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범준 씨가 투자 얘기를 했다고요…? 아버지는 그걸 또 받아들이셨고?”
“응. 우리 서 사위가 우리 집안 살리려고 아주 애써주더구나.”
“잘 알아보시긴 한 거예요?”
“나야 방송밥 먹는 사람이지 금융 쪽, 특히 미국 시장은 잘 모르지 않냐. 허허. 그래도 태선전자 사장의 입에서 괜히 동업하잔 얘기가 나왔겠어?”
중국 바이어들과 미팅이 끝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초아는 갑작스런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짚었다.
“아직 투자한 건 아니죠?”
“그렇지? 방금 전해 들은 얘기니 말이다. 안 그래도 중국 투자자들과 연결시켜 준다고 했는데… 그나저나 미팅은 끝났냐?”
규명은 범준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범준이 물고 온 사업이 아무리 신빙성이 있어 보여도,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 쪽까지 엮였는데 실패라도 한다면 GBC방송국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일단은 투자하지 마시고 어떻게든 미루세요.”
“목소리가 왜 그래? 서 사위는 우리 생각해서…”
“그놈의 서 사위, 서 사위 좀 그만하시고 제 말 들으세요.”
“초아야. 무슨 일 있던 거냐? 서 사위가 뭐 안 좋은 소리라도 했어?”
“하… 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 아무튼 아버지는 제가 말씀드릴 때까지 투자 미루세요.”
초아는 폴더를 닫았다가 피고는 다시 번호를 눌렀다.
이제는 익숙해진 번호였다.
***
“네. 알겠습니다. 제가 사람을 보낼 테니 대기만 하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태선호텔 서교점에서 뵙겠습니다.”
초아에게 걸려온 전화를 끊었다.
짧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범준이 미국의 주택담보증권 시장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장은 이제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앞으로 최대 2년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일 것이다.
“결국 알아서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초아와 바로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곧장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기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저도 따라갑니까?”
“아니. 너는 서범준 좀 더 파 봐. 몇 개의 은행과 교류하고 있는지, 투자진척도랑 자본 규모까지 알아볼 수 있는 건 싹 다.”
“알겠습니다. 2경호팀 데리고 다녀오겠습니다.”
2경호팀은 원래도 진태를 경호하던 팀이었다.
채규의 소개로 내가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팀장은 구채보 실장으로 강력반 형사출신이라고 들었다.
채규에게 듣기로 없는 정보도 만들어서 온다던가.
“그래. 나중에 보지.”
“예. 다녀오겠습니다.”
기현이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고 뒤이어 나도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초아에게 태선호텔 서교점에 있는 귀빈실 중에서도 별실에 있으라고 언질해두었다.
얼굴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지시해서 만든 곳이었다.
서울 안에서 이보다 은밀하게 만나기 적합한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태선호텔 서교점의 본부장이 별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귀객분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본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온 걸 또 누가 알지?”
“저밖에 모릅니다. 보안을 철저히 했으니 외부에서도 모를 겁니다.”
“잘했어. 라벤더차를 가져다 줄 수 있나? 자네가 직접.”
“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우선 들어가시죠.”
범준의 아내와 단둘이 밀회를 가졌다는 게 알려지면 구설수에 오를 게 뻔하니 특히 조심했다.
별실로 들어갔음에도 초아는 반응 없이 머리를 짚고 있었다.
들었던 대로 상황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나는 말없이 초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5분쯤 정적이 흘렀을까, 본부장이 차반을 갖고 별실로 들어왔다.
“놓고 나가게.”
“네. 앞에서 대기할 테니 필요하신 게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기업의 부회장인 나를 보고도 긴장을 전혀 안 하는 것이나,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것을 보아 유능한 사람이다.
“내 사람이 앞을 지킬 테니 괜찮네. 명함 하나 두고 나가 봐.”
본부장은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무척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명함을 놓고 나갔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아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라벤더차입니다. 마시고 나면 좀 풀리실 겁니다.”
초아는 손을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한 얼굴이었다.
“강빈 씨….”
“우선 마시세요. 초아 씨가 걱정하시는 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강빈 씨가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믿음을 주시면 서범준한테서 떨어뜨려 주겠다고. 초아 씨는 제게 믿음을 줬어요. 이제 제가 해드릴 차례입니다.”
초아의 자의로 미국에서 그녀의 행보나 서범준의 행보, 미혜와의 대화까지 낱낱이 나에게 얘기했다.
아무리 불만을 갖고 있다 한들, 나를 신뢰하지 않으며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초아를 응시했고, 초아의 눈빛은 아주 잠깐 일렁였다.
초아는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는 천천히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차를 다 마신 초아는 이제야 좀 편안한 얼굴을 했다.
“우선 투자를 진행하게 그냥 두세요. 초아 씨가 대놓고 반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빈 씨는 서범준이 하는 투자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 투자는 안 될 투자입니다. 길어야 2년. 서범준은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겁니다.”
“그럼 안 말리는 이유가 있나요? 강빈 씨가 설득하면 금방 투자를 포기할 거예요. 저는 그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요.”
투자도 나의 투자들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는지, 안 된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지금 당장은 해결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잖아요. 초아 씨와 GBC방송국은 지키면서 서범준 혼자 몰락하게 만들 겁니다.”
