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들어와.”
집무실에 들어온 기현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들어왔다.
태선보험에 있어야 할 기현이 태선백화점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
“보고드리겠습니다. 태선증권사, 태선화재, 태선카드, 태선캐피탈 모두 임원들 정리 끝났습니다. 서영만 부회장 쪽 사람들은 대부분 쳐냈고, 그중 능력있는 사람들만 남겼습니다.”
“서영만 부회장은 별 말 없나? 측근들의 목이 전부 달아났는데.”
“이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회장님께 받은 지분 합쳐도 경영권 못 지킬 겁니다. 부회장님 원하실 때 언제라도 자리 내려놓게 하겠습니다.”
진태는 영만에게 태선보험만의 지분을 남겼지만, 원래 영만이 갖고 있던 지분과 합쳐도 40프로에 살짝 못 미쳤다.
태선보험의 현재 지분 상태는 영만이 보유한 지분을 제외하고 남순, 재만이 각자 4프로 정도. 그리고 태선증권사가 15프로, 내가 30프로, 나머지가 일반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었다.
원래 자회사라면 지주회사의 지분을 가질 수 없지만, 태선증권사는 태선금융 계열에 속하게 되면서 태선보험의 자회사에 포함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태선증권사는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분 면에서도 내가 유리하고 임원들도 모두 내 쪽으로 넘어왔다.
기현의 말마따나 영만을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이름만 부회장이지, 권력 다 잃은 사람한테 급할 필요는 없지. 가끔 허튼짓 하지 않도록 신경만 써줘.”
“가끔이라면….”
“그래. 이제 금융 쪽에선 손 떼고 나랑 같이 일하지.”
기현처럼 유능한 사람을 언제까지고 영만 곁에서 썩힐 생각은 없었다.
기현은 늘상 그런 것처럼 무표정했다.
“일단 위치는 태선물산 사장으로 하지. 사장이라고 해서 실질적으로 할 일은 없을 거야. 이채규 부회장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실 거고. 유 사장은 이제부터 내 뒤에서 움직여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이번 달 안으로 금융 쪽 일 마무리하고 짐 싸겠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진태에게 채규가 이런 존재일까 싶다.
“그래. 이채규 부회장님께도 말씀 드릴 테니 거처에 관련된 건 잘 해결해 주실 거야. 내가 부르기 전까진 물산 일 돕고 있어.”
“알겠습니다.”
“그래. 금융 계열 있으면서 고생 많았던 거 알고 있어. 정리 끝나면 일주일 정도 쉬다가 물산으로 출근해.”
“그리고 부회장님. 태선증권사 윤성환 사장 말입니다만.”
“전에 보고한 내용이 사실이었나 보네.”
“예. 증권사 고객 외에 지인들에게 돈을 받고 독단적인 사업 체계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일 마무리하기 전에 확실하게 내치겠습니다. 그 뒤에 임진용 부사장을 사장으로 올리려고 하는데 어떠십니까? 옆에서 지켜봤을 때 눈치도 있고 쓸만한 사람입니다.”
“아니.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
증권사 사장자리에는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한 명, 내 주변에 있었다.
그 사람이 마침 김이 새어 나오는 차를 쟁반에 담아 집무실에 들어왔다.
“부회장님. 유사장님도 계셨군요.”
황실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내려놓았다.
“대추감초차입니다. 불면증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최근 피곤해 보이셔서 내와 봤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기현이 꾸벅 인사를 하자 황실장이 별말씀을, 이라고 말했다.
황실장은 늘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나를 배려해왔다.
그뿐만인가, 비서의 자리로 태선증권사 본부장 대행까지 몇 년 동안이나 해온 이력이 있었다.
직급이 본부장이니, 증권사의 실세였던 나를 대신하는 일이라 사실상 증권사의 전반적인 경영은 황실장이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실장.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나?”
“예. 직업 만족도 평가를 하면 만점이 나올걸요? 다 부회장님 덕분입니다.”
“그런 형식적인 말 말고. 태선증권사에서는 실무를 뛰었었잖아. 그때에 비하면 어때?”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증권사 일이 더 맞다는 말이군.”
“....”
황실장은 부정하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떨구었다.
“태선증권사 사장 자리가 공석이야.”
“네?”
“맡아서 잘 키워봐. 누구보다 태선증권사를 위해서 일했었잖아.”
“그… 제가 지금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저한테 태선증권사 사장을 하라고 말씀하신 게 맞나요?”
황실장이 최근 들어선 도통 보이지 않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아.”
“부, 부회장님. 제가 이제 겨우 마흔인데 사장 자리를 맡으면 안 좋은 얘기가 나올 겁니다.”
“나이 보고 일 시켰을 거면 에릭한테 GB를 맡기지도 않았어. 황실장은 내가 인정한 유능한 사람이야. 안 좋은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부터 잘라주지.”
“부회장님….”
“하하. 싫다는 말은 없네.”
황실장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완전히 숙였다.
“태선증권사의 본부장부터 태선물산의 사장까지 내 역할을 대신하며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어. 이제 누군가의 대행이 아니라 황실장이 직접 이끌어봐.”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시선을 돌리자 기현이 여전히 무표정한 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유사장이 금융 쪽 일 마무리하기 전에 황실장, 아니 황사장 취임까지 잘 도와줘.”
