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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11화 (211/249)

#211화

“하하. 장인어른께서 저를 못 믿으시나 봅니다. 같이 가는 게 아니라 사채를 지우겠다는 거 아닙니까.”

“에헤이, 서 사위. 우선 얘기 좀 들어보게.”

“저는 장인어른과 같이 재미 보려고 동업 제안한 건데, 장인어른께선 발 빼시겠다니까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발 빼고 돈만 얹어주면 자네 몫이 더 커지는 건데 서운할 게 어디 있겠나? 자네 말대로 반드시 이득보는 장사라면 말이네.”

규명의 말에는 뼈가 있었고, 범준은 잠깐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하하하. 제 말은 장인어른도 같이 재미를 보셨으면 좋겠는데, 저 혼자 그러는 것 같아서 죄스러운 기분이 든다는 겁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지 않겠나? 하하. 그래도 금리는 조금 세게 받을 테니 내 몫은 걱정 안 해도 됨세. 나는 그 정도로 충분해. 서 사위 많이 하게.”

초아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규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사전에 얘기했던 것을 엎지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규명은 자신이 요구했던 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보다 금리를 높게 받는다는 말에 범준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다가도 이내 고개를 젓는 모습이 꼭 수달처럼 생겼다.

초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이어질 범준의 말을 기다렸다.

“금리로 얼마를 붙이시겠다는 겁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8프로로 하지. 아,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중국 쪽 투자자들 의견이야.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중국은행은 기준금리로 8프로를 받는다 하더라고?”

범준이 이를 악문 채로 대화를 이었다.

“여기가 중국은 아니잖습니까. 중국은 금융시장의 유동성이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그렇게 받는 거고요.”

“낸들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빌려주는 쪽이 중국이니, 그쪽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후…. 일단 알겠습니다. 받아들이는 걸로 하죠.”

범준에게 사업을 추천해주었던 원호의 말에 따르면 최소 15프로 이상의 수익이 날 것이다.

금리를 내더라도 7프로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으니 여전히 괜찮은 조건이었다.

“중국 쪽 투자자는 제가 연락해 볼 거고… 장인어른은 언제 투자하실 수 있습니까? 이 사업이 시간 싸움이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미국 부동산 시장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상승하고 있었다.

투자를 하기로 마음 먹은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었는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을 보자니 범준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뭐, 나야 오늘이라도 상관없네만, 회사 차원에서 투자하는 건 형식상으로나마 심의 거치고 하면 2주는 필요할 거야.”

“일단 장인어른 개인으로라도 오늘 투자하시죠. 금리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8프로로 맞춰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지금 당장 차용증을 쓰도록 하지.”

“당장은 아니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예상대로 제 이름으로 차용증을 쓸 생각은 없었는지 범준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앉으세요.”

“...뭐?”

갑작스런 초아의 말에 범준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지금 다른 사람 보내서 그 사람 명의로 계약하려는 거잖아요.”

“그게 뭐? 하, 너 설마 내가 사기라도 칠까 봐 그러냐?”

규명 앞에서 사이좋은 부부를 연기해야 된다는 것도 잊은 채 범준이 쏘아붙였다.

“범준 씨에게 200억 원이 적은 돈일지 몰라도, 저희한테는 큰돈이에요. 확실하게 하고 싶은 거니 이 정도는 이해해주세요.”

범준은 초아를 흘기다가 시선을 규명에게 옮겼다.

“장인어른. 제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한국 1위! 태선전자의 사장이 바로 접니다. 그런 제가 이런 푼돈 빌리는데 제 명의로 차용증을 쓰라니요.”

“이건 초아 말대로 나도 양보할 수 없네. 자네가 사돈어른에게는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대외적으로 채무 사실을 알리진 않겠네.”

“설마… 중국 쪽 투자자들과 계약할 때도 이런 식으로 간섭할 생각은 아니시죠?”

“이미 태선전자의 사장이 계약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어. 아무렴 그 사람들이, 제대로 된 조사도 안 거치고 이렇게 빨리 수락했겠나? 수익 관련해선 철저한 사람들이니 자네 명의가 아니면 계약 자체를 거부할 걸세.”

“장인어른!”

범준이 아무런 계산 없이 규명을 끌어들이려던 건 아니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언제든지 과오를 뒤집어쓸 사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태선전자의 지완수 전무이사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범준의 명의로 계약을 진행한다면, 모든 일의 법적인 책임은 범준에게 생긴다.

“그깟 명의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제 이름을 쓰시는 겁니까. 만약 나중에 이 채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장인어른과 사위가 채무인과 대여자다, 결혼 자체가 비즈니스였다, 씹어대지 않겠습니까? 초아를 돈에 팔려 온 며느리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말조심하게.”

