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화장실 갔다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었어?”
“하하….”
범준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재만의 옆에 섰다.
원하지도 않은 결혼식에 더해 화장실에서 강빈까지 지랄맞게 굴어서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정계, 재계에서 다 한자리 하는 사람들이야. 오늘은 그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줄 댈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고.”
“예. 아버지.”
범준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다가온 사람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축하한다. 어렸을 때 보고는 오랜만이지?”
“예. 근데 누구…?”
재만이 범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기억 안 나냐? 태영 삼촌이잖아.”
“아! 부회장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범준이 차렷 자세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태영은 그런 범준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 앞으로 볼 일 많을 거야. 언제 한 번 놀러 와라.”
“저야 좋죠. 부회장님이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녀석. 어릴 때는 그렇게 철부지 같더니 언제 이렇게 듬직하게 컸어? 전자 부회장님도 기꺼우시겠습니다?”
“그럼요. 바쁜 아비 밑에서 아들 녀석이 참 잘 자라주었습니다.”
범준이 살짝 고개를 돌리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만의 환한 미소가 보였다.
기태영은 태선그룹과 달리 YS그룹의 유일한 부회장이자 유력한 차기 회장이었다.
기연수 명예회장이 아직 살아있긴 하지만, 이미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태영이 쥐고 있었다.
재계 1위와 2위라는 접점 때문인지 진태와 YS그룹의 회장, 연수는 적어도 겉으로는 죽마고우인 양 행세해왔다.
둘의 장남인 태영과 재만을 대동하고 만날 때가 잦았는데, 둘은 장남이라든지, 유력한 승계자 같은 접점이 많아서 쉽게 친해졌다.
수준에 따라 사람을 나뉘는 재만 입장에서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을 것이다.
태영이 범준을 바라보다가 재만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어릴 때부터 저희가 했던 약속 기억하십니까?”
“약속한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어떤 약속을 말하시는 지 알 것 같습니다.”
“저한테 딸만 있었어도… 하하. 아쉽게 됐습니다.”
범준은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대신 침만 꿀꺽 삼켰다.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 상대를 정했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기에, 다시 화가 나 주먹을 쥐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게 있어 결혼은 좋은 포장지다. 아버지도 결혼만 하면 손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즐길 거 다 즐겨주마.’
***
범준은 미국에서 꿈만 같은 나날을 보냈다.
미국으로 부른 그의 친구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며 방탕한 시간을 보냈다.
미국의 사창가에는 국적, 인종을 불사하고 다양한 여자들이 있었고 범준은 정해진 규칙처럼 하루에 다섯 명의 여자를 만났다.
이른바 유곽 여행.
새색시가 된 초아가 미국에서 뭘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따위는 범준의 관심 밖이었다.
그렇게 미국 일정을 하루 남길 때까지 방탕하게 놀고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초아를 불렀다.
“왜 불렀는지는 알지?”
“떠나기 전에 같이 미혜 아가씨 보자면서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그것 말고 더 있겠어요?”
어딘지 날이 서 있는 초아의 어투에 범준은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 미국에선 뭐 했어? 남자 끼고 돌아다닌 건 아니지?”
“....”
초아는 대답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렸다.
둘은 지금 미혜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집이 있는 베벌리힐스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 이것 봐라. 이제 대답도 안 해?”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 사촌 언니 집에 머물렀어요.”
“신혼여행인 거 뻔히 알 텐데 너 혼자 온 거 보고 뭐래?”
범준은 남의 일이라는 듯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안 물어봤어요. 누구와 다르게 늘 남을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재미없네.”
야자수가 일렬로 들어선 도로를 지나고 미혜의 저택이 보였다.
“오늘 이 자리 엄청 중요하다. 미혜가 갖고 있는 지분이 꽤 되거든? 그걸 아버지 쪽으로 돌려야 돼. 사람 좋은 거에 약하니까, 우리가 잉꼬부부인 것처럼 보여야 돼. 표정 관리 잘해라.”
“대신 약속 하나만 해요.”
“약속? 허, 참. 말해봐.”
“오늘 이후로 제가 뭘 하든지 신경 끄세요. 저도 범준 씨가 여자를 만나거나,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해도 신경 안 쓸 테니까.”
“...싫다면?”
오솔길을 따라 미혜의 저택 앞에 도착했고, 차가 멈춰 섰다.
초아가 차문을 열어 나가고는 뒤돌아서 말했다.
차갑게 식은 얼굴이었다.
“오늘 이후로 당신한테 협조할 일 없을 거예요. 가요, 여보.”
초아는 손을 내자 범준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매력이라곤 전혀 없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의 면이 있었다.
“그럽시다. 여.보.”
범준이 차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초아의 손을 잡았다.
범준과 초아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별관에 도착했다.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주로 손님이 머무르는 곳처럼 보였다.
고풍스러운 방 안에 앉아 있던 미혜 부부가 일어나서 반겼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
“타지에서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네.”
“나도 그래. 새언니도 고생 많으셨어요.”
초아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쪽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이이가 옆에서 잘 챙겨 주었거든요. 정말 즐거웠어요.”
“어머, 오빠한테 그런 면도 있었어?”
“하하. 미혜야. 오빠 이제 신혼이야. 한창 좋을 때 아니겠냐.”
