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하하. 초아 씨. 그날은 잘 들어가셨나요?”
초아는 재만 앞이라고 태도를 뒤집은 범준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범준은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녀도 결국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버지가, 범준의 옆에는 한국 재계 서열 1위인 태선전자의 사장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시어머니가 될 강숙은 자신을 품평이라도 하려는 듯 뱀 눈깔을 뜨고 훑어보고 있었다.
“그럼요. 범준 씨가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들어갔답니다.”
초아는 억지 미소를 지은 뒤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규명이 초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두 손으로 안쪽을 안내했다.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곳이 한국 제일가는 한정식당이랍니다. 들어가시죠, 사돈어른.”
“그럽시다. 사돈.”
굽실거리는 규명과 다르게 재만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그보다 초아는 강숙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옆에 서 있던 초아의 어머니, 순옥도 눈치챈 듯했지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초아의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집안 차이가 워낙 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초아는 자신이 팔려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별말 하지 않고 어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규명의 과장 섞인 말을 빌려 한국 제일의 한정식당이라는 이곳은 널따란 본관에 별관만 세 채가 있었지만, 이 회동을 위해서인지 모두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제가 힘 좀 썼습니다. 하하.”
규명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재만은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규명은 머쓱한지 어색하게 웃다가 말았다.
본래라면 맞은편에 앉아야 하겠지만, 재만은 기어이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기이한 행동에도 아무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따로 내려온 지침은 없습니까?”
재만이 말을 시작했고, 규명은 상사에게 보고하듯이 줄줄이 말하기 시작했다.
명목상으로는 초아와 범준을 위한 자리였지만, 이런 자리가 될 거라고 초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순옥은 허수아비처럼 미소를 지을 뿐이었고, 강숙은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반쯤 뜨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범준은 초점을 흐린 채 무심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아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목을 옥죄어 숨을 막히게 하는 것 같았다.
의식이 멍해지려는 초아의 정신을 붙잡은 것은 규명의 말이었다.
“...해서, 사돈어른. 식은 언제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주변에서 하도 닦달들이어서요. 허허.”
“뭐… 시기야 맞추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생각하신 시기가 있어요?”
“사돈어른 집안에 비하면 저희 집안은 남는 게 시간 아니겠습니까. 시기를 정해주시면 저희가 맞추겠습니다. 빠를수록 좋구요. 하하!”
규명의 과장된 웃음소리에 재만이 무감정하게 대답했다.
“범준이 나이도 있고… 더 늦출 필요야 있겠습니까. 조만간 연락드리도록 하지요.”
끝났다, 끝났구나 하고 초아는 생각했다.
이 결혼의 목적은 GBC방송국의 지분이 재만의 우호 지분이 되어 그가 회장 자리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그럼 재만이 회장에 오른다면, 이 결혼이 무효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에 젖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재만도, 탐탁지 않게 자신을 바라보는 강숙도 결국 이 결혼을 진행시킬 생각처럼 보였다.
규명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가에 웃음이 만연했다.
“서 사위! 우리 초아 잘 부탁하네.”
“그럼요. 장인어른.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그렇죠? 초아 씨. 우리 잘 살아봐요.”
입꼬리를 올리며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범준에 초아는 체할 것 같았다.
말을 꺼내면 정말 그럴 것 같아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쯧.”
그런 초아를 보며 강숙이 혀를 찼고, 초아는 입을 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순옥이 그런 초아를 보다가 다급하게 일어나며 말했다.
“초아, 초아야? 어머, 죄송해요. 애가 많이 긴장했나 봐요. 제가 나가볼게요.”
“아닙니다. 장모님. 이제 제가 남편 될 사람인데 제가 가볼게요.”
“고마워…. 우리 사위가 속이 참 깊네.”
범준이 순옥을 제지하며 초아를 따라 방을 나섰다.
초아는 화장실 안에 변기통에 팔을 올린 채 헛구역질을 했다.
긴장되는 통에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속이 쓰라렸다.
신분 상승을 꾀하자는 명분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일단 결혼만 하고 몇 년만 버티면 위자료만 몇천억 원이 떨어질 거라는 순옥의 말도 초아를 위로하지 못했다.
“우, 우욱….”
그렇게 한참을 헛구역질하는 그녀의 뒷목을 누군가 잡고 일으켰다.
“지금 어른들 앉혀 놓고 뭐 하자는 거냐.”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초아는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서서히 뒤돌아보았다.
***
채규는 이제 준만이 앉아 있던 자리에 있었다.
[부회장 이채규]
준만이 은퇴하고 채규가 태선물산의 부회장으로 취임한 지 이제 세 달이 지났지만, 태선물산은 여느 때처럼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잘 보내시고 오셨습니까.”
“예. 이번에도 역시 사람 한 명만 데리고 가시더군요. 짐가방도 가벼우셨습니다.”
태선물산을 찾아오기 전에 순례를 내 전용기를 계류한 김포국제공항에 데려다주고 돌아왔다.
