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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05화 (205/249)

#205화

2006년의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안 되어 코스피 지수는 증시개장 50년 만에 1400포인트를 돌파했다.

그리고 드디어 여의도 한복판에서 GB타워가 시공을 시작했다.

전체 설계자를 맡은 사람은 내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를 수상할 리처드 로저스였다.

건축가로서의 공로만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다고 하니 더욱 기대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범준의 결혼식에 가고 있다.

태선호텔의 예식장을 대주겠다는 내 제안이 무색하게, 범준이 예식장으로 잡은 곳은 호텔 로스였다.

태선호텔이 호텔업계에서 독주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경쟁사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이런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그가 얼마나 옹졸한 인간인지 보여주었다.

호텔 로스의 예식장 앞에는 취재진들이 잔뜩 몰려 있었고, 경호원 수십 명이 그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마이크 세례에 말없이 미소로 대응한 채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축의금을 일절 받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축의금함은 보이지 않았다.

웨딩홀 앞에서 재만이 정장을 입은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나를 보더니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래…. 일찍 왔구나.”

나는 싱긋 웃어 보이고 결혼식이 열리는 웨딩홀로 들어갔다.

웨딩홀을 마주한 소감을 한마디로 하자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재벌가일수록 사생활 노출을 꺼리기 때문에 결혼식을 간소하게 치르는데, 범준은 정반대였다.

그의 의사였는지, 남에게 비치는 모습을 중요시 여기는 재만의 의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로 흰색 꽃들이 만연해 있었고, 신랑과 신부가 걷게 될 버진로드는 은은한 조명이 번지고 있었다.

길이도 꽤 되어서 버진로드를 다 걷는 데 몇 분은 걸릴 것 같았다.

소수의 사람들이 어두운 조명의 하객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일찍 온 목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신부대기실에는 초아를 제외하고도 친구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초아는 물론,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갑작스레 등장한 나를 보며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에 말했다.

“범준이 형 사촌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실례지만 초아 씨.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누, 누구…?”

“그 사람이잖아, 서강빈!”

금발 여자가 나를 보며 의문을 표하자 검은 원피스를 입은 다른 여자가 옆구리를 꾹 찌르며 말했다.

간간이 언론에 얼굴을 비춰둔 게 도움이 되었다.

초아는 두 여자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애들아. 잠깐만 자리 비켜줄래?”

“으, 응. 그럴게.”

“무슨 일 생기면 말해야 돼?”

검은 원피스 여자는 곧장 일어났고, 금발 여자는 초아가 걱정스러운지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결국 신부대기실에서 나갔다.

설득하기 위한 말들이 무색하게 쉽게 일이 풀렸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나를 보고 있는 초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런 식으로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사실 결혼식 전에 말하고 싶었지만, 재만이 초아에게 여러 명의 경호원들을 붙여 두어 접근이 쉽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다기보다, 감시에 가까운 역할이어서 오히려 더 접근하기 힘들었다.

설마 신부대기실까지 경호원을 붙여두는 만행을 저지르진 않을 거라고 예상해서 지금 찾아온 것이다.

초아가 옅게 웃었다.

“괜찮아요.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되죠?”

“편한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강빈 씨. 우선 앉으세요. 많이 불편해보여요.”

초아가 예복을 입고 있어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었던 게 불편하게 비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까 친구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았다.

“강빈 씨가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짐작돼요.”

“....”

“태선그룹은 지금 서재… 시아버지와 강빈 씨의 이파전이라고 들었어요. 저희 아버지의 방송국이 갖고 있는 지분이 필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 초아의 얼굴을 봤다.

결혼을 앞둔 신부답게 얼굴은 화려한 화장에 덮여 있었지만, 눈만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초면에 한다는 말이 대뜸 저런 것이라면, 그녀가 재만과 범준에게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눈에 선했다.

“필요 없습니다.”

“네?”

“저에게 GBC방송국이 갖고 있는 지분은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럼 왜…?”

“서범준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그놈 손에 끝장나는 걸 봤으니까요.”

누구도 아닌 내 얘기였다.

아직도 가끔 잠을 잘 때면 물에 잠겨 있는 꿈을 꾸곤 했다.

초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속내를 감추고 말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찾아오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다른 분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예요?”

“누가 이 대화를 듣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강빈 씨도 알다시피 시아버지는 그 태선전자의 부회장님이세요. 괜히 오해 사기 싫으면 돌아가세요.”

“다시 말씀드려야 됩니까? 누가 이 대화를 듣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초아 씨. 저는 그래도 되는 사람입니다.”

초아는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꿈틀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전생에서 범준이 가정폭력을 저질렀다는 기사들을 봤고, 초아는 내 말에 몸을 움츠리며 떨고 있었다.