“그 마음 변하지 마라.”
미혜도 같이 웃으며 옆에 있는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내 하나뿐인 남편, 제임스. LA에서 밴드 가수 하고 있어. 제임스, 이쪽은 내 사촌 범준 오빠랑 아내 되시는 분!”
“응?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제임스 프랭크라고 합니다. 편하게 제임스라고 불러주세요.”
백인 남자기 때문에 당연히 영어를 쓸 줄 알았는데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나오자 범준은 벙찐 표정으로 미혜를 바라봤다.
“후후. 나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고 싶다고 한국어를 공부했거든. 어때, 꽤 유창하지?”
“그러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제임스 대단합니다. 굿. 굿.”
범준이 양손에서 엄지손가락만 추켜 올려 내보이자 제임스가 활짝 웃었다.
“결혼식은 못 가서 미안합니다. 마침 중요한 공연이 있어서요.”
“저도 미혜 결혼식에 안 갔으니 피차일반 아니겠습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미혜가 눈웃음을 지었다.
“오빠가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이 바뀐다니까. 새언니가 정말 좋은 사람인가 봐.”
“우리 초아가 참 좋은 사람이긴 하지.”
초아는 그저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주었다.
“아, 참.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어? 미국에 온다고만 했지. 어디 간다고는 말 안 했잖아.”
“으, 응? 그… 우리가 어디 갔냐면….”
초아가 범준의 손을 잡고는 대신해서 말했다.
“첫날은 하와이에 있는 마우이에 갔어요. 궁전 같은 리조트에서 첫날밤을 보냈죠. 범준 씨가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인지 저만 알 수 있을 거예요.”
“호오, 오빠랑 낭만이랑은 동떨어진 말인 줄 알았는데, 새언니만 아는 비밀이 있나 보네요.”
“후후. 그럼요. 나이아가라 폭포랑 뉴올리언스의 길거리에서 느낀 재즈도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여기 오기 전에 들린 LA였어요. 운하에서 곤돌라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는 게 환상적이었거든요.”
범준은 그저 가만히 앉아 눈만 끔뻑거렸다.
이후에도 미국 관광지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고, 초아는 정말 가보기라도 한듯 능숙하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니, 간식 좀 더 가져올게. 어제 에이든이 보낸 케이크를 가져오지.”
“어머, 그래 주면 고맙죠. 새언니 기대하세요. 에이든은 뉴욕의 호텔 제빵사 출신인데 지금은 제임스와 같이 밴드를 하고 있거든요. 제가 먹었던 케이크 중 에이든이 만들어 준 게 가장 맛있었어요.”
“정말요? 덕분에 이런 멋진 집에서 맛있는 디저트까지 먹네요. 감사드려요, 올케. 제임스! 저도 뭐라도 도울게요. 같이 가요.”
“새언니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앉아 계세요.”
“아니에요.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해서 그래요.”
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범준의 등을 꾹 눌렀다.
자신과 제임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잘 얘기해보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초아와 제임스가 나간 뒤에 싱거운 얘기들이 오간 뒤 범준은 깍지를 끼고 본론을 꺼냈다.
“미혜야. 할아버지 그렇게 되시고 네가 받은 지분 있잖아.”
“하….”
미혜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범준을 흘겼다.
“또 그 말 하려고 찾아온 거야? 새언니까지 데리고?”
“내가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냐. 나 진짜 그 지분이 필요해서 그래. 지금 강빈이, 그 자식이 혓바닥 놀려 가면서 얼마나 많은 지분을 확보했는 줄 아냐?”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한다. 그놈의 지분이니, 승계니. 그런 거에 내 감정, 내 시간 쓰기 싫어서 미국까지 온 거야.”
“알지. 그러니까 차라리 나한테 맡기라는 거 아니겠냐. 내가 제값 쳐주고, 증여세 내주고 다 할게. 너는 그냥 다 내려놓고 지금처럼 여생 즐기면 돼. 혹시나 네가 한국 돌아오고 싶으면 말하고. 내가 네 자리는 언제든지 비워두마.”
“나 이제 갖고 있는 지분 없어. 그러니까 애꿎은 새언니 데리고 시간 낭비하지 마.”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미국 오기 전까지만 해도 주주명부에 네 이름 새겨진 거 확인하고 왔는데.”
태선백화점의 본점에 비치되어 있는 주주명부에서 확인하기로, 분명히 미혜가 갖고 있는 지분의 변동은 없었다.
그럼 미혜가 한국에 머물고 있을 때, 범준이 먼저 미국에 온 사이 지분을 누군가에게 양도했다는 말이 아닌가.
미혜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오빠 결혼식 끝나고 다 정리했어. 이제 태선백화점의 내 명의로 된 지분은 단 한 주도 없어. 그러니까 오빠도 나한테 이럴 필요 없다고.”
“미, 미혜야. 주식들 시장에다가 푼 거냐? 그럼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아니. 아까 오빠가 혓바닥 잘 놀린다는 애한테 줬어.”
“가, 강빈이한테 줬다고?”
“줬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주가보다 훨씬 비싸게 값을 치렀으니까.”
범준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가 미국에서 방탕하게 보내고 있는 동안, 강빈은 다시 한번 승전보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