굳이 초아가 아니더라도 범준 스스로 미끄러지려는데 붙잡아 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이걸로 범준을 완전히 무너뜨리진 못하더라도, 충분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초아 씨가 해줄 일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번 투자를 동업이 아니라 대용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냥 돈을 빌려주라는 거죠?”
“네. 대신 금리는 높게 잡으세요. 함 국장님은 몰라도 중국 쪽 투자자들은 수익이 있어야 움직일 테니까요. 지금 기준금리가 4프로니 최소 8프로 그 이상으로 잡으세요. 서범준은 반드시 물 겁니다.”
범준이 규명을 찾아간 이유야 뻔했다.
도박수를 싫어하는 재만에게 거절당했거나, 애초에 물어볼 엄두를 못 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금융권에 대용을 받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금리를 높게 받는다 한들, 수익이 그보다 훨씬 높다면 범준의 성격상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습니다.”
“저… 메모 좀 해도 될까요? 기억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요.”
“알겠습니다.”
품에 있던 수첩을 꺼내 한 장을 찢어서 볼펜과 함께 초아에게 건넸다.
초아는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반드시 차용인의 이름을 서범준으로 해야 합니다. 설령 직속 직원의 이름을 한다 해도 안 됩니다. 지급해야 할 금액이 어마어마할 텐데 분명 무마하려 들 겁니다. 명의 명시만 잘 되면 적어도 서재만 부회장이 나설 테니 자금 회수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범준은 재만의 아들이자 태선전자의 사장이다.
그가 부채로 인해 파산까지 가는 걸 재만이 그냥 두고 본다면, 태선전자 자체가 흔들릴 테니 재만이 나설 수밖에 없다.
바쁘게 메모를 작성하던 초아가 마지막 온점을 찍고 고개를 들었다.
“네. 강빈 씨 말 전부 이해했어요. 지금 서범준… 그 개자식이 들고 있는 칼자루. 우리가 쥐자는 거죠? 이혼을 하지 않더라도, 저희 집안에 부채가 있는 이상 주도권은 저한테 있으니까요.”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정확합니다.”
***
규명을 설득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초아는 결국 해냈다.
사실 완전한 설득은 아니었다.
규명은 여전히 범준이 하려는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동업하고 싶어 했으니까.
결국 초아가 바꾼 것은 동업이란 말에서 대용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규명과 초아, 범준이 만난 곳은 GBC방송국 맞은편에 있는 백반집이었다.
범준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좋은 곳 가자니까.”
“여기 전 회장님이 좋아하셨던 곳이에요. 범준 씨 입맛에도 분명히 맞을걸요?”
초아가 생글거리며 은근 돌려 말했다.
범준은 거친 말을 내뱉으려다가 옆에 있는 규명을 보며 참았다.
“그래. 하하. 밥이 중요한가. 오늘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안 그렇습니까? 장인어른.”
“으, 응? 그렇지. 허허. 우선 밥 먹고 얘기하자고.”
범준은 아직 규명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여전히 수익분배를 위한 동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백반집에서 밥을 먹는 동안 범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
사업 얘기를 밥상에서 꺼내는 결례도 범하지 않았고, 초아에게는 다정한 남편처럼 행동했다.
“고등어가 참 실하네. 여보야. 한 번 먹어봐.”
범준이 올려준 고등어 살코기에는 가시가 여럿 보였지만, 초아도 굳이 티를 내지 않고 가시째 씹어 삼켰다.
“고마워요. 시금치 무침도 드셔보세요.”
초아도 가만있지 않고 밥 위에 시금치를 얹어 범준의 입에 직접 넣어주었다.
시금치라면 질색하는 범준이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질겅였다.
“너희들. 참 보기 좋구나. 정략결혼이라 걱정한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야. 흐흐.”
둘의 속내는 짐작조차 못 하는 규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봤다.
식사를 끝내고 셋은 GBC방송국의 국장실로 향했다.
도보로 5분도 채 걸리지 않은 짧은 거리였다.
국장실 소파에 앉아 있던 범준은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초아가 건넨 믹스 커피 때문이었다.
“이 싸구려 차를 나보고 마시라고?”
“어머, 여보. 막심 드셔보신 적 없어요? 촬영 나가시는 분들 이거 없으면 촬영 진행을 못 해요.”
옆에 규명도 있고 해서 결국 범준은 믹스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음…?”
물음표를 그리던 범준의 눈이 곧 느낌표로 바뀌었다.
“...먹을 만하네.”
“하하. 이거 우리 서 사위한테 경험시켜 줘야 할 것들이 많이 보이는구만.”
범준은 피식 웃고는 깍지를 끼고 규명을 바라봤다.
“장인어른. 이제 우리 일 얘기 좀 합시다. 중국 쪽 투자자들과는 어떻게, 연락하셨습니까?”
“음… 구어메이와 룽시, 두 투자회사에서 연락이 왔네. 자네가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걸세.”
“투자 규모는요?”
“구어메이가 1300억 원, 룽시가 1800억 원이라고 하네.”
범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도 자신이 긁어모은 자본과 합치면 연수익 몇천억 원은 벌 수 있으리라.
“네. 그리고 수익분배는…”
규명이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말을 끊었다.
“사위. 이번 사업은 동업이 아니라 전부 대용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어.”
범준이 굳은 얼굴로 규명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