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카터와 전화를 하고 다음 날.
범준은 머리가 술에 전 듯한 두통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으….”
손을 더듬거리며 침대 옆에 놓인 탁상에서 물컵을 찾았다.
한 잔을 다 들이켠 뒤에도 탈 것 같은 목마름을 느꼈다.
“여기 물 좀 가지고 와!”
범준이 소리를 친 뒤 얼마 안 되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빠르게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도련님. 여기요.”
범준은 낚아채듯 물컵을 쥐고는 그대로 들이켰다.
“지금 몇 시야?”
“8시 되기 전입니다.”
범준은 머리를 쥐었다가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내가 7시 되기 전까지 안 일어나면 깨우라고 안 했어?”
“그, 그게… 분명 깨웠는데 도련님이 나가라고 하셔서….”
“하… 됐다. 정장 다려놓은 거 있지? 샤워실 앞에 가져다 놔.”
“네. 알겠습니다.”
아주머니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범준은 이미 지각한 마당에 급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으로 느긋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뜨거운 물에 한참을 샤워하고는 아주머니를 불러 머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야 집을 나섰다.
마침 집에서 조금 떨어진 별관에서 초아가 나왔다.
초아는 범준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다시 걸어갔다.
“저, 저게…!”
미국에 갔다 오고 나서 줄곧 저런 태도였다.
결국 범준이 원하는 대로 미혜의 지분을 받는 것엔 실패했지만, 초아는 자신이 도와줬다는 것을 근거로 더는 범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의 집안에는 평범한 부부 사이처럼 비치고 있었지만, 실상은 벌써부터 별거에다가 서로를 무시하는 처지였다.
범준이 발걸음을 서둘러 초아에게 다가갔다.
“어디 가는데?”
“오늘 방송국 회의 있어요.”
“끝나고 뭐 해?”
“범준 씨.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서로 신경 끄고 할 일만 해요.”
“...하. 그래. 나도 신경 끌 테니까 너도 내가 뭘 하든지 신경 꺼라. 응?”
“....”
범준은 초아를 보며 으르렁거리고는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지 애비랑 관련된 일이라도 신경 끄라고. 흐흐.”
범준은 오늘 초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장인어른인 규명을 만날 생각이었다.
출근과 동시에 범준이 찾아간 곳은 재만이 있는 부회장실이었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돋보기안경을 쓴 재만이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가 안경 쓴 건 처음 보네요. 시력이 안 좋아지셨어요?”
“나이 들면 다 이런 거다. 네 할아버지 기억 안 나냐.”
“하긴…. 그보다 아버지. 제가 이번에 투자를 하려고 하는데요.”
재만이 볼펜을 쥐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던 손을 멈췄다.
“그럼 정식으로 보고서 올려야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찾아온 거냐?”
“기업 차원이 아니라 제 개인 투자예요. 일단 한 번 들어보시고 판단해주세요.”
“들어볼 필요도 없어. 혼자 하는 투자면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라. 괜히 기업 돈 건드려서 동만이처럼 되지 말고.”
“아버지. 미혜도 강빈이한테 지분 양도한 거 아시잖아요. 주형이나 주민이는 아직 쥐고 있으니까 그거라도 받으려면 돈 더 만들어야 됩니다.”
남순의 독녀인 미혜보다는 덜 했지만, 영만의 자식들인 주형과 주민이도 태선금융의 지분을 받았다.
영만과는 학을 뗀 녀석들이었으니 돈으로 살살 굴린다면 지분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범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재만을 바라봤다.
“제가 아버지 회장 만들려고 얼마나 열심인지 아시잖아요. 얘기라도 한 번 들어주세요.”
“후….”
재만은 한숨을 내뱉고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그래. 한 번 얘기해보거라.”
“네. 그러니까…”
범준은 어젯밤 카터에게 들었던 상품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카터가 다니고 있는 컨트리파이낸셜에 대해 말할 때는, 그곳이 얼마나 큰 곳인지 재만은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컨트리파이낸셜과 협업하고 있는 부동산 업체에서 1200억 원 상당의 매물들을 구입할 것이라는 말에는 턱을 쓰다듬었고, 이후 CDO에는 한도 없이 투자할 수 있다는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말을 끊지 않았다는 점에서, 범준은 재만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해서 저는 최대한 많은 투자금을 넣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조만 어떻게든 투자한다면 적어도 연수익 2천억 원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 시간이 돈입니다.”
“범준아.”
“예. 아버지. 허락만 해주시면 기업 돈 긁어내고 자본금 끌어모으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 거 알아볼 시간 있으면 기업지침이나 한 번 더 읽고 와라. 전자 사장 맡은 뒤로 네가 날마다 놀러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
“오늘도 늦었더구나. 그리고 그 카터인지 커터칼인지 하는 놈이랑은 술 처먹고 얘기한 거겠지. 그리고 영원한 활황이란 없다. 지금 미국 부동산 시장은 과도하게 불안정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이라는 말이다. 나는 확신 없는 사업에는 절대 투자 안 해. 너도 명심해라. 사업은 도박과 같지만, 승자는 늘 정해져 있다는 걸.”
범준은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재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업을 갖고 오든지 늘 근거를 대라느니, 확신 없는 건 진행하지 말라느니 반대할 뿐이었다.
