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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07화 (207/249)

#207화

남순이 태선호텔 판교점의 부회장실로 찾아왔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지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입맛이 통 없네.”

“식사부터 하시죠.”

“그럴까? 흠… 판교에 맛있는 곳은 모르는데.”

“판교 최고의 맛집을 알고 있습니다.”

“호호. 그렇게 말하면 나 엄청 기대한다.”

“충족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남순을 데리고 간 곳은 최상층에서 한 층 밑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뭐야아, 엄청난 곳이라도 데려가는 줄 알았더니. 네 거라고 자랑하는 거니? 후후.”

남순이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쳤다.

“우선 드셔보시죠. 실망할 일은 없을 겁니다.”

진석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 중 하나가 호텔 내부 레스토랑이었다.

5성급 호텔이라도 음식이 맛이 없으면 발길이 뜸해진다나.

아무튼 내 입맛에도 꽤 맞아서 최근 애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팅이 아니라면 밥먹을 시간도 아끼기 위해 보통 비서가 사오는 음식을 먹는데, 이 레스토랑은 가까운 곳에 있어 부담이 없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고 별실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좋네. 야경도 이쁘고.”

한쪽 벽면이 아예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이제 시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판교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메뉴는 제가 알아서 시킬까요?”

“좋아. 너랑 같이 다니면 뭐 고르느라 고민할 일은 없겠다. 남편이랑은 한참을 고민해야 되거든. 아니면 코스 요리를 하는 곳으로 가거나.”

식탁 옆으로 늘어져 있는 종을 울리자 종업원이 노크를 하고는 들어왔다.

메뉴를 시키고 얼마 안 있어 식전 빵이 먼저 나왔다.

간이 살짝 되어있는 빵을 발사믹에 찍어 먹었다.

“와우. 식전 빵 먹으면서 감탄하긴 처음이네. 뭐가 이렇게 쫀득쫀득해?”

“제가 괜히 고모님을 이곳으로 모셨겠습니까.”

“그래. 우리 조카가 최고다.”

대화를 나누며 빵을 조금씩 뜯어먹고 있을 때, 스테이크가 먼저 나왔다.

남순의 앞에 놓인 접시를 들어 내 앞으로 가져왔다.

“이쪽 분야는 잘 모르지만 A5 등급의 고베산 소의 등심이라고 하네요. 이 레스토랑에서 다른 음식도 먹긴 했지만 이게 최고더군요. 이쪽 부위 먼저 드셔보시죠.”

고기의 단면이 부드럽게 썰렸다.

육즙과 함께 지방이 녹아있어 한눈에도 촉촉해 보였다.

방금 잘라낸 고기를 남순의 개인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애가 어쩜 이리 섬세하니. 남편한테 보고 배우라고 해야겠어.”

나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트소스 베이스의 볼로네제 파스타를 시켰다.

가볍게 먹기 좋아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입에 붙어 애용하는 음식이었다.

남순이 오물거리다가 음식을 삼키고는 말했다.

“너무 맛있다. 남편 데리고 또 와야겠어.”

“네. 예약 안 해도 고모 오면 바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말해둘게요.”

“배려가 몸에 배어 있어. 그거 아니? 너랑 있으면 참 마음이 편하다.”

“저도 그래요.”

남순은 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진태가 남순에게만은 모질게 대하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 있으리라.

진태의 장례식장에서 재만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 할 때, 남순은 진심을 다해 진태의 죽음을 애도했다.

초창기 택배 사업을 도와줬다거나, 다른 오누이와 다르게 준만을 챙겨 주었던 것도 있었지만, 같이 한 사람의 죽음을 슬퍼했기에 내게 남순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응?”

“이유가 있어서 오늘 찾아오신 거 알아요.”

“애는…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라. 그래. 네 앞에서 말 못 할 게 뭐 있겠니.”

남순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임원 회의에서 러시아의 유통시장에 진출하자는 얘기가 나왔어.”

현재 러시아 경제는 급격한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러시아의 주력 국가사업이었던 유가가 급등했고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한 뒤에 인플레가 진정되었다.

210억 달러에 이르는 부채에 보상금 10억 달러까지 얹어 파리클럽에 조기상환을 할 정도였다.

정부의 재정수지 흑자가 계속되었고, 경제부처 간의 역할 분담도 체계화도 끝났다.

완전히 날아오른 러시아에 서구자본이 투입하기 시작하며 러시아의 주식시장은 활황을 맞이했다.

“확실히 가장 기대받고 있는 국가긴 하죠. 지금 세계에서 택배시장이 제일 잘 구축된 게 우리나라니까 유통 쪽 진출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고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긍정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 러시아의 전망은 밝지 않았다.

2008년, 그러니까 앞으로 2년 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국제 금융이 무너지면서 국제유가 또한 폭락해 러시아도 연쇄타격을 입게 된다.

거기까지라도 가면 모를까, 더 심각한 문제는 내년에 일어난다.

내년부터 푸틴의 지시로 외국계 기관의 유통업이 완전히 정지되고 시장에서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실패가 불 보듯 뻔한 상황.

