 사장이 이미 지분을 17프로, 서재만 부회장이 10프로를 보유한 회사가 말이죠.”
태선AA.
원래 이름은 태선 사이버보안으로 정보보안 전문 기업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진태의 투자를 받고 재만이 설립했던 기업으로, 주요 국제 인증까지 모조리 설립하며 국제적으로 기술력을 공인받은 기업이다.
주력 사업은 백신과 보안 관리 및 통제인데 외국계 거대기업에서도 태선사이버보안의 보안체제를 사용하며 급부상한 전적이 있었다.
4년 전 한국 1호 유니콘기업이라 불리며 이미 기업가치가 10억 달러가 넘었던 태선 사이버보안은 태선AA로 사명을 바꾸며 상장을 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재만은 태선AA를 태선전자의 자회사로 편입하지 않았고, 진태도 이때는 경영에서 손을 떼기 시작할 때라 별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지금껏 태선AA가 태선전자와 분리해온 이유가 따로 있다면…?
지금도 태선전자의 최대 주주는 재만이다.
그가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까지 예상하면 아무리 못해도 지분의 30프로 가까이는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우호지분까지 생각한다면 그 이상일 것이고.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태선전자는 재만의 뜻대로 움직일 텐데, 만약 태선전자가 태선AA와 합병을 진행하며 보유지분을 늘린다면 태선전자는 이제 재만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현듯 전생에서 내가 죽은 원인이 된 사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