소심한 인간.
범준은 재만이 강빈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도, 그 소심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강빈을 이기기 위해서 과감한 자신이 나서야 된다고 결심했다.
“예. 아버지.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래. 나가 봐라.”
범준은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부회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집무실을 그대로 지나치고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재만이 반대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 때문에 범준이 향할 곳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범준이 처음 찾아 간 곳은 그의 장인어른이 있는 여의도의 GBC방송국이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건물 자체에서 빛을 뿜어내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중국 큰손들이 줄 댄다고 하더니. 어지간히 돈이 많나 보네.”
드라마 명가로 소문난 GBC방송국은 몇 년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이나 중국 소품 등장 등으로 끊임없는 논란을 생성하고 있었다.
규명의 입김으로 논란이 생길 때마다 쉽게 잠잠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범준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원 한 명이 뛰어나와 제지했다.
“출입증을 보여주셔야 됩니다.”
“당신 누군데?”
“예?”
“아니다. 그건 관심 없고. 내가 누군지 몰라?”
“누구시길래….”
“GBC 방송국장님의 사위다, 이 새끼야.”
“그, 그럼 확인 절차를…”
범준은 거칠게 그를 밀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경비원이 빠르게 무전을 치는 것이 들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그 경비원이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신원확인 되셨습니다.”
“알았으면 됐어.”
범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다른 곳 같았으면 평소처럼 한소리를 했겠지만, 규명에게 부탁할 일도 있고 괜히 장인어른이 있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국장실이 있는 13층으로 올라갔다.
문이 열리자 규명이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환히 웃으며 범준을 맞이했다.
“우리 사위!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아니지, 일단 안으로 모셔야지! 흐흐.”
규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손으로 국장실을 가리켰다.
“장인어른 뵙는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온답니까. 그냥 한 번 구경이라도 할 겸 와 봤어요.”
“그래, 그럼. 안에서 차나 마시다가 가.”
“예.”
범준은 규명의 뒤를 따라 국장실로 들어갔다.
국장실은 마치 갤러리를 연상시키듯 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아래 이름이 적혀져 있는 것들을 보니 영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장인어른. 이 그림들 직접 사신 거예요?”
“응? 아, 그냥 지인이 갤러리 열었다 하면 가서 사오는 거지, 뭘. 나는 그림 볼 줄 몰라. 허허.”
말로는 갤러리라고 하지만, 저 그림을 사 오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자금이 오갔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말을 꺼내기가 더 쉬울 것 같았다.
“신혼여행은 어땠어? 초아 말로는 아주 즐거웠다고 하는데.”
“하하. 저도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와서 선물이라고 잔뜩 사 오긴 했는데, 자네는 통 모습을 안 보이니 조금은 서운했지 뭔가? 허허.”
“이런…. 제가 워낙 바쁜 바람에 경황이 없었나 봅니다.”
“아니야. 그냥 해본 말일세. 한국에서 제일 큰 기업의 사장이면 얼마나 바쁘겠나? 그냥 늙은이 혼잣말로 넘어가게.”
매일처럼 술자리를 열어대는 범준이었기에, 그저 규명의 말이 우습게만 들렸다.
“장인어른께선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두말할 필요가 있나? 자네 아버지는 태선그룹의 회장님이나 다름없고, 자네는 그 뒤를 이을 거고 말이네. 허허. 자네만 한 사위는 적어도 대한민국에는 없을 걸세. 우리 초아와 연을 맺으면서 이제는 내 아들이나 다름없지. 허허. 아, 물론 자네만 괜찮다면 말이야.”
범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미 제 아버지나 다름없으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제안할 게 있습니다.”
“우리 사위말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지. 하하. 말해보게.”
“예. 제가 미국에서…”
범준은 아까 재만에게 설명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얘기를 시작했지만, 수익률은 더 부풀리고 몸짓까지 곁들였다.
“...해서 무조건 이득밖에 안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나야 미국 시장에 대해 잘 모르지만, 자네는 잘 알 것 아닌가. 솔직한 말로는 매우 솔깃하네만…. 그렇게 확실한 투자라면 자네 아버지한테 말하면 되는 일 아닌가?”
범준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안 그래도 바쁘신데 손 벌리고 싶지가 않더군요. 그저 나중에 수익을 낸 이후에 아버지께 힘이 되고 싶다고 건네고 싶어요.”
“이런… 자네처럼 속깊은 사람이 내 사위라니. 이거보다 더한 천운이 내게 있을까 싶구만.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는가?”
“투자금이 필요합니다. 베팅… 아니, 금액이 크면 클수록 이득이 커지는 사업입니다.”
순간 버릇처럼 베팅금이라고 나올 뻔한 걸 겨우 삼키고 단어를 바꿨다.
“그래. 내가 최대한 자금 끌어모아 보겠네. 내 개인 돈과 회사 차원에서 투자한다면 적어도 800억까지는 할 수 있어.”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중국 쪽 투자자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꽤 알고 있긴 하네만, 중국 놈들은 수익에 따라 움직여.”
“수익분배는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잘 얘기해봄세.”
범준이 규명을 부둥켜안았다.
입가에는 찢어질 듯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