“평생을, 아니 잠깐이라도 서로 목적을 위해 하는 결혼일 텐데 왜 초아 씨만 일방적으로 불행해야 됩니까?”

“그럼, 그럼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제가 뭘 할 수 있는데….”

손수건을 꺼내 초아에게 내밀었다.

“저를 한 번 믿어보시겠습니까? 그곳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초아가 손수건을 건네 받고는 자신의 눈가에 갖다 대었다.

“네…. 도와주세요.”

***

범준은 옆에 서 있는 재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재만의 입가에선 웃음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아까는 현 국회의원들과 전 경제부총리, 전 경기도지사와 한참 대화를 나누더니 이제는 지금도 국세청의 인사들과 손을 하나하나 맞잡고 있었다.

아마 진태에게 받은 증여세 폭탄을 처리할 궁리를 하고 있을 터였다.

범준은 재만과 달리 억지웃음을 짓는 게 지겨웠다.

“하하. 담당관님도 조만간 오셔야지요. 제가 사람 보내겠습니다.”

“아버지.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중간에 끼어든 범준을 보며 재만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그래. 다녀오거라. 하하. 높으신 분들 마주하니 이 녀석이 긴장이 되나 봅니다.”

“예.”

범준은 국세청 인사들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마침 예식장에 들어온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범준이 코흘리개 시절 짝사랑하던 사람이었다.

“미혜야!”

비록 어린 시절의 풋사랑에 불과했지만, 아직도 범준에게 미혜는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미혜가 싱그럽게 웃으며 범준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미국에서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

“평생 단 한 번인 행사인데 당연히 와야지.”

“하… 하하. 그치.”

범준은 지금 당장은 참지만 몇 년 뒤에 이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보다 한국에는 얼마나 머무는 거야?”

“일주일 정도? 오빠가 허니문 보내고 있을 동안 나는 한국에 있겠네.”

“아냐. 신혼여행을 보름 동안 갈 생각이거든.”

“그렇게 길게? 오빠 이제 전자 사장님이라며. 시간 없지 않아?”

“갔다 오면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거지. 히히.”

“그런 거 치곤 표정이 너무 수상한데…. 올케가 그렇게 좋아?”

“뭐, 비슷하지.”

이미 범준의 뇌리에는 신혼여행을 빙자한 유곽 여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얼굴이 팔릴까 싶어 못 갔으나, 해외에서는 원 없이 꿈을 펼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신혼여행지가 미국이다?”

미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 그래?”

“응. 너희 집에서 밥이나 한 끼 하자.”

“오빠 웃긴다. 신혼여행에 무슨 나를 만나. 올케나 잘 챙겨 줘.”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너도 올케랑 친해지고 좋잖아.”

“하….”

범준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툭, 툭 치자 결국 미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나중에 연락줘.”

“응. 와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 밥 잘 먹고 가라.”

범준은 손을 흔든 채 미소를 띠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 껴서 숨 막히던 와중에 모처럼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었다.

“후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뭐가?”

“시발! 깜짝아.”

옆을 돌아보니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남자, 강빈이 손을 씻고 있었다.

“뭐가 살 만하다는 거야?”

“너…. 아니다.”

아무리 다혈질인 범준이었지만, 오늘 같은 날까지 생각 없이 굴 생각은 없었다.

잡친 기분을 뒤로 하고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뒤에서 강빈이 말했다.

“형수님이 미인이시더라. 잘 챙겨드리면 안 되냐?”

범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인…? 이 새끼가 지금 누구 놀리냐?”

“눈이 지나치게 높나 보네. 내가 볼 땐 올케, 아니 초아 씨가 훨씬 아깝던데.”

“이게 미쳤나 지금.”

어깨를 잡아 밀치려고 했는데, 강빈이 범준의 두 팔을 잡았다.

그대로 밀려고 했으나, 팔은 더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떨렸다.

“서범준.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그리고 그에 걸맞은 최후도 준비하고 있고.”

“너 지금 형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기대해. 내가 무슨 선물을 줄지.”

“이익…!”

도저히 밀어도 안 되자 팔을 빼내려 했으나 강빈은 팔을 꽉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면 너 어떻게 될 것 같냐? 어! 감당할 자신 있어?”

“응. 있어.”

강빈이 손을 놓았고, 범준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범준은 악,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있는 그대로 찡그렸다.

강빈이 쭈그려 앉고는 범준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범준아. 꼭 백부님께 일러바쳐라. 아버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그게 너니까.”

“이…. 이…!”

범준은 어떤 말이든 뱉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범준을 보며 한마디를 더 했다.

“그럼 마지막 결혼식 잘해라.”

마지막…?

마지막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범준은 뒤늦게 그런 질문이 떠올랐지만 강빈은 이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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