“알겠습니다.”
“믿어주신 만큼 최선을 다할게요.”
감격에 몸을 떨고 있는 황실장을 잘 달래고 돌려보냈다.
앞으로 한 달 뒤부터는 태선증권사의 황사장이 되어있을 것이다.
***
범준으로부터 청첩장이 날아왔다.
내 위치를 생각해서라도 직접 찾아오는 것이 맞을 텐데, 편지로 보낸 걸 보면 어지간히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전생에서도 범준이 이맘때 결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지금 결혼할 GBC방송국장의 딸은 아니었다.
짐작건대 결혼 상대가 바뀐 이유는 나 때문일 것이다.
나 때문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경영권 승계가 흔들리니 마음이 급했겠지.
전생에서 범준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폭력과 관련된 기사들이 쏟아졌기 때문에 기억했다.
범준의 아내는 마치 감옥에 갇힌 것 같다고 말했던가.
5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하고, 결국 그녀가 폭로한 내용들은 하나같이 치가 떨리는 내용들이었다.
돼지 같다며 밥을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던가, 술에 취해 집에 있는 가구들을 때려 부순 건 약과였다.
결혼 3일 만에 범준이 곧장 외박에 외도를 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친구와도 간통을 했다.
이후로도 범준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을 벌였지만 범준이 처벌받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여자 측에서 무고죄를 뒤집어쓰고 진술을 번복했다.
진실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죽기까지 한 내가 범준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걸 모르겠는가.
씹어 죽여도 모자라지 않는 인간이 서범준이라는 놈이었다.
청첩장에 가장 위 칸에는 서범준의 이름과 함께 여자의 이름이 기입되어 있었다.
“함초아….”
나로 인해 이번 생에서 범준과 결혼하게 될 여자.
이 여자를 도우면서 동시에 범준을 엿 먹일 수 있는 계획을 짤 것이다.
2005년도 이제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올해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음반시장의 회생이었다.
그간 음반의 무단 복제와 공유로 암울했던 음반시장은 저작권법의 강화와 함께 저작권단체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서서히 그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한류 열풍이 시작될 때이기 때문에, 나 또한 엔터테인먼트 관련 시장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기업투자에 비하면 큰 수익을 기대할 순 없겠으나, 해외에 브랜드를 각인시키는데 이만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채규가 경영권을 쥐고 있는 태선기획에 투자해 한류 열풍에 힘입어 태선이라는 이름도 세계화되고 있었다.
한편으론 일본 시마네현 의회에서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강행하자, 어느 때보다 한일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던 해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 의회의 결정은 자신들과 무관하다며 자신들은 지방 의회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가 지방의회에 굴복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뱉는 일본을 보며 한국에서는 반일 시위가 한창이었다.
심지어 시마네현과 자매결연을 맺었던 경상북도는 이에 대한 항의의 차원에서 시마네현과 단절선언을 했다.
노무현 정부도 대일 독트린, 즉 일본에 대한 강경한 정책상의 원칙을 세울 것임을 선언했다.
모두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나라고 가만있을 생각은 없었다.
휴대폰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헬로?’라고 말했다.
“접니다. 페이지 씨.”
“강빈 씨! 그렇지 않아도 전화 드리려 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최근 강빈 씨의 제안대로 인수한 두 기업들의 성과가 굉장했거든요.”
“호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페이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년 전에 인수한 유튜브가 아직 적자를 내고 있긴 합니다만, 내년 안으로 흑자전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사운드의 기술도 굉장하더군요. 기기 개발 뿐만 아니라 영상 송출 방식에 대해서 제안한 방향이 기존보다 배는 효율적이었습니다.”
원래 유튜브가 흑자로 전환하는 기점은 2010년이었다.
내가 아무리 방향을 제시했다고는 하나, 그 기간을 몇 년이나 단축시킨 것이다.
“좋습니다. 투자가 더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하하. 언제나 뒷받침해 줄 투자자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할지 강빈 씨는 모를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페이지 씨가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별 건 아닙니다만.”
“뭐든지 말하세요! 강빈 씨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목소리만 들으면 당장 한국이라도 찾아올 기세였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올해 출시한 구글맵 있지 않습니까.”
“예. 벌써부터 반응들이 뜨겁습니다. 이번 달부터 포틀랜드에서는 대중교통 스케줄과 노선까지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요. 내년부터 다른 지역까지 늘릴 생각입니다. 혹시 이 기능과 관련해 부탁하시려는 겁니까?”
“하하. 아닙니다. 제가 부탁하려는 일은 그것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지역명만 제대로 표기하면 되는 일이거든요. 구글 맵에 오류가 있어서요.”
“검수를 해서 보통 그런 일은 없을 텐데…. 말씀해주세요. 제가 담당 직원한테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네. 우리나라의 독도의 지명이 다케시마라고 표기되고 있습니다. 마치 일본의 것인 양 말이죠.”
“예. 메모해두겠습니다.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 담당 직원한테 일러두겠습니다.”
“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오류 하나 고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습니까. 오늘이라도 해결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페이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게 대답했다.
뭐, 일본의 압박으로 애를 먹을 순 있겠으나 구글의 최대 주주의 부탁 아닌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