“자유로운 분이시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계기는 집안에 대한 회피일지라도, 지금의 순례는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부회장님은 어떠세요, 물산 일에 잘 맞으십니까?”
“저야 회장님 밑에서 일하면서 온갖 일을 다 맡아보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느낀 게 있습니다. 사람을 다룰 줄 알면 무슨 분야에서 일하든 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채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영자가 제 기업의 기술을 이해하고, 개발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보다 좋은 기술자를 끌어오고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채규는 그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은퇴까지 결심하셨던 분이, 저 때문에 일해주셔서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 뜻이기도 하니까요.”
진태가 내게 남긴 안배.
나는 재만이나 다른 진태의 자식들과 다르게 진태의 재산을 물려받진 못했지만,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을 얻었다.
채규는 그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득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언제든지 말해주십시오.”
“주말에 쉬는 걸로 충분합니다. 그간 회장님 모시면서 휴일이라고는 명절을 제외하곤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러고보니, 주말에 진태의 저택을 찾을 때도 늘 채규가 있었다.
휴일까지 반납해가며 진태를 위해 일해온 그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그보다 이번에 태선 건설에 좋은 일거리를 하나 가져오셨던데요.”
이번에 태선 건설에게 GB타워의 공사를 발주했다.
나는 GB타워를 65층, 높이 260미터에 총 연면적이 33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복합 시설을 만들 계획이었다.
“예. 저를 상징하는 건물을 서울 한복판에 세울 겁니다.”
“회장님도 그런 건물을 짓긴 했습니다만, 이건 비교도 되지 않는 정도더군요. 지가를 뺀 총 공사비가 6천억 원이 넘는다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품질과 안전관리 등 태선건설이 모든 것을 총괄해서 시공할 생각입니다.”
“박현욱 사장이 아주 좋아하겠습니다.”
짙은 다크서클을 갖고 있는 현욱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는 것이 눈에 선했다.
마카오에 함께 갔던 현욱은 첫인상은 어딘가 어두웠지만, 대화할수록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이만한 규모의 시공을 맡기는데도 전혀 부담감이 안 느껴지십니다. 부회장님의 구체적인 자산이 궁금한데, 들려줘도 괜찮지 않습니까?”
내 재산이라.
큰 줄기로는 구글, 중국의 3대 IT기업들이 벌써부터 용솟음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자잘한 투자들이 계속해서 수익을 내고 있었다.
신용파산스왑에 배팅한 약 90억 달러와 투자에 들어간 돈을 제외하고도 미국, 스위스에 있는 은행에 잠들고 있는 돈만 한화로 10조 원이 넘었다.
투자에 들어간 모든 주식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지금 태선전자의 시가총액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아십니까?”
“지금은… 흠.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태선전자의 시가총액이 천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800억 달러를 넘네, 마네 하던 것이 재작년이었던 것 같은데 참 성장이 빠릅니다.”
“예. 제가 갖고 있는 태선그룹의 지분을 모두 빼더라도 그 태선전자를 통째로 살 돈은 있다.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허.”
도통 감정의 변화가 없는 채규가 입을 헤 벌렸다.
“부회장님이 외국 투자회사에서 번 돈은 모두 태선그룹의 지분을 사들이는 데 쓴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만큼 파격적으로 지분들을 사들였으니까요.”
재만을 꺾기 위해 나는 몇 년 전부터 프리미엄까지 지급하며 태선가의 지분들을 사들였다.
내가 태선그룹의 주식을 샀다는 기사라도 난 날에는 주가가 훌쩍 뛰었으니 더 많은 돈이 들었다.
결국 내 투자가 태선그룹의 주가를 크게 올리는데 기여한 것이다.
전생보다 태선전자의 시가총액이 훨씬 높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고.
꾸준한 매수 끝에 내 명의로 된 지분은 재만이 보유한 지분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재만이 차명으로 갖고 있을 지분들을 아무리 높게 잡아도, 내 지분을 넘기는 불가능했다.
그만큼 차이가 컸다.
채규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처음 저택을 찾아오셨을 때도 비범하다 느꼈지만, 서강빈 부회장님은 여타 범인들과 다른 초인인 것 같습니다.”
“제가 뛰어나다기보다 저에게 참 좋은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 GB인베스트먼트의 총괄을 맡고 있는 에릭 장도 그렇고요.”
“에릭 장! 저번에 협상했던 것이 기억나더군요. 저를 상대로 부회장님이 원하시는 걸 받아낸 대단한 친구였지요.”
진태가 외화를 환전하기 위해 태선증권사로 채규를 보냈던 날이 기억났다.
“네. 이제 에릭 장은 저에게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채규 부회장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힘이 되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곁에 계신 다른 분들도 부회장님을 따르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진태가 왜 채규를 수십 년이나 곁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채규는 사람이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평생 후회하지 않도록, 나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할 것이다.