규명의 정적인 말을 듣고 나서야 범준은 자신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도 말했듯 채무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릴 생각은 없네. 자네한테 투자하기로 한 구어메이와 룽시 모두 우리 방송국이 개국할 때부터 함께한 회사들이니 믿어도 좋아. 자네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규명이 잠깐 틈을 두고 말을 이었다.

“상환만 깔끔하게 하면 말일세. 자네가 그럴 사람도 아닌데 뭐가 그리 열이 나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머리 좀 식히고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자네 편한 대로 하게.”

범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가 고개를 돌려 힐끔 초아를 바라봤다.

“먼저 갈게.”

“네. 들어가세요.”

범준은 규명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곤 방에서 나갔다.

“네 말을 듣길 잘한 거 같구나.”

규명이 범준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초아는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범준 씨는 저희 집안까지 끌고 갈 생각 없어요. 제 잇속만 중요한 사람이죠.”

“그래도 이용해 먹을 구석은 있을 거야. 네 결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

규명은 철저히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사고방식이 단순할진 몰라도,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

언론의 쏟아지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중국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도 모두 규명의 지시였다.

초아는 그런 규명에게 질리면서도, 아버지란 이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 이혼할 생각이에요.”

“그래. 그러는 게 나을 것 같구나.”

“...반대 안 하세요?”

“반대할 게 뭐가 있겠어. 합의금만으로 우리 집안은 이제 3대는 놀고먹을 돈이 생길 텐데.”

“정말….”

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란 사람은 그녀에게 있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혼하고 나면 저 찾지 마세요.”

“...그러마.”

지금쯤이면 나가도 범준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숨 막힐 것 같은 공기에 초아는 서둘러 방을 나왔다.

방송국을 나오자마자 그녀가 한 일은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강빈 씨. 그때 말씀하셨던 대로 다 진행됐어요. 아버지 개인 명의로 200억, 방송국 차원에서 600억, 중국 쪽 투자자들까지 다 합치면 3900억 원이 서범준한테 융자될 거예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다 강빈 씨가 짜신 계획인걸요. 결과는 기다려야 알겠지만… 강빈 씨의 생각대로 될 것만 같은 이 기분은 뭐죠?”

“저는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 모두 이루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후후. 확신을 갖고 말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그래놓고 틀리면 없던 일로 치부해버리니까, 말을 바꿔 버리니까. 그런데 강빈 씨는 달라요. 정말… 정말 이룰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계약에 진척이 있을 때마다 말씀해주세요. 그것에 맞게 저도 움직이겠습니다.”

“...네.”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

초아는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에 작은 위안을 얻었다.

***

기현이 태선호텔의 부회장실로 찾아왔다.

“최근 태선전자를 찾아온 사람들 명단입니다.”

“장부랑은 대조해 봤나?”

“네. 전 경제부 장관, 화웅증권 유희국 사장이 겹칩니다. 둘 다 저번 서범준 사장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인물들입니다. 지금이라도 압박할 수는 있습니다.”

“일단 주시만. 움직일 때가 오면 내가 직접 지시하지.”

“알겠습니다.”

서툴게 비리 장부에 있는 인물들을 건드렸다가 감당하지 못할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강력한 무기인 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달부터 자네 이름으로 돈 보내는 걸로 하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동안 비리 장부에 있는 인물들에게 채규의 이름으로 비자금이 쏘아지고 있었다.

진태가 채규에게 얼마만큼의 비자금을 맡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재계 인사들에게 들어갈 돈에 내 이름을 쓸 수는 없다.

‘조만간 별장에 한 번 가야겠어.’

진태가 나에게 주었던 인천 부두 쪽에 위치한 별장.

별장을 내게 주며 진태는 이런 말을 했다.

너 혼자 떨쳐낼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땅을 파보라고.

그곳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나 대신 책임져 줄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네가 전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지.”

“예?”

“네가 처한 모든 상황에 대해 내가 책임져줄 거라고.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했어.”

“...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너와 내가 만난 지 2년도 안 됐어. 대체 어떻게 그렇게까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거지?”

“주제넘은 말입니다만, 부회장님 스스로가 어떤 인지 자각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부회장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하는지 봐왔습니다.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을지 몰라도 저한텐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무덤덤한 말투 속에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내 곁에 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 전에 내가 죽기라도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

“차실장에게 경호를 더 철저히 하라고 지시 내리겠습니다.”

“하하… 농담도 못 하겠군.”

그러고보니 기현이 영균과 참 비슷한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다 말재주도 없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지만 우직하게 제 할 일들을 해낸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때 가면 늦을 테니 미리 선수금을 줄게. 내일 계좌 확인해봐.”

“저는 제가 한 일에 대해서만 대우받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한 일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쳐.”

기현은 태선금융 쪽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태선보험까지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앞으로 내게 과오가 생긴다면 기현은 망설임 없이 대신 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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