우선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거고요?”

“진출하기로 확정은 했는데 문제는 자본 규모야. 초기 투자로 잡은 게 10조 원 규모거든. 좋은 기회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런 모험수는 둔 적이 없으니까 걱정이 크네. 네가 투자 쪽으로는 천부적이니까 조언이라도 받을까 해서 왔어.”

가볍게 진출하려는 거라면 그냥 두고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10조 원이라니.

아무리 태선백화점이라지만 그 정도 규모는 사활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이대로 태선백화점의 러시아 진출을 막지 않는다면, 태선백화점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도산될 수도 있다.

“고모. 결정을 좀만 더 미루시면 안 될까요?”

“응? 아까는 너도 좋게 본 거 아니니?”

“고모 말대로 규모가 보통 큰 게 아니잖아요. 저도 나름 알아보고 고심할 테니 우리 조금만 더 고민해봐요.”

“흠… 이미 결정된 사안이긴 한데 알겠어.”

남순에 대한 호의를 떠나서라도 태선백화점 또한 태선그룹에 속한 회사다.

내 회사가 그대로 쓰러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

“신혼여행이 끝나기 전날, 미혜 아가씨의 저택을 방문했습니다. 그 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여자들이 호텔 방을 오고 간 것 말고는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기현이 무감정하게 범준의 신혼여행에서의 행보를 보고했다.

“쯧.”

그 한심한 자식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애초에 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한 나도 몹쓸 놈이었지만, 범준은 그 궤가 달랐다.

세상에 허니문에서 아내를 내버려 둔 채 매춘부를 부르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계속 지켜봐.”

“예. 차영균 실장한테 지시 내리겠습니다.”

초아의 사정을 들어서일까, 늘 무심해 보이던 기현이 조금은 열의에 찬 것처럼 보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 기현이도 있었구나.”

준만이 양손으로 박스 하나를 든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준만과 기현은 이미 일면식이 있었다고 한다.

몇 년간 대외적인 일에 채규와 함께했다고 하니, 그때 봤던 모양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부회장님.”

“어허, 부회장 자리 내려놓은 지가 언젠데. 편하게 해. 편하게.”

기현이 살짝 웃고는 말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래.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 올리고.”

그렇게 기현이 나가려고 하자 준만이 불러 세웠다.

“기현아. 너도 들어야 될 거다. 이것 좀 들고 자리에 앉아라.”

“예. 알겠습니다.”

준만이 꽤 묵직해 보이는 상자를 기현에게 넘기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허리야. 이걸 누구한테 시킬 수도 없고. 더럽게 무겁네.”

“그게 뭐길래 그럽니까?”

준만이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뭐겠냐?”

누구에게 옮기라 지시할 수도 없고, 준만 본인이 직접 옮겨야 되는 거라면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겁니까?”

“그래.”

“전에 이채규 부회장님한테 주신 걸로 기억합니다만.”

“간만에 채규 실장님 찾아가서 얘기 나누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말이다. 다시 가져왔다.”

준만의 맞은편에 가서 앉자 준만이 상자를 열고는 검은색 장부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핵심은 이거. 나머지는 이걸 뒷받침해 줄 증거들이다. 세트라고 보면 돼."

“...저보다는 이채규 부회장님이 더 잘 쓰실 텐데요.”

“채규 실장님도 나이가 이제 일흔 가까이 되어 간다. 그 전에 너도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지.”

검은 장부를 펼치자 정재계의 알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주르르 나열되어 있었다.

“돈은 지금도 채규 실장 이름으로 다달이 들어가고 있어. 나름 역사가 깊은 사업이더라.”

진태의 돈을 갖다 바치는데 채규의 이름이라.

아마 최악의 상황이 올 때, 대체자가 필요해서 명의를 바꾼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기현도 채규와 같은 역할을 맡겠지.

슬쩍 시선을 돌려 기현을 보자 정갈하게 서 있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이걸 네가 맡아라. 이름은 기현이로 올리고.”

시선은 준만의 얼굴에 고정하되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무언가 고민이 생길 때 하는 버릇이었다.

확실히 진태가 하던 로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 사람들은 나를 태선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힘도 안 들이고 정계와 재계에 손을 댈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지급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금품로비는 불법이다.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할 테지만,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일.

그리고 나는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다.

이런 장부없이도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는가.

잠깐 고민은 되었지만 장부를 다시 준만에게 넘기거나, 혹은 불태워 없앨 생각이었다.

“주제넘지만, 저를 신경 쓰는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기현을 바라봤다.

“이미 이채규 부회장님께 각 상황마다 대응해야 될 것들은 배워 두었습니다. 절대 부회장님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칫하면 네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

“부회장님이라면 그것에 따른 대우도 해주실 것 아닙니까?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부회장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제 일은 부회장님이 어떠한 일을 진행하든 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럴 자신도, 능력도 있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기현을 바라봤다.

남을 위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 아니.

기현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를 돕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의 목표를 이루게 해줘야 할 의무를 얻었다.

“그래. 아버지. 이 장부. 제가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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